루시안의 말도 나름 일리가 있고

루시안의 말도 나름 일리가 있고, 페이트라면 그렇게 하리라고 판단한 알프는 우산을 들고 밖으로 뛰쳐나가려던 것을 멈추었다. 괜히 섣부르게 우산을 가져다주러 나갔는데 페이트가 자동차를 타고 오고 있다면 자신만 헛수고를 한 셈이니까. 물론 루시안이나 알프가 페이트가 학교에 남아있는 것을 알고 있다면 이러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욕실 안에서 뜨거운 물을 온몸에 맞으며, 루시안은 문득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자신은 학교를 다니거나 한 적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마도사로서의, 집무관 교육을 받아왔고 그 일을 해왔었으니까. 물론 정규 교육과정은 집무관이 되기 전에 끝마친 뒤였다. 그리고 자연스레 어린 나이에 집무관으로 임관하였다. 집무관이 된 뒤 어느날, 관리국에서 집무관으로서의 일을 끝마쳤을 때, 비가 내렸었다. 그 상황에서 우산이 없었던 어린 나이의 자신은 별 수 없이 비를 맞고 집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자신은 어렸었고 너무 어린 나이의 집무관을 곱게 보아주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았으니까. 모친도 일이 바쁜 몸이었으니 우산을 가져다준다는 것도 바랄 수가 없었다. ‘실없는 생각이야…. 그 아이랑 나는 다르니까.’ 괜스레 자신의 과거와 연관 지어서 생각해버리는 것에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루시안. 유년시절의 자신에겐 친구가 없었다, 나이 차이가 엄청나게 나는 부하들은 있었어도. 하지만 페이트는 다르다. 친구가 있다. 자신과는 다르다. 어떠한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하고 기댈 수 있는 이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루시안은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괜스레 『어설픈 관계』인 자신보다는 친구들이 그 아이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면서…. 루시안은 진짜 아버지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 아이로부터 아버지 취급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상대방이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고마운 일이지만… 자신이 페이트로부터 아버지 취급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그다지 하지 않았다. 게다가 본인 역시, 크게 정을 줘선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만간 시공관리국에서 정식적으로 마도사로 일하게 될 아이이다, 그렇다면 항상 위험속에 처해있기 마련이고 언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어설프게 정을 줘서, 상처받고 싶지는 않으니까. 어디까지나 보호자 상태로 남을 수는 있겠지만…. 아버지가 되기는 힘들거라고 그는 생각해왔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누구한테 연락이 왔었어.” “연락?” 샤워를 대강 마친 뒤, 옷을 입고 나오자마자 알프가 누군가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말에 루시안은 의아해한다. “몰라, 어떤 아저씨였는데…. 냉정하게 생긴 사람이었어. 관리국 제복 입고 있었는데.” 관리국 제복을 입은 냉정하게 생긴 아저씨. 그 말에 나름 집히는 사람이 있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이 맞을 것이리라, 무슨 일 때문에 이미 은퇴한 자신에게 연락을 취하려 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부를 묻거나 하기 위해서 연락을 하셨을 리는 없겠지.’ 분명히 이젠 더 이상 시공관리국 측과는 연관이 없는 사람이 바로 자신인데…. 한숨을 내쉬면서 물을 한 컵 따라서 그것을 단번에 들이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벽면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았다. 3시 20분. “…나도 이젠 늙은 건가….” 예전엔 집무관 일을 하면서도 가사전반을 맡았었지만 힘들거나 한 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최근, 집무관 일을 그만두고 가사에만 열중하고 있음에도 루시안은 그것이 점점 힘들다 느껴졌고 이제는 20대에 접한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니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왜 이리 늦는 거지…?’ 학교가 끝난 지 1시간이 다되어감에도 돌아오지 않는 페이트에게 그제야 생각이 미친 것은 루시안의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일까. 비록 오는 길이 오르막길의 연속이라서 조금 걸린다고는 하지만 친구들의 차를 타고 온다면 자신보다는 먼저 와 있었을 것을… …설마? 그때,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그 아이가, 차를 타고 오지 않고있다면? 바보 같은 일이지만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루시안은 생각했다. 그래서 황급히 전화기를 들고 자신이 알고 있는 몇 안돼는 전화번호 중 페이트의 휴대전화 번호를 눌렀다. 몇 번의 수신음이 흐르고서야 상대방이 전화를 받는 것에 루시안은 소리치듯이 묻는다. “어디야?!”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고야 말았다. 그 반응에 깜짝 놀란 알프가 눈을 휘둥그레 하고선 루시안을 쳐다보는 것이었고. 【…루시안 씨….】 “지금 우산도 없이 걸어오고 있는 거야?!” 때 아닌 폭우 속에서 어린 아이가 우산도 없이 걸어온다. 이 생각이 드는 것에 루시안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소리치듯이 묻는 것이었고 페이트는 그 말에 아무런 답이 없었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예상대로였다. 그 말에 루시안은 황당해하면서 페이트에게 말했다. “다 오긴 뭘 다와?! 오는 길에 비를 피하고 있어, 우산 가지고 갈 테니까!” 화를 내는 것처럼 이렇게 말하곤 전화를 끊은 뒤, 황급히 우산을 챙겨들고 신발을 신었다. 어째서 이 아이에게 화를 냈던 것일까, 자신이 아침에 우산을 가져가라는 말을 했던 것도 아닌데. “루시안…?” 뛰쳐나가는 자신을 부르는 알프의 소리. 그리고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그를 맞이하는 것은 쏟아지는 때 아닌 비. 루시안은 우산도 채 펼치지 않고, 손에 꽉 쥔 채로 내리막길을 달렸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올 때에 비를 맞은 것도 방금 전의 일이다. 사워를 했음에도 다시금 몸을 비에 적시면서, 우산을 펴고 달리는 데에 걸리는 시간도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루시안은 빗속을 뛰어갔다. * * * * * * 《15:50. 관리 외 제 97번 세계, 우미나리 시, 시가지》 한참이나 쉬지도 않고 빗속을 맨몸으로 뛰었다. 얼마동안이나 이렇게 뛰었을까. 숨이 가빠져옴에도 쉬지 않고 빗속을 뛴 루시안이 비를 피하고 있는 작은 그림자를 발견한 곳은 지금은 문을 닫은 어떤 가게의 앞에서였다. 가게의 문 앞에 드리워있는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작은 그림자, 금발의 소녀의 모습. 페이트였다. “페이트!” 처음으로 그 아이의 이름을 루시안은 크게 소리쳐 불러봤다. 물론 그 외침엔 안타까움과 왠지 모를 화가 섞여있는 것이었지만, 페이트는 자신을 부르는 루시안의 외침에 고개를 들어 루시안을 응시하는 것이었고. 그리고 희미하게 웃었다. 보통의 여자아이라면 화를 내거나 토라져야하는 게 정상이건만, 이 아이가 자신을 향해 웃는 것이 루시안은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와주셨네요, 루시안 씨….” 그리고 우산을 들고 다가오는 루시안에게 힘없이 웃으면서 말하는 페이트. …친구들하고 같이 왔었어야지, 뭐하려고… 이 말을 하고 싶었으나,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질책하는 것처럼 되어버릴 것 같아서. 아직 어린 여자 아이다. 이미 다 큰 성인 남성인 자신과는 다르다. 날씨도 추운데, 이렇게 흠뻑 비에 젖은 채로 그냥 걸어왔었다니…. 그 모습이 옛날의, 그 누구도 우산을 씌워주지 않아 혼자서 비를 맞으면서 걸어왔던 유년시절의 자신과 겹치는 것만 같아서, 루시안은 이를 악 다물곤 소리 없이 갈았다. “다행이다…, 아리사 들이랑 차를 타고가지 않아서….” 사심 없이, 힘없이 웃으면서 하는 이 말에 루시안의 몸이 움찔거린다. 이 이상 별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비에 온통 젖은 채로 웃고만 있는 페이트의 모습에 루시안은 망연해졌다. 화조차도 났는데, 친구들과 오지 않고 쓸데없이 자신들 기다리다가 비를 맞으면서 집에 오고 있던 이 아이에게…. “…가자, 페이트….” 루시안은 이 말 외엔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신이 손에 꼭 쥔 채로, 빗속을 달리면서 가져왔던 우산을 펼쳐서 페이트 쪽을 가려주는 것 뿐. 자신을 향해 우산을 씌워주는 루시안의 행동에 페이트는 다시금 힘없이 웃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흠뻑 비에 젖은 채의 루시안과 페이트. 그래도 루시안은 이미 물에 젖어버린 자신의 몸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이 페이트 쪽으로 우산을 받쳐주는 것이었고 페이트는 루시안이 우산을 받쳐주는 것에 그의 곁에 붙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걸었다. 그리고 일이 터진 것은 저녁때의 일이었다. * * * * * * 《22:00. 관리 외 제 97번 세계, 우미나리 시, 블레이즈 가(家)》 “…로옌이 말입니까….” 【…그래.】 자신에게 연락을 해달라고 했었기에 내키지는 않았으나 루시안은 그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라르고 킬이 자신에게 전해준 소식은 상당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사건의 조사를 하고 있던 마도사들이 모두 살해된 것이다. 그리고 그 마도사들을 인솔하고 있던 로옌 가르벨 집무관의 사망. “….” 루시안은 괴로운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로옌이라 함은, 루시안에게 있어서 꽤나 친분이 있는 이이기도 했다. 자신과 자주 함께 일하기도 했던, 그리고 자신을 잘 따라주기도 했던 동료이자 친구였던 이였다. 루시안도 그런 로옌을 싫어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좋아했다. 그런데 그 로옌이 죽었다니. 【…로옌 가르벨 집무관 뿐만이 아니라 그 외의, 60명이 넘는 마도사들이 살해당했네.】 로옌 뿐만이 아니라 60명이 넘는 마도사들이 살해되었다. “…누구에게요?” 【모르네. 살해된 수법이 모두 똑같다는 것에서 동일 인물에게 살해되었다고 생각되네만.】 “살해된 방법은요?” 【칼로 추정되는 흉기에 의해서 살해됐네, 모두가.】 “…” 60명이 넘는 마도사들을 단순히 칼로 살해했다. 루시안은 그것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어했다. 누구나 들 수 있는 흉기로 마법을 사용하는 마도사들을 60명이나 살해하다니. 단순한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애초에 흉기를 들고 접근하기도 전에 마법에 적중 당하고 제압될 텐데…. 【…S랭크의 마도사 1명, AA랭크의 마도사 10명을 비롯한 도합 66명의 마도사가 같은 흉수에게 살해 됐네. 어떻게 생각하나?】 “….”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말이냐 묻는 표정으로 공간 투사 윈도우 상의 라르고 킬을 루시안은 응시한다. 【자네라면 할 수 있겠나?】 “…마법을 쓴다면 가능하겠지만….” 칼로 그렇게 많은 마도사들을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습격을 하기 전에 포격이나 사격 마법에 의해 제압될 것이니까. 설령 마도사들을 살해하는 데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마력에 의해 타격을 받아 쓰러지고 현장에서 발견될 것이리라. 그때, 루시안은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더 이상 시공관리국 측의 인간이 아닌데 이 일에 대해 심각하다고 생각해가고 있었으니까. 본인도 모르게 마도사들의 살해사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것에 한숨을 내쉬었다. “…골치 아프게 되셨군요, 수고하십시오.” 【자네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일반인한테 시공관리국의 일에 대해서 물어보시면 안 됩니다, 라르고 킬 제독. 당신이 어떤 판단을 내리시든, 일반인보다는 적합한 판단을 내리실 수 있을 겁니다.” 침묵의 대치. 그리고 자신은 일반인이라고, 이번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루시안에게 라르고 킬이 무섭게 노려보면서 하는 말이 있었다. 【…원래는 네가 맡았어야 할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넌 네가 관계없는 일이라고 말하려는 건가?】 “….” 【로옌 가르벨은 자네가 남기고 간 사건을 맡았고, 그것을 조사하다가 죽은 것이네.】 자신이 남기고 간 사건을 맡았고, 그것 때문에 로옌이 죽었다. 그 말이 곧, 자신이 로옌을 죽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루시안은 더 이상 호의적이지 못한 시선을 하곤 라르고 킬을 노려보면서 반문했다. “…웃기지도 않는 농담하지 마십시오, 제독. 로옌에게 제가 조사하던 사건을 맡긴 것은 당신이 아닙니까? 책임이 있다면 오히려 당신의 책임일 것입니다만….” 급기야는 적대적인 어투로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이 내뱉는 루시안. 그리고 둘 사이엔 기묘한 정적이 다시금 감돌았다. 폭풍전야와도 같은… “루시안!!” 그때, 알프가 소리치면서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것에 그 정적은 깨지고야 말았고 루시안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해졌다. 함부로 자신의 방 안에 들어오지 말라고 이 집에 처음 왔을 때부터 일렀건만. 그것을 깜빡하기라도 한 것처럼 뛰어 들어온 알프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루시안. 하지만 알프는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잔뜩 놀라고 당황한 표정을 하곤 루시안의 팔을 잡고 억지로 이끌기 시작했다. “루시안, 페이트가… 페이트가…!” 페이트의 이름을 외쳐대면서 자신을 잡아끄는 알프에 루시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라르고 킬에게 가봐야겠다는 뜻을 눈짓으로 남긴 뒤 알프에게 끌려가다시피 하는 루시안. “?! 페이트!” 그리고 끌려가보니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쓰러져있는 페이트였다. 루시안은 냉장고 앞에 쓰러져 있는 페이트의 모습에 깜짝 놀라서 황급히 쓰러진 페이트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거야?!” “모, 몰라…! 자다가 페이트가 목마르다면서 내려왔는데…, 갑자기 쓰러졌단 말이야…!” 다그치듯이 묻는 말에 알프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더듬거리면서 답하였다. 아까까지 혼자서 거실의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알프의 말 그대로. 비를 맞으면서 걸어왔던 것이 무척 피곤했던지 오늘따라 유난히 일찍 잠에 들었던 페이트였는데…. 그런데 자던 도중, 물을 마시러 내려왔다가 갑자기 쓰러지다니. ‘열이 심해…!’ 감기인 걸까, 쓰러진 페이트를 일으키기 위해 몸에 손을 댔던 루시안은 페이트의 체온이 지나치게 높은 것에 표정을 심각히 구겼다. 불처럼 뜨겁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으니까. 페이트 본인이 내색하지 않았기에 눈치 채지 못했다. 아마 날씨도 추운데, 비를 맞았던 것이 원인일 것이라 루시안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결국 우산을 가져다주지 않은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좀 해봐…!” “시끄러, 당황하지 마! 일단 병원에 전화를 걸어!” 집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정도의 열이 아니다. 루시안에게 마법을 쓰라는 듯이 시선을 보내는 알프. 허나 그의 마법은 질병의 치료 같은 것에 사용할 만한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의 치유마법은 외상을 치료하는 것이지 감기 따위를 낫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알프에게 병원에 전화를 하라고 말한 뒤 페이트를 안아들곤 욕실로 뛰어갔다. 그리고 페이트를 욕조 안에 눕힌 뒤에, 다짜고짜 샤워기의 물을 가장 차갑게 해서 튼 뒤 페이트의 몸 위에 뿌렸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차가운 물이 몸에 뿌려지자 싫다는 듯이 죽어가는 신음을 흘리는 페이트. ‘체온을 내려야 해…!’ 긴 시간동안 열이 심하게 날 경우엔 뇌 내 단백질에 이상이 오게 된다는 것은 그가 알고 있는 기본적인 상식. 어린아이는 그럴 경우엔 나중에 열이 내리더라 하더라도 장애가 올 수 있다. 아마도 열이 나기 시작한 것은 상당히 전부터였을 듯 했으니 루시안은 우선적으로 최대한 페이트의 체온을 내려보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한 것이었다. “루, 루시안?! 병원 번호, 모른단 말이야…!” 이 멍청한 녀석! 마음속으로 루시안은 자신에게 외치는 알프에게 이렇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는 것을 꾹 참았다. “으, 으으…” “…참아, 페이트…!” 차가운 물이 몸에 흩뿌려지자 무의식중에 흘러나오는 페이트의 힘없는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에, 루시안은 의식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소녀에게 말했다. “몸은 욕조에 담근 채로 머리 쪽에 계속 찬물을 부어줘, 빨리! 난 옷 좀 입을 테니까!” 그리곤 알프에게 나름 지시를 내린 뒤 욕실 안에서 부리나케 뛰쳐나가는 루시안이었으니. 그가 갑자기 어딘가로 나가버리는 것에 알프가 깜짝 놀라 외쳤다. “어, 어디 가려고?!” “당연히 병원으로 데려가야지, 이 멍청아!” 횡설수설 당황해하는 알프에 루시안은 급기야 멍청이라는 말을 하고야 말았다. 대충 겉옷을 걸치고선 욕실 안으로 돌아온 루시안의 손엔 아이스 팩 몇 개가 들려있었다. “넌 집 보고 있어, 페이트는 내가 병원까지 데리고 갈 테니까!” “자, 잠깐만! 나도 따라갈…” “집이나 보고 있어!” 위압감마저도 느껴지는 그 외침에 따라오겠다 말을 하려던 알프는 침묵했다. 그리곤 온몸이 차가운 물에 젖어있는 페이트를 욕조 안에서 안아들곤 그대로 등에 업는 루시안. “아이스 팩을 사이에 넣어! 어서!” “아, 알았어…!” 페이트와 자신의 몸 사이에 아이스 팩을 넣으라고 지시하자 알프는 그것을 행한다. 병원까지 가는 동안 또다시 체온이 오르는 것을 최대한 막아보자는 의도였다. ‘제기랄…!’ 등에서 알프가 넣은 아이스팩의 한기가 느껴지자 물에 젖은 페이트를 업어들곤 일어서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간다. 뛰쳐나온 집 안으로부터 부탁한다는 알프의 간절함이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루시안은 고개도 돌려보지 않았다. 의식이 거의 없는 상태의 페이트였기 때문에, 그리고 비가 오고 있었기 때문에 미끄러질 염려가 있어서 자전거는 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루시안은 별 수 없다는 듯이 달리기로 했다. 업고 있는 아이의 몸은 가벼웠다. 그리고 차가운 물에 담가진 탓인지 차가웠다. 하지만 이 한기도 그다지 오래가지는 않을 것, 머지않아 아까 전처럼 열이 도질 것이다. 너무나 가벼운 아이의 무게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마음을 짓눌러오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다. 루시안은 이렇게 생각이 들게 되자 죄책감이 치밀어 올랐고, 이를 악 무는 것이었고…. * * * * * * 《23:00 우미나리 대학 병원》 그날 야근을 마치고 퇴근을 하려던 우미나리 대학 병원의 의사 이시다 사치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퇴근하려던 와중. 비가 쏟아지고 있는 야밤에 등에는 한 아이를 업은 외국인으로 보이는 청년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선 병원의 문을 황급히 두드리는 모습을 봤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그녀는 퇴근하려던 것을 멈추고,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그 청년에게 다가갔었다. 그리고 등 뒤에 업혀있는 소녀의 상태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놀랄 정도로 열이 심했다. 그것 때문에 그녀는 퇴근하려던 것을 멈추고, 병원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급한 환자가 있으니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비록 담당이 신경내과 쪽이긴 하나, 의사로서의 교육을 받아오면서 기본적인 소아과 쪽의 지식은 습득해뒀기에 그녀는 급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으로 대처를 했다. 간단한 감기로 시작했었을 것이 크게 도진 것으로 그녀는 진단했다. 아마도 이럴 경우엔 아이가 일부러 혼자 숨겼던 것이거나, 보호자로 보이는 이 청년이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오지 않았던 거거나. 둘 중 하나이겠지만… 비를 맞으면서도 아이를 업고, 한밤중에 병원에 뛰어온 것으로 보아 후자 쪽일 가능성은 없을 것이라고 그녀는 짐작했다. “일단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뒀어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만, 대처를 잘해주신 덕에….” 보호자로 보이는 이 청년의 대처가 좋았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열이 심할 경우엔 체온을 어떻게 해서든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당황해서 무작정 병원에 데려오는게 아니라 상식이라 해도 좋은, 찬물로 체온을 내리는 방법을 취했다는 것이 아이를 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직 의식은 없지만… 내일쯤이면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거 에요.” 팔에는 주사바늘을 꼽은 채로, 병석 위에 눕혀진 아이의 모습과 그 곁에 앉아있는 청년을 번갈아보면서 내일쯤이면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시다. 하지만 보호자로 보이는 청년은 그 말에도 아무런 반응 없이, 망연한 눈으로 병상 위의 아이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기, 환자 카드를 작성해야 하는데….” 다급했던 상황이었기에 입원 절차도 거치지 않았던 것에, 이시다는 종이를 그에게 넘겨준다. “보호자 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펜을 건네주면서 그녀가 묻는 말에 청년은 뭔가를 말하려다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어렵게 말을 꺼내는 것이 “…아버지…, 입니다.” 힘겹게, 아버지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청년에 이시다는 조금 의외라고 생각한다. 젊은 나이인데, 이런 애가 있다니. 하지만 나름의 사정이 있는 것 같아서 캐묻지는 않기로 했고. 상당히 심각한 표정을 하고선 환자 카드를 펜으로 작성해나가기 시작하는 청년. 보호자의 이름을 적는 칸에 Lucian K. Blaze라고 적자 이시다는 이 청년이 외국인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단순히 외모만으로도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서도. 그리고 그가 환자의 이름을 적은 곳에서 망설이는 것을 그녀는 발견했다. Fate Testarossa라고 환자의 이름을 쓰곤 성을 적는 칸에 볼펜을 갖다대더니, 잠시 망설인 뒤 Blaze라는 글귀를 추가시키는 것이었다. 페이트 테스타로사, 블레이즈라…. 어감이 괜찮다고 이시다는 생각했다. “그럼 마음 놓으셔도 될 거에요. 시간이 늦었으니 댁으로 돌아가셔서…”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비가 오는 밤중에 아이를 업고 뛰어오느라 그 역시 지쳤을 것이라 생각해서,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했던 이시다에게 루시안은 남아서 기다리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이시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당히 지쳐 보이는데, 하지만 본인이 확고하게 기다리겠다는 것을 밝히는 것에 이시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이와 루시안을 남겨둔 채로 병실에서 나갔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그리고 의사인 그녀가 나가자, 루시안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곤 고개를 떨군 채로 생각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보호자일 뿐이다, 아버지가 될 수 없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은 큰 잘못이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정쩡한 관계인 자신보다도, 곁에 있는 친구가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 역시 마찬가지. 모든 것이 자신의 틀려먹은 생각 탓이라고 루시안은 자책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될 수 없는 것, 아버지라고 불리지 못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어정쩡한 관계인 자신보다도 친구가 도움이 될 거라는 것 역시 글러먹은 생각이었다. 힘들 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친구가 아니라 가족이건만…. 자신의 과거와 페이트를 관련지어서 생각했던 것도 글러먹은 것이었다. 자신의 모친은 관리국 측의 일 때문에 우산을 가져다주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루시안 본인은 다르다. 집에서 가사 전반에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우산을 가져다 줄 시간쯤은 충분히 있었다. ‘…자각이 없었어….’ 아이를 입양한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 그것을 단순히 경제적으로 지원해주고 부족함이 없게 해주는 것만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지금에 와서야 깨달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자신의 어머니는 자신을 입양하고 키웠을 때 자신처럼 행동했던가? 하고. 아니다. 그녀는, 루시안의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결혼도 하지 않은 몸으로 아이를 입양했다. 관리국 쪽의 바쁜 일이 있었음에도 자신을 누군가의 손에게 맡기지 않고, 바쁜 와중에도 직접 길러주고 돌봐주었다. 집무관 시험의 결과를 발표하는 날에는 만사를 제쳐놓고, 자신과 함께 와줬으며 수석으로 합격했던 것을 자신보다 더욱 기뻐해주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누구보다도 힘이 되어주었었다. 그래서 루시안은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어머니가 자신이 페이트에게 하였던 것처럼 했더라면 자신은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으리라. 이를 부러뜨릴 것처럼, 그는 이를 갈았다. 지금까지 자신의 행동은 단순히, 인조 마도사로 만들어졌으며 친모라고 믿었던 이에게 버림받은 아이를 이용하려던 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경우는 생각하지 않고선…. 지금 이 순간, 그랬던 자신이 역겹고 혐오스러웠다. 루시안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주사바늘이 꽂힌 페이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아직은 열이 완전히 내리지 않아 뜨거운 아이의 손. 한숨을 내쉬면서, 아이의 이마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것을 닦아준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아이가 깨어나거든, 꼭 이 말을 해야만 겠다고…. 미안하다고…. 《신력 66년 3월 8일. 10:00. 관리 외 제 97번 세계, 우미나리 시, 우미나리 대학병원》 정신이 몽롱했다. 그런 와중에도 이마에서 느껴지는 서늘함과 팔에서 느껴지는 무언가의 이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감싸듯이 하고 있는 따뜻한 느낌. 기억이 흐릿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마지막 기억은 목이 말라서, 자던 도중 내려와 물을 마시려고 했었던 것. 그 이후로의 기억은 없었고… 무겁기 짝이 없는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 올리면서 페이트는 눈을 떴다. “….” 눈을 뜨자마자 보여 오는 새하얀 풍경, 살풍경에 의아해했다. 여긴 어딜까, 어째서 난 여기에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을 품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익숙한 풍경. 그 옛날 하야테의 병문안을 왔을 때 보았던 병실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누워있는 곳은 병상이었고 팔에 꽂혀있는 것은 주사바늘이었고. “….” 이마 위에 얹어져 있는 것은 아직 서늘한 기운이 남아있는 축축한 물수건이었다. “…일어났구나.”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와 주사바늘이 꽂혀진 팔의 손을 감싸 쥐고 있는 손의 주인은 루시안이었다. “…루시안… 씨….” 어제의 열이 남긴 여파 때문인지 페이트는 아직도 정신이 몽롱한 것처럼, 힘없는 목소리로 루시안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고 루시안은 그에 답하듯이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얼굴색이 까칠해보였다고 페이트는 생각했다. 게다가 눈에 핏발도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잠에 들기 전에 몸에 열이 나기 시작했었던 것 같다고 페이트는 생각했다. 그리고 자다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내려왔다가…. 이후의 기억이 없는 것과, 집에 있어야 할 자신이 병원의 병실에 눕혀져있는 것에 페이트는 대강 일이 어떻게 되었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미안해, 지금까지.” “…예?” 그런데 갑자기 루시안이 미안하다는 말을 자신에게 하는 것에 페이트는 의아해했다. 무엇이 미안하다는 걸까. 페이트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가 자신에게 나쁘게 대해주었던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가 괴로운 표정으로 미안하다고 하면서 씁쓸히 웃는 것에 페이트는 루시안을 응시한다. “…미안하다.” 자세한 것에 대해선 말할 수가 없었다. 창피하기도 했고 어색하기도 했으니까. 자신이 지금까지 자각이 없었던 것과, 쓸데없이 자신의 과거와 연관 지어 판단해버렸던 것, 그리고 그 외에도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들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함축시켜서 표현하는 루시안. 고개를 푹 숙여버리곤 자책하듯이 말하는 그 말에 페이트는 루시안을 응시했다. 그리곤 주사바늘이 꽂혀있지 않은 팔을 뻗어, 자신의 손을 감싸듯이 쥐고 있는 그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루시안 씨가… 데려와 주셨죠, 병원에…?” “….” 사용마인 알프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면 당연한 것이다. 게다가 루시안의 몸에서 아직 가시지 않은 빗물과 바깥 냄새에 페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밤이 깊은 시각에 비를 맞으면서 자신을 데리고 병원까지 왔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루시안 씨는 우산도 가져다 주셨고….” “….” “저한테도 잘 대해 주시고…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주시니까….” “….” “…루시안 씨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 말에 루시안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동류인줄 알았다, 자신과. 그것이 페이트 테스타로사와의 첫 만남 때 가졌던 루시안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동류가 아니었다. 이 아이는 어린 시절의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량하고 속이 깊은 아이다. 뒤늦게 깨달은 것이지만 그것만은 확실했다. 무작정 이 아이를 이용하려고만 했던 것 같아서, 단 한 번도 깊게 알아보려고 했던 적이 없던 것 같아서 루시안은 무척이나 미안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괴로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기 위해, 루시안은 힘없지만 뚜렷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미소 짓는 루시안에 마찬가지로 페이트는 힘이 없었지만 웃음을 머금었다. “저… 루시안 씨…?” “왜?” “하나, 부탁을 해도 될까요?” 조금은 머뭇거리면서 페이트가 묻는 것에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흔쾌히 말해보라고 루시안이 말했다. 그는 어지간한 부탁은 들어줘야겠다는 심정으로 수락했다. 그리곤 페이트가 뭔가를 말하려다가 말려다가, 말하려다가 말려다가. 한참동안이나 우물쭈물 거린 끝에 꺼낸 말. “…저, 루시안 씨를… 아빠라고 불러도 될까요…?” “….” 전혀 의외의 것을 부탁이라고 해오는 것에 멍해진 것은 루시안이었다. 하긴, 어디까지나 법적으로나 서류상으로나. 페이트와 그 보호자인 루시안의 관계는 부녀로 명시되어 있으니까. 비록 그다지 나이차가 나지는 않지만 페이트의 양부는 루시안인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불린 적은 없었다. 거리가 있었으니까, 평소의 생활이나 루시안 씨라는 부름에는. 물론 페이트는 루시안이 어제 우산은 가져다준다면 한번은 이렇게 불러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루시안만 좋다면, 그를 아빠라고 부르고 싶다고. 비록 그것이 집어넣어진 것이지만 모친에 대한 기억은 있다. 하지만 부친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페이트는 생각했었던 것이다. 만약 부친이 있다면, 루시안 같이 자신을 위해주고 아껴주는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머뭇거리면서, 거절당할 까봐 조마 조마하는 기색을 보이는 페이트에 루시안은 눈을 지그시 감곤 생각한다. 자신 같은 것을 부친으로 생각해준다면, 고마운 것은 자신 쪽이라고…. 그는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살짝 두드리듯이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나야, 그렇게 불러준다면 고맙지.” 흔쾌한 승낙이었다. 그 말에 페이트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고 그 웃는 얼굴을 보니 루시안 역시 한껏 가라앉아있던 마음이 정화되는 것만 같아서 미소짓는다. “내일쯤이면 퇴원해도 될 거라더라. 그러니까 편히 쉬도록 해. 같이 있어줄 테니까, 불편하거나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하고….” “…예, 아빠….” 막상 입에 올려보니 익숙치 않은 호칭이었다. 하지만 그 호칭으로 불러주자 루시안이 웃음을 지어주는 것에 페이트 역시 웃음으로 응답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얼마 있지 않아서 루시안의 눈이 가늘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에 페이트는 당황했다. 갑자기 눈앞에서 사람이 쓰러진다면 그 누구라도 놀라겠지만…. 하지만 곧, 침대 위로 고개를 파묻고 엎어진 루시안으로부터 작게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에 페이트는 루시안이 잠에 든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까칠까칠한 얼굴, 핏발이 잔뜩 선 두 눈, 그리고 올려놓은지 얼마 되지 않은 듯이 서늘했던 물수건. 그것은 곧 루시안 블레이즈가 잠을 한 숨도 자지 않고 곁에서 자신을 간호해줬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마도 페이트가 의식을 차리게 되자 긴장이 풀려서 피로가 몰려왔던 것 같지만…. “아, 일어났구나?” 그때, 병실의 문이 열리면서 백의를 입은 여성이 들어오는 것에 페이트는 아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언젠가 하야테의 병문안을 왔을 때. 하야테를 진료해주던 의사…. “…감사합니다.” “아냐, 아냐.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걸.”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고맙다는 말을 하는 페이트에 이시다는 손을 저으면서 웃음기를 머금고 해야 할 일을 한 것일 뿐이라 말했다. “참 좋은 분을 아버지로 뒀구나. 어제 밤에, 널 업고 빗속에서 맨몸으로 여기까지 오셨었어.” “….” 빗속에서 맨몸으로 병원까지 업고 와 주었다. 거기다가 그녀가 덧붙여서, 자신이 오늘 의식을 차릴 수 있었던 것도 루시안이 임기응변으로 체온을 낮추려고 했던 덕이라고 말하는 것에 페이트는 피로로 인해 잠이 든 루시안을 응시했다. “게다가 설마 했는데, 진짜로 한숨도 안자고 간호하실 줄은 몰랐네.” “….” “어쨌든 몸조리 잘하렴. 다음에도 혹시 어디가 안 좋거나 하면 숨기지 말고 아버지께 말씀 드려. 몸이 안 좋다고. 그래야 이번처럼 일이 커지지 않을 테니까. 알았지?” 그리곤 이시다는 이 말을 남기곤, 페이트가 의식을 차린 것에 만족하면서 병실에서 나가는 것이었다. 이시다가 나가게 되자 페이트는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자신이 쓰러졌을 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처를 해 주었다. 한 밤 중에, 비를 맞으면서 자신을 업고 병원에 와줬다. 밤새 잠 한숨 자지 않고 간호를 해 줬다. 이 생각을 하면서, 슬쩍 손을 뻗어 잠에 든 그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루시안의 얼굴을 만져본다거나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피로 탓인지 까칠까칠한 감촉의 피부였다. 그리고 페이트는 작은 숨소리를 내면서, 깊은 잠에 빠져든 루시안의 머리카락을 스치듯이 만진 뒤. 혼자 중얼거리듯이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빠….” 라고 말이다. #7 로얄 로드(Royal Road) 《신력 66년 3월 9일. 09:00. 관리 외 제 97번 세계, 우미나리 시, 블레이즈 가(家)》 “그러니까 중요한 건 세컨드 스킬의 단련이라고나 할까.” 길을 걸으면서 루시안이,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페이트에게 하는 말이었다. “때때론 마법이 적중하지 않을 경우가 있으니까,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두 번째 스킬을 갈고 닦는 거지. 네 경우엔 그걸 스피드로 보충하는 것 같아.” “세컨드 스킬….” “그렇다고 세컨드 스킬에 편중되는 것은 좋지 않아. 주요 밸런스를 적당히 맞춰야겠지.” 집을 향해 돌아오는 길, 둘의 대화의 핵심은 세컨드 스킬. 즉 마법의 활용에 대한 것이었다. 어느 정도 몸이 괜찮아지자 퇴원을 마치고 오는 와중, 루시안이 먼저 얘기를 꺼내었던 것이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물론 페이트가 마법을 사용해 싸우는 것을 직접 보거나 한 적은 없다. 하지만 대강 물음을 던지고 얘기를 해 본 결과, 루시안은 페이트가 중거리에서의 전투와 스피드를 활용한 근접전에 능하다는 것을 나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스타일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조언을 해주었다. 그리고 페이트는 그것을 경청한다. “포격을 주요 스킬로 삼는 마도사가 세컨드 스킬로 바인드를 삼아서, 바인드로 묶은 뒤 포격을 맞추는 것도 그래. 그만큼 주요 스킬과 세컨드 스킬의 조화만 잘 맞추더라도 어지간한 일은 다 해낼 수 있어.” “예.” 그것은 옛날, 자신이 한번 당한 적이 있는 것이었기에 페이트는 이해할 수 있었다. 바인드에 이은 포격마법의 효과를. 바인드를 풀지 못하면 포격에 적중당한다. 설령 바인드를 풀어낸다 하더라도, 재빨리 풀어내지 못한다면 피할 수 없다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마법의 활용이나 전투 같은 것은 얼마든지 물어봐. 나랑 너의 스타일은 조금 차이가 있지만… 대강은 답해줄 수 있을 것 같네.” 이 말을 하면서 루시안은 이틀만에 돌아오는 집의 대문을 열었다. “그럼, 아빠…는 어떤 세컨드 스킬을…?” “세컨드 스킬…, …이라고 하긴 조금은 뭐하지만, 근거리 포격 마법일까나….” “…근거리 포격 마법….” “그래도 나 같은 근접형은 원거리에 특화되어 있는 마도사를 상대하는데 애먹게 돼. 먼 거리의 상대방을 공격할 장거리 마법이 몇 개 없으니까. 나도 스피드 쪽으로는 개발을 좀 했었어.” 게다가 근거리 포격 마법이라고 하는 것은 순간적인 출력과 위력이 상당하지만 그만큼 사거리가 짧다는 패널티가 있으니까. 거리를 좁혀 근거리 포격 마법이나 마력 참격을 통한 공격을 하려면 스피드 역시 빨라야 했기에 별 수 없던 선택이었다. “어쨌든 근접형이나 포격형이나 편중되어 있는 쪽은 불편하게 돼. 차라리 너처럼 근접, 원거리를 모두 적당히 소화해낼 수 있는 쪽이 편하지. 밸런스가 맞아서 어떤 방향으로든지 발전할 수 있으니까.” 서로 상성인 셈이다. 근접형 마도사가 포격형 마도사에 약하다, 하지만 포격형 마도사 역시 근접형에 약하다. 포격형이 멀리서 마법을 사용하면 근접형이 곤란하게 되지만, 역으로 근접형이 거리를 좁히게 된다면 포격형이 곤란하게 되니까. 하지만 페이트와 같은 타입은 그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유연성 있게 대처할 수 있는, 최적의 밸런스를 지닌 타입이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뭐 먹을래? 죽이라도 만들어 줄까?” “아, 아뇨. 괜찮아요. 그다지 배고프지 않은 걸요.” “그래도 뭘 좀 먹어야 될 텐데, 죽 만들어 줄 테니까.” 이렇게 권하여도 본인이 먹고싶지 않다는 것에 루시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현관문이 열리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루시안과 페이트. “…이 녀석은 자기 주인이 돌아왔는데도….”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왔음에도, 집을 보고 있어야 할 알프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에 루시안은 미간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주인인 페이트가 병원에서 퇴원해 돌아왔는데도 한달음에 뛰쳐나오지 않는 사용마의 꼬락서니가 거슬릴 수 밖에 없었으니…. 어디에선가 박혀서 아직도 곯아떨어져 있는 것일까, 아니면 TV에 흠뻑 빠져있는 것인가. 루시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알프에 조금은 심기가 뒤틀려서 거실의 문을 확 열어쟂혔다. 그곳에 알프가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그리고 작은 체구의 알프의 모습이 보이자 입을 열어 한마디. “야, 넌 네 주인이 돌아왔는데도…” 모습도 안보이고 있는 거냐? ─라고 이어서 쏘아붙여야만 했었다. 그렇지만 루시안은 말을 채 잇지 못한 것이, 전혀 의외의 인물이 거실의 소파에 앉아있는 것이었고 그 근처에서 알프가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 “이제 오는 것인가, 루시안.” 전혀 의외였다. 관리국의 제복을 입은 채로, 라르고 킬이 알프가 날라다 준 코코아를 마시고 있는 그 어처구니없는 모습에 루시안은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도 바쁘실 텐데, 뭐하려고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라르고 킬.” 그에게 이 말을 하곤 루시안은 알프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듯이, 매서운 눈빛을 보내었다. 루시안의 그 눈빛에 몸을 움찔거린뒤, 빨빨거리는 걸음으로 황급히 다가와선 귓속말을 하는 알프. “나도 몰라, 갑자기 와선. 루시안이 어디에 갔냐고 묻더니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단 말이야…!” 보통의 경우라면 알프는 어림도 없다고 말하면서 쫓아내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시공관리국의 3제독 중 한 명이고 루시안에게 할 얘기가 있다고 하는 것에 내쫓을 수가 없었던 것이고…. 그러면서 알프는 퇴원한 페이트에게 안기면서, 걱정했다고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집들이 선물쯤은 가져오시지 그러셨나요?” 루시안이 씁쓸한 어투로 내뱉는 말에 코웃음 치는 상대방이었다. “그 아이인가.” 라르고 킬이 페이트를 곁눈질하면서 묻는 말에 루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 안녕하세요….” 루시안이 상대방에게 경어를 사용하는 것을 들었던지, 상대방의 시선에 위축된 것처럼 머뭇거리면서 인사를 건네는 페이트. 하지만 루시안은 그런 페이트의 앞으로 나서며, 페이트를 가리듯이 하면서 라르고 킬을 노려보았다. “항공무장대의 명예 원수나 되시는 분이 괜한 일로 여기까지 오셨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만.” “상관없네, 어차피 일 때문에 온 것이니.” “…로옌에 관한 건은 저희와는 상관없습니다.” 나름 집히는 것이 있다면 이것이었다. 60명이 넘는 마도사들이 살해된 사건, 라르고 킬에게도 상당히 충격적인 일일 테니까. 실제로 루시안에게도 충격적인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도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힘들다고 했었다. 그렇다고 이미 사직서가 수리되었고 은퇴한지 3개월이 되는 자신에게 찾아오다니. 잘못되도 한참이나 잘못 되었다고 루시안은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름이 뭐지?” “…예? 페, 페이트 테스타로사… 블레이즈 입니다.” “…라르고 킬 시공관리국 항공무장대 명예 원수다.” 라르고 킬이 이름을 묻자 더듬거리면서 이름을 밝히는 페이트였고 페이트가 이름을 밝히자 라르고 킬 역시 자신에 대해서 짧게 소개를 마치었다. 항공무장대 명예 원수. 자신의 부친을 찾아온 이가 무지막지한 거물이라는 사실에 페이트는 표정을 멍하니 하고선 루시안을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그 아이,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묻는 말에는 답하지 않고 페이트를 가리키며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라르고 킬의 말이, 앞으로 시공관리국 내에서의 행보를 묻는 것이라는 걸 루시안은 파악했다. “곧, 이 아이의 친구와 함께 무장대 육사학교에 입학시킬 생각입니다.” “무장대 육사학교?” “정규과정을 거치게 해야지요. 그 편이 편하고, 관리국에 적응하기도 쉬울 것이고. 무엇보다 친구랑 함께할 수 있을 테니깐 요.” 무장대 육사학교에 입학시킨다는 것은 어찌 보면 정규적인 과정이다. 비록 마도사로서의 재능은 뛰어나고 실력도 어느 정도 갖춘 페이트이지만, 관리국 내에서의 일에는 미숙할 수도 있고 그것을 위해선 정규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일단은 천천히, 안정적인 길을 걷게 하려는 셈이었다. 집무관이 되고 마도 통괄관이 되는 것은 기본적인 것을 마쳐둔 뒤로도 늦지 않다는 것이 루시안의 생각이었으니…. “항공무장대로 보내게.” 그런데 갑자기 라르고 킬이 이렇게 다짜고짜 내뱉는 말에 루시안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항공무장대라니, 겨우 이런 어린 아이에게. 아무리 촉탁 마도사로서 일했고 어둠의 서 사건이라든지, 해결에 큰 역할을 했다곤 하지만 루시안은 자신더러 페이트를 항공무장대로 보내라는 그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헛소리 하지 마십시오!” 항공무장대와 촉탁 마도사 일은 다르다. “말이 됩니까?! 이제 겨우 10살이 되었을 뿐인 아이한테 항공무장대라니!” “아, 아빠…?” “아직 정규과정도 거치지 못한 아이에게 어지간한 국원들도 하기 힘든 항공무장대 일을 시키려 들지 마십시오!” “그래서, 그 정규과정 따위니 해서 무장대 육사학교에 입사시켜서 뭘 어쩌겠다는 얘기지? 다른 마도사들처럼, 평범한 마도사와 같은 교육을 시키겠다는 것인가?” “….” “비록 항공무장대의 일은 어린 나이엔 힘들겠지. 하지만 그만큼의 대가는 있다. 항공무장대에서 일하게 된다면 그 누구보다도 빨리 높은 위치에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그 말도 옳은 말이다. 항공무장대의 일은 무척이나 힘들고 어렵지만, 그만큼 강력한 권위가 있다. 항공무장대 내부에서 큰 역할을 해낸다면 출세는 보장되는 셈이다. 같은 나이대의 마도사들이 무장대 육사학교에서 막 졸업과정을 거치고 있을 때에. 현역으로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니까. 게다가 그 항공무장대의 명예원수인 라르고 킬이 직접 와서, 항공무장대로 오라고 스카우트 제안을 하는 것이라면…. “게다가 항공무장대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집무관에 한층 더 가까워질 수 있겠지.” 그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제안인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루시안은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집무관이라면 무장대 육사학교를 다니면서도 시험에 응할 수 있다. “…못들은 얘기로 하겠습니다, 돌아가십시오. 이 아이는 이제야 병원에서 퇴원해서 쉬어야 합니다.” “그럼 나중에 답을 듣도록 하지.” 그의 못들은 얘기로 하겠다는 말에도, 나중에 답을 듣도록 하겠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라르고 킬. 루시안은 답답했다, 상대방이 저렇게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었고…. 물론, 며칠 전에 저런 제안을 받았더라면 조금은 망설이면서 승낙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아이를 위험 속으로 몰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단순한 보호자가 아니라 부모가 되어주기로 결심한 이상엔…. “아, 그러고 보니 말하지 않았군.” 그때, 라르고 킬이 현관에서 하는 말. “이번 일에 Team-B를 투입할까 생각중이다.” 그 말에 루시안의 표정이 싸늘해진다. Team-B, Team-Blaze. 자신이 만든, 자신의, 루시안 블레이즈의 팀. 그리고 자신이 은퇴해버림과 동시에 대장을 잃었으며 여전히 항공무장대 소속으로 남아있는 집단. “…뭐라고…?”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어버려서, 루시안은 경칭을 쓰던 것도 그만 둬버렸다. 분명히 라르고 킬 나름의 협박이다, 페이트를 항공무장대 소속으로 돌리는 것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Team-B를 사지로 몰아넣겠다는…. 복티아 라르셀, 질량병기, 그리고 AMF. 이것들의 조사를 하다가 수많은 마도사들이 희생되었다. 자신이 만든 팀이었고 이끌었던 팀이었기에 팀 구성원들의 능력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도 루시안이 잘 알고 있었다. 팀의 구성원간 호흡이 잘 맞고 개인이 뛰어난 능력을 지닌 팀이다. 뛰어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대장이라는 버팀목과 구성원을 지킬 이가 없어진 지금은…. 하지만 자신은 이제 관리국의 인간이 아니다, Team-B의 대장도 아니다. 그렇기에 라르고 킬의 결정에 뭐라 참견을 할 수가 없는 것이었고…. “아빠…?” 현관문이 닫힘과 동시에 라르고 킬이 집 밖으로 나가게 되자, 루시안은 이를 빠득 갈았고 그 모습에 페이트는 루시안을 불러본다. 페이트로서는 처음으로 보는 루시안의 섬뜩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섬뜩한 표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언제 있었냐는 듯이 말끔히 사라지는 것이었고 루시안은 자조적인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를 흘리는 것이었다. Blaze라는 명패가 붙어진 집에서 나오자마자, 라르고 킬은 땅이 무너질 듯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노려다보다시피 하던 루시안의 싸늘한 시선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었다. 확실히 자신의 이번 제안, 페이트라고 하는 인조 마도사 아이를 무장대 육사학교가 아닌 항공무장대에 속하게 한다는 것은 위험부담이 있다. 하지만 항공무장대에 들어온다면 앞길은 보장된 셈. 그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해서 했었던 말이었다. 특별한 하자가 없는 이상 자신은 그 아이에 대해 절대적인 지지와 지원을 해줄 것이다. 그 옛날, 루시안 블레이즈에게 적극적으로 했었던 것처럼. 두 번째 마도 통괄관으로 오르는 때까지, 자신이 해주었던 모든 지원을 해줄 것이라고. “…언제나 난 악역이로군.” 이러면서 라르고 킬은 조소한 뒤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이 필요하다면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어차피 자신이나 레오네 필스, 미제트 크로벨. 이 셋 중에서 누군가가 불가피하게 악역을 떠맡아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항상 자신이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 * * * * * 《19:40. 관리 외 제 97번 세계, 우미나리 시, 블레이즈 가(家) 루시안의 방.》 저녁식사를 마친 뒤, 설거지를 끝마치자마자 루시안은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페이트와 알프는 저녁식사를 마친 뒤,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방문을 닫은 뒤, 침대 위에 쓰러지듯이 주저앉으며 한숨을 푹 내쉬는 루시안. “…제기랄.” 페이트를 마도 통괄관으로 만든다. 그것은 자신이 라르고 킬에게 했었던 다짐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걸 대가로 자신은 은퇴할 수 있었다. 게다가 페이트 본인이 지향하던 길 역시 집무관이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항공무장대. 이제야 막 10살이 되는 아이인데 항공무장대라니. 말도 안 된다. 그래서 생각해두었던 것이 무장대 육사학교였는데. 다른 이들이 루시안의 이 말을 들으면 촉탁 마도사로서 어둠의 서 사건도 해결했던 페이트인데 그깟 항공무장대가 뭐가 대수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페이트가 촉탁 마도사로서 해왔던 일은 항공무장대의 성격과는 완전히 달랐다. 페이트는 촉탁 마도사로서 로스트 로기아를 상대했을 뿐이다. 하지만 항공무장대는 로스트 로기아가 아니라 인간을 상대로 하는 마도사 집단이다. 범죄자들 중에는 로스트 로기아보다 더욱 위험한 자도 있다. 집무관의 일보다 더욱 위험한 것이 항공무장대에서의 마도사 생활이다. 그것은 루시안의 경험이었다. 상당한 시간동안 집무관으로 일하며 수많은 범죄자들을 상대했었고 소속 또한 항공무장대였었기에 그들의 위험성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인간을 상대로 싸운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정신 역시 피폐해진다. 물론 자신의 경우는 좀 특이한 유형이었지만…. 한숨을 내쉬면서, 루시안은 서랍장 위에 올려둔 액자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진 속에는 자신이 관리국에 속해있을 때, 이끌었던 팀의 팀원들이 웃고 있다. 친구라고 해도 좋을 그들이 사지에 몰리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렇다고 페이트를 항공무장대에 들어가게 하기도 뭐했다. 그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루시안은 보던 액자를 원래 위치로 돌려놓았다. “누구야?” “저… 아빠…?” 페이트였다. 예전에 자신의 방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었는데, 일단은 문을 두드리는 것에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왜?” “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우물쭈물 말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하는 것에 루시안은 의아해했다. 그래도 이렇게 세워둘 수는 없고, 서서 말하기도 뭐했기에 일단은 들어오라고 하는 것이었고…. “…저건…?” 문 앞에 서있을 때부터 눈여겨봤던 것인지, 페이트는 방 안에 들어오자 서랍 위에 그것은 서랍 위에 올려진 액자 두 개를 지목하면서 페이트가 묻는 말이었다. 하나는 팀의 부하들과 찍었던 사진과 자신이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찍었던 사진. “…아, 저거. 그냥 옛날 사진이야. 옛날에 어머니랑 같이 찍은 사진이고… 또 집무관으로 있을 때 팀 부하들하고 같이 찍은 거.” “아빠의…, 어머니….” 중년 여성과 함께 웃고 있는 사진 속의 소년을 보며 페이트가 중얼거리는 말. 자신이 갖고 있는 ‘어머니’의 사진과 비슷한 구도라 페이트는 생각한다. 겨우 자신의 또래, 혹은 그보다 더 어릴 지도 모르는 소년이 관리국의 제복을 입고 있다. 그리고 그 소년의 곁에 있는 중년의 여성 또한 마찬가지로 관리국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어디서 본 적이 있어….’ 그러고 보니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사람이었다, 루시안의 어머니는. 다만 꽤나 전의 사진이라 누구였는지 페이트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인데…. 떠올리려고 한참이나 시도해 봤지만 떠오르지 않는 것은 별 수 없다. “왜, 무슨 일 있어?” “저… 오늘 오셨던 그 분….” 그리고 루시안이 본론을 묻는 것에 페이트가 하는 말. 아마, 라르고 킬을 말하는 것인가? 루시안은 그럴 거라 생각한다. “킬 제독? 아아… 그냥 전(前) 상관이야. 옛날부터 알았던 분이기도 하고.” “그분이 하셨던 말….” 그제야 루시안은 이 아이가 어째서 자신의 방에 찾아왔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라르고 킬이 했던, 무장대 육사학교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항공무장대로 오라고 했었던 제안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 말을 들었을 때부터 그것을 새겨두고 있었으리라. “…그거 때문이야? 라르고 킬이, 항공무장대 명예 원수가 스카우트 해왔던 거.” “…예.” 기회가 생기면 그것을 잡으려하는 게 사람의 생리이지만 루시안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살아 돌아오면 훈장을 준다는 말에 넘어가서 전쟁이 자원한 소년병이나 마찬가지인 격이었기 때문에 루시안은 그것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들어가고 싶어, 항공무장대에?” “…예.” 조금 뒤에 던져진 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는 페이트. “개인적으로 난, 반대하고 싶어.” “….” “매력적인 제안이긴 해. …항공무장대는 엘리트 집단이고 항공무장대의 명예원수께서 직접 스카우트를 해오며 도와주겠다고 하는 것도…. 하지만 너무 위험해.” 경험자의 충고이니 충분히 숙지해서 다시금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루시안은 생각했다. 하지만 페이트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루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표정 속에서 루시안은 확실하게 세워진 아이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었고…. “…거기는 로스트 로기아가 아니라 인간을 상대하는 곳이야. 일을 하다보면 위험 속에서 늘 일하게 될 거고…. 불의의 사고로 동료나 네가 죽거나 다칠 수도 있어.” “…그래도, 기회가 있다면… 전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설득해서 뜻을 돌려보려는 의도의 말에 페이트는 고개를 저은 뒤, 조심스레 자신의 뜻을 밝히는 것이었다. 마음을 돌려보려고 했으나 본인이 이렇게 뜻이 세워졌다면 어쩔 수 없다 생각하는 루시안. 이 아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게 바로 얼마 전의 일이다. 그게 이 아이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어떤 것이든지. 항공무장대의 소속이 된다는 것은 악영향이 아니다. 다만 위험한 길일 뿐…. “…친구들과도 함께 할 수 없는걸?” “….” “타카마치와는 떨어지게 될 거야, 라르고 킬이 제의를 했던 것은 너뿐이니까.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일을 하게 될 텐데도?” 마지막으로 희망을 품고, 루시안은 이 아이가 마음을 돌리도록 설득을 거듭했다. 하지만 페이트는 한참동안이나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이내 괜찮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오는 것이었고…. “항공무장대에서 일하더라도, 라르고 킬이 널 집무관으로 만들어 줄 수는 없어. 집무관은 시험을 통과해서 되는 방법 밖에 없으니까. 거기서 일한 건 그냥 경험밖에 안될 거야.” “예. 알고 있어요.” 하고 싶은 것이 생기고 그것에 열정을 품게 된다면, 루시안은 이 아이가 하고 싶어 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생각했다. 어렵고 힘들 땐 힘이 되어준다.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주고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부모의 길이기도 했으니까. “…좋아.” 별 수 없이 승낙할 수밖에…. “원래는 네가 일반적인 정규과정을 거치길 원했지만…, 네가 원하니까. 라르고 킬한테 말을 해 볼게.” “고마워요, 아빠….” “…다만, 조건이 있어.” 그냥 무턱대고, 이 상태에서 항공무장대에 보낼 순 없다. 그래서 루시안은 조건을 내걸기로 했다. “며칠 동안은 네가 어떻게 마법을 사용하는지 지켜볼 거야. …그리고 네가 영 아니다 싶으면 그냥 무장대 육사학교로 보낼 거고. …알았지?” “…예! 저, 열심히 할께요…!” 반쯤 허락을 한 거나 마찬가지인 말. 루시안의 그 말에 페이트는 밝은 표정으로 답했다. 하지만 루시안은 걱정부터 앞서기 시작했다. 로스트 로기아는 생명체라기보다는 물건에 가까운 것들이 대부분이다. 비록 쥬얼 시드 사건에서는 타카마치 나노하를 상대로 싸움을 벌였고 패배했다고는 하지만 그건 항공무장대의 싸움과는 다르다. 쥬얼 시드 같은 로스트 로기아를 걸고 하는 싸움이 아니라, 서로의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된다. 인간에게 살심을 품고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건만…. 그러면서 몇 가지 마법을 가르쳐 줘야겠다 생각하면서 루시안은 너무나 빠르다고 생각했다. 원래 마법은 집무관 시험에 합격하게 되고 나서야 가르쳐주려고 했었는데…. 하지만 항공무장대에서 범죄자들을 상대하려면 몇 가지 도움이 될 만한 것은 페이트 쪽에 맞춰 개량하여 가르쳐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앞으로라면 자신의 소중한 친구와는 다른, 출세가도라고 해도 좋을 길을 페이트는 걷게 될 것이다. 페이트가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는 것에도 루시안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 누구보다도 환멸 했기에 그만 두었던 길을 이 아이가 걸으려고 하는 것을 보니…. 《신력 66년 3월 15일. 16:00. 시공관리국 본국 제 029 훈련 스페이스.》 자신을 향해서 휘둘러지는 참격을 페이트는 재빨리 피해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다섯 개의 포톤 랜서를 빠르게 생성시켜서 상대방에게 발사. 하지만 상대방인, 불꽃의 검을 든 기사는 그녀의 불꽃을 내뿜는 디바이스를 휘둘러서 페이트가 회피와 동시에 발사시킨 다섯 개의 포톤 랜서를 없앤다. 【Blitz Rush!】 그리고 그와 동시에, 페이트는 가속 마법을 사용했다. 가속 마법을 사용하여 볼켄 리터의 대장, 시그넘의 배후로 순식간에 접근하는 페이트. 하지만 시그넘은 페이트가 가속 마법을 통해 배후에 접근하여 바르디슈를 휘두르는 것을 레반틴으로 가볍게 쳐내어 무마시킨다. 그리고 다시금 벌어지는 둘의 거리. “미숙하군, 테스타로사. 난 이전에 당했던 것에 다시금 당하진 않아.” 어둠의 서 사건 때─. 시그넘은 카트리지 시스템의 장착이 끝난 바르디슈 어설트를 들고 나타났던 페이트와 다시 싸웠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의 이 공격은 그때의 것과 같은 판도의 것이었다. 사격 마법으로 시선을 뺏어둔 뒤, 가속 마법으로 거리를 좁혀 불의의 기습을 날린다. 그리고 혹시나 먹혀들지는 않을까 해서 예전에 사용했던 기술들을 똑같이 사용해봤던 페이트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불리해, 아직… 시그넘을 이길 수는 없는 건가….’ 그동안의 시그넘과의 모의전 전적은 자신의 열세였다. 그런데 다른 날과는 달리 오늘따라, 페이트가 초조해하면서 억지로라도 시그넘의 빈틈을 만들어보려 하는 이유는 있었다. 저편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시선이 있었으니까. 질 수는 없다. 이긴 때보다 진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페이트는 이번만큼은 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 역시 녹록치 않은 것이, 지금의 상황은 자신에게 불리한 것이 확실했다. 시그넘과의 정면 승부는 스타일이나 상성 쪽으로 자신이 훨씬 불리하다. “레반틴─!” 【Schlange Form!】 시그넘은 상대방과의 거리가 벌어진 상태에서, 자신의 디바이스인 레반틴을 검집에 넣곤 보이스 트리거를 외쳤다. 그리고 검집에서 뽑혀져 나온 레반틴의 형태는 전과는 다른, 슈랑게 하이센(Schlangebeißen)─사복검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채찍을 휘두르는 것처럼, 슈랑게 폼 상태를 한 레반틴의 손잡이를 손목으로 휘두르면서 상대방을 압박해간다. 물론 예전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고 그때의 상대방에게 역습을 당할 뻔 했었던 기억을 시그넘은 잊지 않았었다. 그래서 이번엔 슈랑게 하이센을 통한 압박을 더욱 틈틈이 신경 썼다. 곧바로 닥쳐오지 않고 자신의 주변 공간을 휘감으면서, 천천히 압박해오기 시작하는 레반틴에 페이트는 낭패감을 느꼈다. 빠져나갈 틈을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포격 마법? 무리가 있다, 포격 마법을 채 발동시키기도 전에 주변의 공간을 감싼 슈랑게 하이센이 자신을 옭아매어 올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꼼짝없이 패배하는 것이고…. 예전에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사용했던 하켄 세이버(Haken Saber)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켄 세이버는 궤도가 변칙적이고 배리어에 파고드는 속성이 있어 방어하는 쪽에겐 까다로운 마법이지만 사정거리가 짧고 속도가 그다지 빠르지 않다는 사용자 측의 단점이 있다. 게다가 이 거리는 하켄 세이버의 사정거리가 미치지 않는다. ‘…써야 하는 걸까….’ 물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 하나의 방법이 있긴 했지만 장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외곽에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이의 시선 역시 조금은 부담이 되는 것이었고…. 하지만 방법이 그것 외엔 없다고 생각하고, 페이트는 도박수나 마찬가지인 그것을 선택했다. “하아앗!”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슈랑게 하이센이 페이트를 중심으로 옭아들어 온다. 넓게 퍼진 슈랑게 하이센 중심의 페이트를 그대로 친친 묶어버릴 것처럼 빠르게 조여 오는 슈랑게 폼 상태의 레반틴. 【Thunderer!】 그때, 바르디슈로부터 들려오는 음성. “…뭣?!” 그리고 시그넘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페이트의 몸에서 노란 전격이 피어오르더니, 그대로 조여들어오는 슈랑게 하이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향해 엄청난 스피드로 달려드는 것에 말이다. 그런데 접촉하는 즉시 그것에 묶여들어야 하건만, 마치 몸이 진짜 전기로 이루어진 것처럼 그것을 그대로 통과하여 시그넘에게 하켄 폼 상태의 바르디슈를 들고 다가오는 페이트. ‘이동계인가?!’ 이동계라고 한다면 일반적으로 이동 마법이나 가속 마법을 떠올리겠지만 엄연히 다르다. 이동 마법은 개인적인 이동을 위해 사용되는 마법, 마력을 통한 비행 따위를 칭하는 말이고 가속 마법은 말 그대로 이동 속도를 비약적으로 높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동계는 이동 마법이나 가속 마법과는 다르다. 단순히 이동이나 가속에 그치지 않고, 물체나 벽 따위를 통과해버리는 것이 가능하다. 슈랑게 하이센에 접촉하였음에도 그것을 그대로 투과한 뒤,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것에 시그넘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황급히 슈랑게 하이센을 회수하여 슈베르트 폼(Schwert Form)으로 전환시켜야겠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레반틴의 형태를 전환시키기 전에 하켄 폼의 바르디슈가 공격할테니… 【Blitz Rush!】 하지만 시그넘에게 있어서 다행이라고 할 만한 것이, 페이트가 이동계 마법을 사용해서 정면으로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블리츠 러쉬를 사용하여 후방으로 파고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시그넘은 천만다행이라는 미소를 머금으며 레반틴의 검집을 들고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바르디슈를 막아낸다. “읏…?!” “레반틴!” 【Explosion!】 검집으로 후방에서 휘둘러진 바르디슈를 막아낸 뒤, 슈베르트 폼으로 전환된 레반틴을 검집에 집어넣곤 외쳤다. 그리고 뽑혀져 나온 레반틴에는 타오르는 불꽃이 머금어져 있었고─ “자전일섬─!” “─!” 레반틴을 휘두르며 자전일섬을 사용하자 페이트는 그것을 막아보려고 뒤늦게 디펜서를 사용하려 했으나 막아낼 수가 없었다. 결국 깔끔한 클린 히트. 비 살상 설정이었기에 물리적으로 타격을 입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페이트는 자전일섬에 클린히트를 당하고야 말았다. “…하마터면 위험했군.” 그러면서 시그넘은 레반틴을 거둔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칫했다간 하켄 폼의 마력 참격에 클린 히트를 당했던 쪽은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그러했었으니까. 게다가 페이트와 모의전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이동계의 마법. 그것 역시 전혀 의외의 것이어서 만약 자신이 패배를 했더라면 패배의 요인은 그것이었으리라고 그녀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 * * * * * “…놓쳐버렸구나.” 모의전이 벌어지고 있는 훈련 스페이스 외곽에 서서, 페이트와 시그넘의 모의전을 보고 있던 루시안은 페이트에게 클린 히트가 꽂히는 것을 보게되자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아까 건 위험했네, 시그넘.” 그 옆에서, 마찬가지로 중얼거리고 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 아이. 그래도 같이 나란히 서서 모의전을 봤었기에, 이야기를 대강 나눠 본 결과 루시안은 이 여자 아이가 비타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었다. 그리고 이 아이 역시, 페이트와 모의전을 한 시그넘처럼 야천의 서의 수호기사 시스템인 볼켄 리터 중 한명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까웠는걸. 만약 정면으로 붙었었더라면….’ 루시안이 멀리서 지켜보면서 분석한 페이트의 패인은 정면이 아닌 배후를 노렸던 것. 페이트가 아까 사용한 이동계 마법, 썬더러(Thunderer)는 루시안이 며칠 전 페이트에게 가르쳐주었던 그의 마법이다. 스피드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 페이트의 특성상을 고려해, 자신의 마법 중에서 페이트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을 그쪽에 맞춰 개량시켜 전수시켜주었던 것이다. 썬더러는 이동계 마법의 특성대로, 어떠한 물체든지 그대로 통과해버릴 수 있는 마법이다. 거기다가 스피드의 가속까지 덧붙여져 있는 것이었으나 걱정이 앞섰던 것은 페이트가 이것을 얼마나 잘 활용할 수 있느냐의 여부. 썬더러는 루시안이 만들었고 자주 사용했던 마법이다. 마땅한 단점이 있는 마법은 아니지만 단점이 있다면 마력의 소모가 과하다는 것일까. 물론 자신이 보유한 마력량이라면 상당한 시간동안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이었으나 페이트의 경우엔 긴 시간동안 사용하기엔 무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미리 일러두길, 순간적인 역습을 노릴 때에 사용하라고 했었던 것이다. 물론 페이트는 루시안이 조언해준 데로 썬더러를 역습에 사용했고. 그리고 시그넘 역시 당황했었다, 예상치도 못한 이동계 마법에. ‘…배후를 치려했던 그 찰나에, 방어의 준비가 끝마쳐진 거지.’ 썬더러를 사용한 뒤, 곧바로 정면을 공격했더라면 페이트 쪽에서 클린 히트가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블리츠 러쉬의 사용 뒤, 배후를 노렸기에 그 시간동안 시그넘은 방어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공격은 막혔고 오히려 역공을 허용해버렸다고 루시안은 파악을 끝마쳤다. “습관인 건가….” 페이트의 모의전을 보고 있자니 느낀 게, 페이트 본인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습관 비슷한 것이었다. 루시안이 보기엔, 페이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배후에서의 공격이나 일부러 틈을 노리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정면에서 공격해 들어온 적은 그다지 없었다. ‘…그래도 처음치고는 잘 사용한 거야.’ 단 한 번도 실전에서 사용해본 적이 없는 마법을 사용해서 승기를 잡을 뻔 했다. 그것만으로도 루시안은 페이트의 노력과 재능을 높이 사야한다 생각하면서도, 아쉬움이 남는 것을 지울 수는 없었고…. “아빠….” 풀이 죽은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며, 허공에서 내려오는 페이트에 루시안은 격려를 해주고자 웃어보였다. “괜찮았는걸? 수고했어.” “…예.” 이렇게 웃으면서 말해줘도 침울해하는 모습을 보니, 져버렸다는 것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으리라. 게다가 페이트는 필시, 루시안이 전에 앞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지켜보겠다고 했던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으리라. 이번에는 이겨야한다고 생각했는데. 루시안이 웃으면서 괜찮았다고, 수고했다고 하는 말에도 페이트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저, 역시 그냥 정면을 공격할 걸 그랬나요?” 본인 역시 패배한 요인을 알고 있는 것에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면승부를 너무 기피하거나 해선 안돼. 상황에 맞춰서 정면승부를 거는, 나름의 과감함도 필요하다고나 할까….” “과감함….” “그리고 스피드가 빠르다는 것을 이용해서, 무조건 빈틈을 노린다거나 배후를 노릴 필요는 없어. 스피드가 빠르면 그만큼 정면에서도 상대방보다 빨리 공격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이렇게 말해주면서 잔뜩 실망해있는 아이에게 기운을 돋아주기 위해, 루시안은 머리를 두드리듯이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루시안은 헛기침을 한번 한 뒤, 계속 신경 쓰였던 것을 말하려 했다. “…페이트, 일단 바꿔야 할 게 있는데….” “예? 바꿔야 할 거요…?” “…1순위로.” 필수불가결로 바꿔야 할 게 있다고 루시안이 하는 말에 페이트는 무엇이냐고 묻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한참이나 루시안이 뜸을 들인 뒤, 머뭇거리면서 입에 올린 말은 이것이었다. “…배리어 재킷.” “예? 배리어 재킷이요…?” “…그래, 배리어 재킷의 디자인을 좀…, 바꾸는 게 좋을 것 같다. …좀 평범하게….” 말하기 조금은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루시안은 말한다. 모의전을 하기 위해서 페이트가 배리어 재킷으로 갈아입었을 때, 그것을 처음 본 루시안은 깜짝 놀라서 사래가 들었었다. 굳이 말하자면 과도한 노출 때문에. 아무리 아이라고 하지만 이 디자인은 좀 아니다 싶었다. 게다가 발육도 잘 되어있는 아이인데. 배리어 재킷이 아니라 무슨 수영복에 망토 하나 걸쳐놓은 듯한… 그 디자인에 기겁했던 것이다. “조만간, 내 배리어 재킷하고 비슷하게 바꿔보자…. 아무래도 지금의 것은 좀… 여러 가지 의미로… 그런 것 같아….” “예….” 저런 배리어 재킷으로 항공무장대에 가서 일을 하게 되었다간, 다른 마도사들이 배리어 재킷만 음흉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루시안은 생각했다. 실제로 항공무장대에는 별의별 인간들이 다 있으니까. 차라리 자신의 것과 비슷한 것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며 말하는 것이었고…. 물론 페이트는 루시안이 어떤 이유 때문에 그것을 바꾸자고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루시안이 말하길, 보기에 조금 그렇다고 하니까 조만간 마리엘 기술사관에게 부탁하여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수고했다, 테스타로사.” “아, 수고했어요. 시그넘.” 그리고 시그넘 역시, 훈련 스페이스의 상공에서 내려와 바닥에 착지했다. 루시안은 그 시그넘을 응시했다. 상당한 실력이라고 생각되었다. 실제로 관리국 내에선 근대 베르카 식도 아닌, 고대 베르카 식의 마법을 사용하는 쪽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그 중에서도 1류라 봐도 좋을 깔끔한 실력이었으니까. “…그 쪽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때, 시그넘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시선을 느꼈던지 묻는 말에 루시안은 소개를 하지 않았던 것을 깨달았다. “루시안 K. 블레이즈. 페이트의 아버지야. 잘 부탁해.” “아…, 테스타로사의…. 볼켄 리터, 시그넘입니다.” 손을 건네는 것에 그것을 맞잡으며 통성명을 한 뒤, 서로에게 잘 부탁한다 말하는 루시안과 시그넘. “하마터면 위험했군. 갑자기 이동계 마법을 쓸 줄이야….” 시그넘이 페이트에게 하는 말이었고, 그 말에 페이트는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실례지만, 블레이즈 씨. 블레이즈 씨도 마도사십니까?” 그때, 갑자기 시그넘이 이렇게 물어오는 말에 루시안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과거형이지만, 마도사였어. 어떻게 알았어?” “모의전을 할 때, 시선이 테스타로사의 모습을 쫓고 계시더군요.” 모의전을 하는 중에 그런 것까지 보았단 말인가? 시그넘이 하는 말에 루시안은 발뺌할 수도 없게 되어버려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지금은 은퇴했지만…. 얼마 전까지는 마도사였어. 지금은 그냥 일반인.” “그럼,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와 모의전을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루시안이 순순히 시인하는 말에 시그넘이 왈, 모의전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혀 의외의 그 부탁에 루시안의 표정이 상당히 멍해지는 것이었고…. 비타는 그런 시그넘의 모습에, 『전투광』이라는 말을 중얼거린다. 하지만 루시안은 이내, 옅은 미소를 머금곤 고개를 저어 거절의 뜻을 보였다. “…미안, 난 이제 일반인이야. 마도사 짓거리는 때려치운 지도 꽤 됐으니까….” 집무관 일을 그만두고 시공관리국과의 직접적인 연을 끊었을 때, 다짐했었던 것이 있었다. 다시는 마도사로서 마법을 쓰지 않겠다고…. 비록 페이트 일 때문에 마법이나 시공관리국과 완전히 연을 끊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루시안은 다시는 마도사로서, 마법을 사용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자신의 인텔리전트 디바이스인 궁그닐만큼은 버릴 수가 없었다. 비록 디바이스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얼마 전까지 자신과 함께 해주었던 친구다. 디바이스에 정을 느낀다는 것은 좀 바보 같은 짓이겠지만…. 모의전 상대를 해달라는 부탁에도 루시안이 거절의 뜻을 밝히자, 시그넘은 못내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녁식사라도 함께 하시러 가시겠습니까?” “저녁식사?” “예, 주인께서 마침. 오늘 테스타로사에게 저녁을 같이 먹지 않겠냐 물어보라고 하셔서.” 저녁식사로의 초대. 원래는 페이트에게만 해당하는 얘기였겠지만 루시안이 함께 왔던 것에 시그넘은 한 명 정도는 더 늘어도 상관없겠다 생각했고 페이트의 아버지라 하니까 그에게 제안한 것이었다. 뜻하지 않은 저녁식사 초대에 잠시 고민하는 루시안. “…나, 의외로 맛있는 것을 찾는 편이라. 싫은 소리 해버릴 수도 있는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주인의 요리 실력은 수준급이니깐 요.” 솔직히 자신이 요리를 잘하게 된 것도, 맛있는 것을 먹고자 하는 취지에서였었다. 괜히 초대받아서 갔다가 음식이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괜한 소리나 불편한 기색을 보일까봐 했던 말인데 시그넘이 자부한다는 듯이 하는 말에 그 생각이 흔들렸다. 그리고 비타가 그 말이 옳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것에 “…알았어, 고마워.” 루시안은 이 곳의 음식을 맛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초대에 응하는 것이었다. 《18:00. 관리 외 제 97번 세계, 우미나리 시 야가미 가(家)》 시그넘 들이 살고 있다고 하는 곳은 의외로 자신의 집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물론 루시안은 볼켄 리터들이나 그들의 주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오면서 페이트가 말해준 이름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야가미 하야테. 어둠의 서 사건의 핵심 인물, 그리고 이젠 야천의 서의 주인이 된 소녀. 그것이 볼켄 리터들의 주인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루시안과 페이트는 시그넘과 비타가 앞장서서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따라 들어갔다. “다녀왔어!” 어린아이답게, 활기찬 목소리로 다녀왔다는 말을 외치며 집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비타. “아, 어서와. 시그넘, 비타.” 그 목소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긴 치마를 입은 금발의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것에 시그넘과 비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때맞춰서 왔네? 마침 저녁 준비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아, 아아… 그래… 샤멀…. …그런데, 오늘 식사는… 네가…?” “페이트가 온다고 하기에, 하야테 혼자서는 준비하는 게 힘들 것 같아서. 도와주고 있었어. 그런데 그쪽 분은…?” 뒤쪽에 있는 루시안을 보면서 샤멀이 묻는 말이었다. 그 물음에 시그넘은 깜빡 했다는 듯이 탄성을 내뱉곤 루시안을 소개한다. “아, 이 분은 테스타로사의 아버님이신… 블레이즈 씨.” “루시안 K. 블레이즈라고 합니다.” “아, 페이트의 아버님이셨군요…. 샤멀이라고 해요. 잘 부탁드립니다.” “예….” 이상한 것이, 반말이 아닌 존댓말이었다. 본능적으로 존댓말이 나오고 말았다고나 할까, 상대방의 모습에서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세월의 연륜(?)이 묻어나오는 것에 루시안은 샤멀에게만은 존댓말을 했던 것이다. “저… 말 놓으셔도 되는데….” “아, 아뇨….” “그러지 말고 그냥 편하게 대해주세요.” “아, 아닙니다… 어떻게 감히….” 샤멀 본인도 그것을 느꼈던지, 루시안에게 존댓말을 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으나 루시안은 당치도 않다는 듯이 계속해서 존댓말을 썼다. 처음 보는 상대이기도 하고 연장자 같아 보이기도 했으니까. “…제발 존댓말하지 말아주세요…!!” “…예?” 그런데 갑자기 샤멀이 울먹이면서, 절규하듯이 외치며 하는 말에 루시안은 멍해졌다. “늙어 보인다거나, 아줌마라거나, 어머님이라거나, 그런 말은 자주 듣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단지 긴치마를 입은 것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라고요!!! 아직, 아직 저는 젊은데도…!” 늙어 보인다거나, 아줌마라거나, 어머님이라거나. 전혀 그런 말 한 적은 없는데, 그냥 존댓말을 했을 뿐인데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또 병이 도졌군, 그냥 무시하십시오. 요즘엔 자주 저럽니다.” “…그, 그래….” 혼자서 쓰러져선 훌쩍이는 샤멀의 모습에 무시하라고 종용하며 시그넘은 루시안과 페이트를 안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어쩐지 샤멀의 저런 모습이 남일 같지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이전에 놀러왔던 페이트의 친구 때문일까. 저렇게 절규하는 모습으로부터 루시안은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줌마라니…! 내가, 내가 아줌마라니…!” …등 뒤에서 들려오는 샤멀의 처절한 절규가 가슴을 찔러왔다. 그러면서 시그넘이 말하길, 『어차피 겉모습만 젊지 실제 나이는 늙어도 한참이나 늙은 주제에…』 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 다녀왔어? 시그넘.” 그때, 부엌 쪽에서 들려온 어린 소녀의 목소리에 루시안은 샤멀에게로 측은한 시선을 보내던 것을 멈추곤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장 눈에 보이는 것이 바로 휠체어라는 것에 흠칫 놀란다. “예, 주인 하야테.” “아, 페이트도 왔구나. 어서 와, 거의 다 차려 뒀으니까….” “응, 초대해줘서 고마워, 하야테.” 웃으면서 서로에게 인사를 주고받는 페이트와 하야테. 그리고 하야테의 시선이, 페이트의 옆에 서 있던 루시안에게로 향해지더니 누구냐고 묻는 듯한 시선이 되어선 루시안에게 집중되는 것이었다. “에, 안녕…?” “누구세요?” 인사를 했는데 받아주기는커녕, 누구냐 묻는 말에 조금은 무안해졌다. “아… 우리 아빠이셔….” “페이트의 아빠…? 아아! 나노하가 말했던 그분이구나! 페이트를 입양하셨다던!” 휠체어를 타고 있길래 어둡거나 소심한 성격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밝은 면을 보이는 이 아이의 모습에 루시안은 전혀 의외라고 생각한다. “루시안 K. 블레이즈야.” “야가미 하야테에요, 잘 부탁드립니다. 에… 저기, 뭐라 부르면 좋을까요?” 또다시 호칭 문제인가…. 확실히 호칭 문제는 루시안이 생각하기에도 난감한 점이 많았다. 오빠라고 불리기엔 친구의 아버지인 사람이고, 아저씨라고 불리기엔 너무나 젊은 감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가장 무난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나노하나 스즈카가 부르는 말인 『루시안 씨』. 그래서 이 아이도 자신을 루시안 씨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 생각해서, 루시안은 『루시안 씨라고 불러줘』라는 말을 하려고 했었다. 그래, 말 했어야 했는데…. “에… 루시안 아저씨라고 부르면 될까요?” 안돼─. 마음속으로 외칠 뿐인 이 말을 차마 말하지 못했다. 유리가 갈라지듯이, 마음에 금이 가는 것만 같았다. 아니, 애초에 금이 간지는 꽤 오래 되었었지만…. 자신의 입으로 상대방에게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아달라고 했다간, 아줌마라고 부르지 말라며 절규하던 샤멀과 같이 꼴사나운 모습이 되어버릴 것만 같아서…. ‘그래, 포기하자. 포기하면 편해….’ 급기야 이 아이까지 자신을 아저씨라 불러버리려 하는 것에 루시안은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아저씨라 불리게 된 자신의 운명을…. “…너 좋을 대로 하렴….” “예, 루시안 아저씨.” 그리고 그가 하는 말에, 하야테는 웃으면서 비수 아닌 비수를 루시안에게 집어던졌다. “준비 다 해 놨어요, 맛있게 드시고 가세요.” 부엌 쪽으로 들어오라는 듯이 제스처를 취하는 하야테에 그들은 부엌으로 접해 들어갔다. “…우와.” 부엌에 접어들자마자, 금세라도 다리가 부러져 무너져 내릴 듯한 식탁의 모습에 ‘스무 살의 아저씨’는 탄성을 내뱉고야 말았다. 원래 이 세계의 출신이 아니기에 루시안으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요리가 수두룩했다. “이걸 너 혼자 다 만들었어?” “아, 제가 도왔어요.” 하야테에게 이 음식들을 혼자 다 만들었냐고 루시안이 묻는 말에 답하는 것은 엉뚱하게도 샤멀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 시그넘과 비타의 표정이 참혹하게 질리는 것이었고…. “페이트를 초대하려고 특별히 무리 좀 해 봤어요, 그런데 루시안 아저씨도 오실 줄 알았으면 좀 더 신경 써봤을 텐데.” 고마워해야 하나 슬퍼해야하나, 루시안은 갈등했지만 일단은 반반으로 비중을 나누기로 하면서 하야테가 앉으라고 자리를 권하는 것에 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일동이 모두 자리에 앉자. 잘 먹겠습니다, 라고 크게 외치는 것에 조금은 놀랐으면서도 아직은 익숙지 않은 젓가락질을 놀리기 시작했다. ‘…뭐부터 먹어볼까.’ 온통 처음 보거나 TV같은 곳에서만 봤던 음식들뿐이라, 루시안은 뭘 먹을지 고민한다. 페이트를 포함한 다른 이들이 음식을 먹고 있음에도, 루시안은 무엇을 먹으면 좋을까 하는 고민 때문에 젓가락만 들고 우물쭈물하는 것이었고…. ‘…이걸 한번….’ 그때, 유일하게 다른 이들의 젓가락이 향하지 않은 달걀부침이 있어서 그것을 제 1 목표로 삼고 루시안은 달걀부침을 입 안에 넣었… ………………. ……………. …………. ………. “루시안?” “어, 어헉?!” 신세계를 보았다. 여러 가지 의미로 무척이나 좋지 않은 신세계를. 하마터면 그 세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뻔 했었으나 루시안이 달걀부침을 먹은 것을 본 비타가 몸을 흔드는 것에 가까스로 루시안은 헤어 나올 수 있었고…. ‘달걀부침을 썩은 달걀로 만들었나, 어떻게 이런 맛이 나올 수 있는 거지…?!’ 돌려서 말하자면 신세계의 맛,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끔찍한 맛이었다. 달걀 본연의 맛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음식을 먹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그리고 요리를 자주 하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도무지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루시안은 애써서 표정관리를 했다, 당장이라도 오만가지 인상을 써버릴 것 같아서…. “…괜찮아?” “…어떨 것 같아?” “…알만 해.” 다른 사람에게 들릴 락 말락 한 비타와 루시안의 귓속말. “저, 루시안 씨?” 그때, 저쪽에서 샤멀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루시안은 젓가락을 든 채로 손을 부들부들 떨며 말을 걸어온 이를 응시한다. “그거, 맛 어떠세요?” 이 물음에 『내 생애 이렇게 끔찍한 맛은 처음이야』, 라고 말을 할 뻔 했다. 하지만 애써서 웃음을 머금곤, 예의상 “…괘, 괜찮네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고…. “그거 제가 만든 거에요!” 뭣이?!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음식물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 나타났다! 루시안은 기겁했다! ‘사람을 죽일 셈이냐?! 내가 12살 때 처음으로 만든 파스타가 훨씬 더 맛있을 거다!’ 실제로 그러했다. 12살 때 처음으로 요리를 해봤고 그때 만든 것이 파스타였다. 그리고 그 맛은 끔찍했다, 만든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하지만 그 때의 그것이 그리워지는 이유는 아까 먹은 음식물(로 추정되는 독극물) 때문일까? 루시안은 오염된(?) 미각을 정화해야한다, 라는 생각에 일단 눈에 보이는 것 중 무난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는데─ …언젠가 느껴 본 적이 있는 감각이었다. 그래, 분명 이 느낌은 그때의… ‘8살 때… 처음으로 살상 설정의 집속포를 맞아봤을 때의 느낌이다….’ 집무관으로 일을 할 때, 범법 마도사들과의 싸움이 벌어졌었고 당시에 미숙했던 지라 처음으로 살상 설정의 집속포를 맞았던 적이 있었다. 비록 급소를 맞은 것이 아니어서 생명에 지장은 없었지만… 온몸이 타들어가는 듯한 그때의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맛이었다. “아아~ 그것도 제가 만든 거에요~” 그리고 샤멀이 또 말하는 것에 루시안은 젓가락을 놓아버렸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샤멀이 식사를 만드는 것을 도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둘의 안색이 창백해지던 것이 괜한 것은 아니었다고 그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러시안 룰렛….’ 이어서 떠오르는 것은 얼마 전, 영화에서 봤던 러시안 룰렛이라는 게임. 하나의 회전식 연발 권총에 한 발의 탄환을 넣은 뒤, 탄창을 돌린 후 참가자 둘이 각자의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죽음의 게임…. 지금의 상황을 러시안 룰렛으로 따지면, 루시안은 연달아서 두 번이나 머리에 총알을 맞은 셈이니 재수가 없어도 단단히 없는 것이겠지만. “…하, 하, 하… 그만 먹어야겠어. 낮에 먹은 것이 아직도 소화가 덜된 것 같네….” 그냥 처음부터 시그넘이나 비타들이 젓가락을 뻗는 걸 따라할 것 그랬다. 괜스레 엉뚱한 길로 새는 바람에 피를 본 루시안은 식욕을 모두 잃어버린 채 젓가락을 놓아버렸고…. “에에?! 아저씨, 그러지 말고 더 드세요!” ‘뭘? 독극물을? 날 죽일 셈이니?’ 그만 먹어야겠다는 자신의 말에 기겁하면서 하야테가 말하자 루시안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쏘아붙였다. 엉뚱한 화풀이 같았지만….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또 재수 없이 샤멀이 만든 것을 먹었다간, 참지 못하게 되어서 식탁을 엎어버릴 것만 같아서…. “…물이라도 한잔 하시죠, 블레이즈 씨.” “고마워….” 그런 루시안의 기색을 보며, 무슨 일을 당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음일까. 시그넘이 진심으로 동정한다는 듯이 컵에 물을 따라서 건네주는 것이었고 루시안은 그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나…. ‘…아주머니, 아연의 섭취를 늘리셔야겠어요.’ 체내에 아연이 부족하면 미각에 이상이 온다. 그것을 염두에 두면서 마음속으로, 언젠가는 샤멀에게 커다란 아연 한 덩어리를 선물해줘야겠다고 생각하는 루시안이었다. “루시안 아저씨는 어디서 오셨어요?” …이상하게도, 아저씨라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것에 단련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루시안은 왠지 모르게 슬펐다. “어릴 때부터 미드 칠더에서 살았었어. 그러다가 은퇴하고 여기로 온 거고.” “은퇴요?” “응, 3개월 전 쯤에 그만 뒀어. 그때까지는 집무관이었거든.” “…호오, 그럼 시공관리국에 대해서 잘 아시겠네요?” 의외의 것을 물어오는 것에 루시안은 속으로, 『너무 많이 알아서 탈이지』라고 중얼거리며 시원찮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럼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어머니 한 분.” “어머니 한 분이요?” 되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라거나… 형제분은…?” “뭐, 그런 거 없어. 나도 어렸을 때 입양된 쪽이라서 말이야.” 루시안의 그 말에 화기애애하던 식사판의 분위기가 갑자기 침체되었다. 화기애애하게 얘기를 하면서 진행되던 분위기가 갑자기 가라앉자 당황하게 된 쪽은 루시안. ‘내가 말을 잘 못한 건가?’ “죄, 죄송합니다. 괜한 것을 물어봐서…” 그리곤 갑자기 하야테가 미안하다고 하는 말에, 루시안은 무엇을 두고 미안하다고 하는 건지 대강은 알아차릴 수가 있어서 상관 안한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괜찮아, 어차피 그런 거 가지고 별로 신경도 안 쓰는 편이거든.” 만약 루시안 본인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에 신경 쓰거나 했다면 가족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은 시점에서 머뭇거리거나 답변을 회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거리낌 없이 말했다는 것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의미였으니까. “좋은 분이시니까, 어머니는. 난 별로 입양됐다거나 하는 거에 신경 안 쓰니까 그렇게 미안해 할 건 없어.” 그것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아, 근데 페이트는 어떻게 할 거야? 나노하랑 같이 육사학교에 들어갈 거야?” “…응?” “그러니까, 나도 다리가 괜찮아지고 나면 시공관리국 쪽에서 일할 생각인데. 나노하한테서 페이트랑 같이 육사학교에 들어가게 될 거라는 말을 들었거든.” 그 질문을 받은 페이트는 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아직 확정된 것이 아니었기에 나노하에게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항공 무장대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어디까지나 아직 루시안이 확답을 내려주지 않았으니까. “아직 모르겠어….” “? 모른다니?” “그게… 항공 무장대에 들어가게 될 수도 있고….” 정확히 항공 무장대가 어느 정도의 위치인지는 모르는 듯한 이들이었기 때문에 별 다른 반응은 없었다. 만약 알았더라면 깜짝 놀랐겠지만…. “그래도 아빠가 허락만 해주시면 항공 무장대에 들어갈 생각이야.” “헤에… 그렇구나. 나노하는 아직 모르는 것 같던데….” “아직 확정된 게 아니니까…. 그래서 일부러 말 안했어.” 그래서 나노하에게는 아직 말을 하지 않았던 페이트였다. 말을 했었다가 나노하 쪽에서 가지 말라는 얘기를 하게 된다면, 자신의 결심이 흔들려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고…. 그만큼 페이트는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비록 가장 친한 친구와 떨어지게 되더라도 말이다. * * * * * * 《20:00. 관리 외 제 97번 세계, 우미나리 시》 초대받은 식사(물론 루시안에겐 해당치 않는 얘기였지만)를 마치고나서, 하야테들에게 잘 있으라는 말을 하고 난 뒤 루시안과 페이트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장보기용 자전거를 타고서. 아직은 한기가 서려있는 밤바람이 얼굴을 때려오는 것을 루시안은 페달을 밟으며 느꼈다. “저… 아빠?” “왜?” 그리고 뒤쪽의, 안장 쪽에 앉은 페이트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에 왜그러느냐고 묻는 루시안. “아빠도… 입양되셨었어요?” 몰랐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며칠 전 루시안의 방에서 그가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와 찍은 사진에 대해서 물었을 때엔 그냥 어머니라고만 했지. 입양해주었던 분이라고는 말을 하지 않았었으니까. 식사 도중에, 루시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 역시 입양되었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페이트는 상당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섯 살 때 입양됐었어, 어머니한테. 놀랐어?” “…예.”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페이트에 루시안은 웃음을 흘렸다. 시간이 흐르면 정작 당사자들은 입양되었다는 사실엔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다른 사람들이 오히려 그것을 미안하게 여기곤 한다. 그것은 직접 겪어 봤기에 루시안이 잘 아는 사실이었고, 또한 이미 익숙해진 사실이기도 했다. “…힘들진 않으셨어요?” “글쎄….” 힘들었냐고 묻는 말에, 입양되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힘들었었던가 생각해본다. “넌, 힘들어?” “…예?” “나랑 지내는 게 힘드니?” “아, 아뇨…! 아니에요…!” 그 물음에 당황했던지, 말을 더듬거리면서 황급히 답변하는 페이트였고 아이의 그 반응에 루시안은 웃음을 흘리며 답해주었다. “…그래, 나도 마찬가지였어. 오히려 편했다고나 할까….”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입양하겠다고 나서는 것에,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게 됬으니까. 아니, 따지고 보면 자신이 힘들었다기 보다는 어머니 쪽이 힘들었으리라.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가 아이를 입양해서 키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테고 하고 있는 일에도 큰 지장이 올 테니까. 그럼에도 어머니는 자신을 잘 챙겨주었다고 루시안은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그는 그의 어머니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가 남자애를 입양해서 키운다…, 힘들었던 쪽은 어머니 쪽이었을 거야.” “….” “하고 계시는 일도 있었는데, 이제 막 크고 있는 어린 남자 애를 키운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겠지. 일 하랴, 애를 키우랴…. 그래도 어머닌 힘든 기색 하나 보이시지 않고 날 보살펴주셨어.” 루시안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처음으로 그녀를 어머니라고 불렀을 때, 그녀가 머금던 웃음을. 그리고 자신이 집무관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을 때, 그녀가 지어보이던 미소를. 그리고 자신이 은퇴를 하게 되었을 때에, 그녀가 지어보이던 미소를. “…아빠도, 마찬가지시잖아요….” “응? 뭐가?” 되묻는 말에 대한 페이트의 답변은 없었다. 그러면서 루시안은 한참동안이나 생각했다. 이 아이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했었을까, 하고. 자전거의 페달을 밟아대면서 말이다. ………. ……. …. ‘그런 거였나…?’ 자신더러 마찬가지라고 말한 것. 페이트의 이 말 뜻을 루시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괜찮아, 난 어차피 은퇴한 몸이라서 널 보살펴주는 거랑 일이 겹치지는 않으니까. 결혼이야…, …뭐, 아직은 그런 걸 하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 이렇게 말하면서 농담조로 덧붙이길, 결혼을 할 만한 상대도 없어서… 라는 말이었다. “아직은 너한테 신경을 써주고 싶으니까, 네가 너 혼자서 앞가림을 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된다면 슬슬 나한테도 신경을 쓸 수 있을 것 같아.” “….” 아직은 이 아이에게는 힘들지도 모른다, 타인이 물었을 때에 자신은 입양이 된 아이라고 말하는 것이. 하지만 루시안은 다짐했다. 지금의 자신이 별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아이도 언젠간 스스로가 타인에게 입양된 아이라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게 해 주어야겠다고. 그 만큼 잘해주어야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시금 물었다. “…항공 무장대에, 들어가고 싶어?” “…예.” 여전히 똑같은, 아이답지 않은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답변. “여러 번 말하는 거지만, 힘들 텐데?” “…그래도… 하고 싶어요.” 더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토대가 되어 집무관이라는 것에 좀 더 가까워 질 수 만 있다면 하고 싶다고 페이트는 생각해서 하는 말이었다. “로얄 로드(Royal Road)야, 항공 무장대에 들어가는 건.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순탄치도 않을 것이고, 위험하기만 할 길이야. 내가 겪어봐서 누구보다도 잘 알아.” “….”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그런데도 하고 싶어?”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이 대목이 페이트는 너무나도 의미심장하게 들려왔다. “예.” 그리고 페이트는 이렇게 답했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아이의 그 대답에 루시안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아이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진심으로 하고 싶어 하는 일이면 도와줘야만 한다. 자신에겐 그것에 반대하고 나설 수 있는 권리는 없다. 그 일이 이 아이가 악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일이 아닌 이상…. 오르막길이 시작됨일까? 페달을 밟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경사가 심해지는 것을 느끼며 루시안은 뒤의 페이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꽉 잡아,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예…. 아빠.” 그리고 페이트는 루시안이 말하는 것에 그의 몸을 세게 붙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꽉 잡으라고 말했음에도, 그냥 옷자락을 조금 붙잡을 뿐이었는데. 페이트 쪽에서 먼저, 아빠라고 불러도 되냐고 물어봤을 때. 자신도 그 옛날의 어머니와 같은 미소를 머금었었을까? 루시안은 문득 이런 의문을 품어보았다. 아마도 그랬으리라, 그때의 감정은 분명히 기쁨이었던 것 같았으니까. 가족으로 인정해줬다, 그리고 아버지라고 불러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루시안은 이 아이가 먼저 자신 쪽으로 가까이 다가와 준 것 같아서 기뻤다. 그리고 지금처럼, 이렇게 의지하는 듯이 몸을 붙드는 것에 생각하는 것이었다. 자신과 같은 길을 걸으려 하는 이 아이, 자신의 딸, 페이트의 앞길이 자신과는 다르기를…. 왕도(Royal Road)라고 봐도 좋을 길을 걸었으나, 그 누구보다도 고난의 길을 걸었으며 고통의 길을 걸었던 초대 마도 통괄관이 아니라. 왕도(Royal Road)라는 의미 그대로, 순탄하고 편안하며 안정적인 길을 걸은 두번째 마도 통괄관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밤이 깊은 우미나리 시. 그곳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오르막길을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는 젊은 아버지와 자전거의 뒷좌석에서, 아버지의 몸을 꼭 붙들고 있는 딸이 있었다. #8 Team-Blaze 《신력 66년 3월 17일. 11:00. 미드칠더 크라나간 시공관리국 항공무장대.》 처음으로 와본 장소, 항공무장대의 건물인 이곳의 분위기는 냉엄했다. 분위기 탓일까? 건물 내에 냉방을 틀어놓은 것도 아니건만, 왠지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이곳의 분위기에 한기를 느끼며 페이트는 그곳의 복도를 걸었다. “추워?” “아, 아뇨….” 그 낌새를 눈치 챘던지, 앞에서 자신을 인도하며 걸어가고 있던 제복을 입은 여성이 묻는 말이었고 페이트는 흠칫 놀라며 그것을 부정했다. “괜찮아, 나도 춥거든 좀. 원래 이 근방만 오면 공기가 추워지더라니까.” 웃으면서, 자신도 추우니까 괜찮다 말하는 이 여성은 루시안으로부터 자신을 인계받았던 이였다. 바로 이틀 전, 하야테의 집에서 돌아오는 와중에 루시안이 물었던 말.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이 말을 하고서 항공무장대에 들어가고 싶냐는 말을 물었었다. 그리고 페이트는 들어가고 싶다 답했었고…. 그리고 그날로부터 이틀이 지난 지금, 페이트는 항공무장대에 있었다. 개인 사정이라는 이유로 학교를 빼먹은 뒤, 미드 칠더의 크라나간에 루시안과 함께 왔었다. 그리고 바로 이, 항공무장대의 건물 앞까지 루시안과 같이 왔었던 페이트. 하지만 루시안은 정문까지만 자신을 바래다 준 뒤, 이 여성에게 자신을 인도시켰다. 아델리에라는 이름의 여성에게. “저… 아델리에 씨…?” “응, 왜?” “아빠… 랑은, 아는 사이이신가요?” 궁금했던 것이었다. 루시안과 함께 정문에서 그녀를 기다렸었다. 그런데 루시안이 그녀가 나오자마자 취했던 행동은 친한 친구를 대하는 것과도 같았기 때문에. 아는 사이냐는 페이트의 말에, 아델리에는 맥 빠진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응, 친구. 어렸을 때부터 같이 지냈었어.” “…친구, 시군요….” “루시안이 집무관으로 일할 때엔 집무관 보좌로 같이 일했었고 말이야. 뭐, 지금은 할아버지의 보좌를 하고 있지만….” 루시안의 집무관 시절이라는 말에 페이트의 눈에 갑작스레 호기심이 돌았다. “저, 집무관 시절의 아빠는… 어떤 분이셨나요…?” 그리고 루시안의 집무관 보좌였다는 아델리에에게 페이트가 묻는 말이었다. 집무관 시절의 루시안. 딸임에도 그것에 대해서 페이트는 알 수 없었다. 본인이 말하는 것을 꺼려해서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자신 역시 지망하고 있는 위치인 집무관, 그리고 그 집무관 중에서 정점에 올랐다는 마도통괄관 루시안 K. 블레이즈에 대해서. “…최고였어.” 그리고 그 질문을 받은 아델리에가 한참동안 생각하더니, 내뱉는 말이라는 게 겨우 이것. “최고…, 이 말 밖에는 뭐라 해줄 말이 없는걸.” “….” 페이트로서는 너무나 막연한 표현이었다.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알고 싶었는데, 집무관 시절의 루시안에 대해 가장 잘 알만한 집무관 보좌였다는 그녀가 그저 ‘최고였다’라고 말을 마쳐버리는 것에 페이트는 아쉬움마저도 느낀다. 하지만 아델리에 역시, 뭐라 말해줄 것이 없었다. 최고였다, 이 말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루시안 블레이즈를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이었으니까. “항공무장대에, 스스로 자원했다며?” “…예.” “…신중히 생각해 봤어?” “…예.” “신중히 생각해봤으면 그렇게 간단한 답변은 나오지 않을 텐데.” 약간의 거리를 벌린 채, 복도를 걸어가는 페이트와 아델리에의 대화였다. “이 일은 무척 힘들어.” “…아빠께서 말해 주셨어요.” 그녀의 말은 페이트 본인에게 루시안이 아주 많이, 자주 했던 말이다. 그리고 페이트가 이 말을 하는 것에 아델리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루시안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음에도 이 선택을 내렸다면 아무리 해도 마음을 돌릴 수는 없다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인 라르고 킬의 집무실 앞에 도착하게 되자 멈춰서는 아델리에. “데려왔어요, 할아버지.” 【…들어오게, 킬 보좌.】 할아버지? 이 말에 페이트는 조금은 의아했다. 이 집무실은 항공무장대의 수뇌인 라르고 킬의 집무실일 터인데, 그녀가 라르고 킬의 손녀라는 말인가? 페이트가 이런 생각을 하든 말든, 안쪽에서 집무실의 주인으로부터 들어오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아델리에는 문을 연 뒤 페이트더러 들어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집무실 안에 들어가자마자, 페이트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그에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상대방으로부터 답변은 없었다. “앉아라.” 그저, 라르고 킬은 그 인사에 답하지도 않고 집무실 내부의 의자에 앉으라고 했고 페이트는 그의 ‘지시’에 따라 의자에 앉았다. “결심을 했나보군.” “…예.” “루시안이 네게 말해줬겠지만, 항공무장대의 일은 녹록치 않다. …루시안처럼 도중에 그만두겠다고 말할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돌아가도록.” 『루시안처럼』 라르고 킬의 이 말에 서서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아델리에의 미간이 구겨진다. 이 아이, 페이트는 루시안을 좋아하고 있다. 좋아하고 있으니까 아빠라고 부르면서 따르고 있다. 그건 이 아이와 잠깐 나눈 대화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아이에게 루시안이 마치, 겁쟁이처럼 도망을 쳤다는 듯이 말하는 것은 도발이었다. 자신의 할아버지이지만, 이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같은 모습을 볼 때마다 아델리에는 소름이 돋곤 했으니까. “할아버지!” “…집무 중엔 그렇게 부르지 말라 했었을 텐데, 킬 보좌.” “말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 마치, 루시안이 항공무장대 일에 겁먹어서 도망을 쳤다는 것처럼 말하시잖아요!” “엄밀히 따지면 도망친 것이나 마찬가지지.” 이렇게 말하는 라르고 킬에 아델리에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달랐다, 할아버지이지만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도 달랐다. 루시안은 겁을 먹어서 도망친 것이 아니다. 그는 충분히 열심히 해 주었다고 아델리에는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건 함께 일했던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데… 부러 아이를 자극하기 위해 그를 폄하하는 라르고 킬의 말이 거슬렸던 것이다. “하겠어요.” 그때 들려오는 답변.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그 답변에. 어린 마음에 괜한 도발에 넘어가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아델리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다. 그럼, 페이트 테스타로사 블레이즈. 자네는 오늘부터 항공무장대 소속의 마도사로서 일하게 될 것이다.” “….” “오늘은 첫날이니 일에 투입하지는 않겠다. 다만, 앞으로 자네가 함께 일할 동료들을 만나보는 것이 좋겠지. 킬 보좌.” “…예, 할아버지.” “블레이즈 국원을 제 7 사무실로 데려가주게.” 제 7 사무실. 이 말에 아델리에의 표정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제 7 사무실은 루시안 블레이즈가 사용하던 곳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곳에 데려가라는 말은 즉─ “이 아이를 Team-B에 편성하시려는 건가요?” “빈 자리를 채워야지.” “하지만 이 애는…” “…대장으로 세우려는 것은 아니다.” 루시안의 빈 자리인 대장의 자리를, 아직은 미숙한 이 아이에게 맡게 하려는 생각인 줄 알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루시안이 맡았던 Team-B의 대장 역할을 이 아이에게 맡기지 않는 것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의 이런 의도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루시안이 맡았던 팀, 그리고 그 루시안이 빠져나간 자리가 있는 팀이다. 그 팀의 빈자리를 루시안의 양녀로 하여금 채운다는 게 꺼림칙했다. 루시안 블레이즈와 페이트 테스타로사 블레이즈. 이 둘을 비교하려는 의도와도 같이 느껴졌으니까. 실제로도 그러했고…. 하지만 나름 생각해보면 그 판단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 아델리에는 생각한다. Team-B의 구성원은 능력이 우수하고 성격에 모난 데가 없다. 게다가 모두가 루시안과 친분이 있었기에, 페이트에게 잘 대해주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잘 가르쳐 줄 것이니…. “너의 양부, 초대 마도 통괄관의 이름에 흠이 가지 않도록 행동해라.” 그리고 라르고 킬이 덧붙이듯이, 루시안의 이름에 흠가지 않도록 하라 툭 내뱉는 말에 페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페이트.” “…예.” 그리고 아델리에는 따라오라고 하면서, 페이트를 데리고 라르고 킬의 집무실에서 나온다. “하아…, 할아버지가 원래 저런 사람이니까. 신경 쓰지 마. 일할 때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거든.” “아, 아뇨….” 그녀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라르고 킬에 대해서 험담을 늘어놓듯이 하는 말. 압도되었다고나 할까, 페이트는 라르고 킬과의 이번 만남에서 이런 느낌을 받았다. “제 7 사무실까지 데려다 줄게, 일단은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될 동료들에게 인사를 해야겠지.” “예, 부탁드립니다. 킬 보좌관.” 부탁한다면서, 애가 느닷없이 딱딱하게끔 킬 보좌라고 부르는 것에 아델리에는 당황했다. “하, 하하… 그렇게 부를 필요 없어. 할아버지나 그렇게 부르는 거니까, 그냥 아델리에라고 불러.” “예? 하지만…” “괜찮다니까, 항공무장대에선 다들 국원들을 부를 때 직급 같은 건 거의 따지지 않는 게 전통이니까. 루시안도 그걸 별로 신경 안 썼어. 다들 그런 건 할아버지 앞에서나 따지지.” 평소의 분위기만큼은 자유분방한 곳이 항공무장대였다. 일을 하고 있는 와중이나, 명예원수인 라르고 킬의 앞에서나 직급을 따졌지 평소 사무실에서 일하거나 쉬거나 할 때엔 평범하게 대하는 것이 항공무장대의 전통 비슷한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아델리에가 웃으면서, 그냥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말에 페이트는 조금은 머뭇거리면서도 그것에 수긍했다. 그러면서 복도를 걸어가던 도중, 한숨을 쉬며 아델리에게 입을 열었다. “루시안에 대해 할아버지가 말했던 것은 신경 쓰지 마. 괜히 널 자극하려고 하셨던 말이니까. 그냥 헛소리야.” “…예.” 아예 신경이 쓰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친아버지가 아닌 양아버지라 하더라도, 자신의 부친을 험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 누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으랴. 하지만 아델리에가 말하길, 라르고 킬이 그렇게 말했던 건 그냥 자신을 자극하려 했던 말이었다고 하는 것에 페이트는 잊어버리기로 했다. “할아버지는 루시안에게 엄청 기대했었어. 그래서 루시안이 그만 두겠다고 사직서를 아무리 냈어도 받아주지 않으셨었지.” “….” 계속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면서 아델리에는 옛날이야기를 털어놓듯이, 두런두런 얘기를 한다. “결국엔 사직서를 수리해주셨지만…. 어쨌든, 표현은 안하시지만 너한테도 꽤 기대하시고 계실거야.” “…기대, 요…?” “응. 원래 감정 표현이나 속내 같은 것은 잘 표현 안 하시거든. 할아버지는.” 기대를 품는다는 말에 페이트의 표정이 조금은 무거워졌다. 괜한 말을 해서 부담을 줘버린 걸까? 아델리에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웃으면서 아이에게 말한다. “그렇다고 너무 부담스러워하지는 마, 능력에 맞지 않는 일은 주시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팀원들도 좋은 사람들이니까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어보거나 해.” 웃으면서 부담 갖지 말라고 하는 아델리에의 모습을 바라보는 페이트. 할아버지와 손녀가 이렇게 다를 수가 있으랴. 냉정했던 라르고 킬과 감정의 표현이 뚜렷한 아델리에의 대조되는 모습을 보며 페이트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12:00. 미드칠더 크라나간 시공관리국 항공무장대 제 7 사무실》 “그러니까, 그 집무관 녀석은 꼴통이라니까요!” 분에 겨운 듯한 외침과 함께, 책상을 손으로 내리치는 소리가 사무실 내에 울려 퍼졌고 그 소리에 사무실 안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세상에, 보급 물품이 떨어졌다고 보고하니까 뭐라 하는 줄 알아? 『그럼 구해와』라고 하더라고! 미친 거 아니에요?! 미개척지에서 어떻게 보급 물품을 구해와!?” “유이리, 우리한테 그래봤자 달라질 건 없어. 가서 직접, 그 집무관한테 말해….” “존 오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사무실 내에 있는 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존에게 유이리가 억울하다는 듯이 버럭 외치는 말이었고 그것에 다른 이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구야… 큰형님께서 고생 좀 하시네요. 괜한 노처녀의 투정 때문에…” “닥쳐!” 그리고 이죽거리던 한 국원이 얻어맞고 쓰러졌다. “니, 닉슨?!” 날아가 바닥에 쓰러지는 그 광경에, 괜한 말을 했다가 피를 본 닉슨의 이름을 부르짖는 존. “으아아… 정말, 요즘엔 일하기가 왜 이리 힘든지! 대장님이 그리워진다고요!” “…대장님 얘기는 그만 해. 나쁜 의미로 말하자면, 너희들한테는 봉이었잖아. 대장님은 지금쯤, 늘 바라시던 대로 연금이나 받으면서 텃밭을 가꾸며 잘 먹고 잘 사시고 계실 테니까.” 지금은 이미 은퇴해버린 옛 대장이 그립다 외치는 유이리에, 존은 안경을 닦으면서 옛 대장인 그가 늘 했던 말을 인용하며 충고하듯이 내뱉었다. 그러고 보면 자주 그가 그리웠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대장이. 존은 이 팀의 초창기 멤버였으니까, 팀이 만들어질 당시부터 팀을 이끈 옛 대장이 어렸을 때부터 함께 일을 해왔었다. 그리고 그를 동생이나 조카처럼 느낄 때가 많았으니까. “따지고 보면, 블레이즈 대장이 제일 그리운 건 나야.” “맞아, 존 형님은 블레이즈 대장하고 가장 오랫동안 일했었으니까. 그 다음이 나고. “시끄러, 제피! 어쨌든 지금 이 순간, 블레이즈 대장님이 그리운 건 나야! 지금 내 쪽 집무관은 완전 사이코란 말이야!” “어이, 내 쪽도 별 다를 건 없다고. 꼴에 집무관이라고, 거만하기 짝이 없고 온갖 트집을 다잡는단 말이야. 그래도 별 수 없잖아, 억울하면 집무관이 되든가.” “자자, 다들 그만 좀 해. 안 그래도 지금 인원도 없는 사무실인데, 그런 짜증나는 얘기만 해서야 쓰겠어? 그냥, 일이나 하라고.” “일이고 뭐고, 나도 확 그만 둬버릴까 보다!” “…넌 지금 은퇴해도 연금 없어.” 제 7 사무실에 있는 인원은 네 명, 나이가 가장 많은 ‘큰형님’ 존을 포함하여 유이리, 제피, 닉슨이었다. 원래는 아홉 명이 있어야지만 한 명은 몇 개월 전 신이 나서 은퇴를 해버렸었고, 또 다른 한명은 소속이 옮겨져서 라르고 킬 제독의 집무실로 옮긴 뒤였고. 또 다른 둘은 다른 세계로 출장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넷뿐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다녀올게요, 존 형.” “아아, 제피. 너도 출장 간다고 했었지?” “예, 장기출장이라, 몇 개월 동안은 못 보겠네요.” “조심해서 다녀 와.” “걱정 마요, 그냥 가서 잡일하는 거니까. 당분간은 셋이서 잘 지내요.” 그리고 곧, 셋이 될 예정이었다. 자신의 책상에서 장기 출장동안 필요한 물건 따위를 챙겨서 넣은 트렁크 가방을 들고 일어서는 제피를 보며 존은 또 썰렁해지겠군, 이라 생각하며 한숨쉬는 것이었다. “참 썰렁한 사무실이야… 고작 네 명 밖에 없다니….” 다들 장기 출장인 지라, 한참동안이나 썰렁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니 존은 한숨 밖에 나오지 않았고…. 그때, 문이 열리면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넷의 시선이 향해졌다. “아델리에? 왠일이야, 여긴?” “아아, 오랜만이네요. 존 오빠.”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소속이 옮겨져서, 일하는 곳도 바뀌는 바람에 모습을 보기 힘들었던 이가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해진다. “어라, 제피. 어디 가?” “장기 출장이야.” “고생 좀 하다 오겠네, 아! 잠깐만 기다려. 조금만 있어봐.” 트렁크 가방을 질질 끌고 나가려는 제피를 가로막은 뒤, 자리로 되돌아가게끔 등을 떠미는 아델리에에 제피는 뭔 짓거리냐 묻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여러분의 고매하신 대장님이자 저에겐 참으로 훌륭하신 집무관께서 사직서를 내고, 좋다구나 짐 챙겨들고 떠난 지가 어느덧 4개월이 되어가네요.” “너도 마찬가지잖아, 아델리에. 블레이즈 대장님이 떠나니까, 너도 좋다구나 제독님 집무실로 옮겨갔으면서.” “에이, 그건 어쩔 수 없잖아, 유이리. 할아버지가 끌고 간 건데, 집무관을 잃은 집무관 보좌에게 무슨 핑계거리가 있겠어?” 유이리의 볼멘 지적에 아델리에는 손을 흔들면서 능숙하게 받아쳤다. “게다가 팀의 반 이상이 장기 출장이니 이 사무실도 썰렁하네요.” “…무슨 용건이야, 같이 밥 먹으려고 온 거면 식당으로나 가. 나, 빨리 시공항행함선 타고 가야된다고.” “알았어, 알았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테니까, 일단은 앉아. 제피.” 시계를 보며 조금은 초조하다는 듯이 말하는 제피에 아델리에는 사설은 접기로 하고 그를 다시금 앉게 만든다. “오늘 부로 제 7 사무실, Team-Blaze에 새로운 보충인원이 들어왔답니다.” “뭐?!” “보충인원?!” “진짜?” “거짓말 아니지?!” 차례대로 유이리, 제피, 존, 닉슨의 깜짝 놀란 외침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사람이 앉아있는 자리보다 빈 자리가 더 많은 사무실이었으니까. 새로운 구성원이 들어왔다는 사실이 사람냄새가 그리운 그들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것이었다. “누군데, 누군데, 누군데!” “신참이 들어오다니, 뭐하는 녀석이야?” “집무관이야? 응?” “이름이 뭔데?!” 속사포같이 쏟아지는, 사람냄새 그리워하는 이들의 질문. 아델리에는 그들을 조용히 시키기 위해서 손뼉을 크게 몇 번 쳤고 그것이 효과가 있었던지 폭풍에 휩쓸린 듯한 그들이 조용해졌다. “자, 소개할게요. 페이트, 이리 와.” 이름이 페이트인가?! 아델리에가 이리오라 하면서 부른 이름에 그들이 동시에 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우물쭈물 거리면서 작은 체구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에 그들이 얼어붙었다. “아, 안녕하세요….” 여자아이였다. 금발의 소녀. 상당히 머뭇거리면서, 어색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는 소녀의 모습에 그들 모두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 어린애잖아?!” 그리고 유이리가 조금은 당황한 것처럼 아델리에에게 외치는 말. “며, 몇 살이야?!” “열 살 이랬던가, 맞지? 페이트.” “아… 예.” 열 살이라는 말에 다시금 멍해졌다. “너, 너무 어리잖아! 애한테 어떻게 항공무장대 일을 시키겠다고…” “제피, Team-Blaze에 열 살이라는 나이는 너무 어리다고 보기엔 뭐하지 않아? 그렇지 않나요, 존 오빠?” “…확실히, 대장님의 경우가 있었으니까…. 대장님의 경우엔 일곱 살 때 집무관이 되셨다고 하니….” 그렇지만, ‘너무’ 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리다’라고 생각하는 일동이었다. 자신들의 옛 대장의 경우는 조금 특이한 유형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아이는 게다가 여자아이 아닌가? “어쨌든, 이 아이 역시 마도사이니까. 잘 지내도록 하세요. 좋잖아요? 칙칙한 냄새만 나는 이 사무실에 예쁜 꽃송이가 들어온 거니까!”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자기소개, 할래? 페이트?” “아… 예….” 그리고 페이트는 앞으로 걸어나와서, 사무실 안에 있는 넷을 쭉 살펴본 뒤 머뭇거리면서 입을 떼었다. “페이트 테스타로사… …블레이즈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 소개가 끝마쳐졌을때,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페이트 본인과 아델리에를 제외한 모두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리고 같은 생각을 했다. 자신이 뭔가를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하고…. “잠깐… 블레이즈라고…?” 가장 연장자인 존이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물었고 그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페이트. “…역시, 대장은 결혼하려고 은퇴했었던 건가….” “아니, 잠깐만요. 존 오빠. …그렇게 따지고 보면, 대장님이 몇 살에 이 애를 낳았다는 거에요? 블레이즈 대장이 올해 스무 살 되고… 이 아이가 열 살이면….” ‘…이 사람들이 사람냄새 그리워하더니 맛이 갔나?’ 말도 안 되는 추측을 해대면서 엉뚱한 생각을 하는 그들의 모습에 아델리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여러분, 괜히 엉뚱한 오해하지 말고…. …루시안이 양녀를 입양했다는 얘기, 못 들었어요?” 못 들었다는 표정을 짓는 것에 아델리에는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가 이 작자들은, 전(前) 상관이 은퇴했다고 그에 대한 소식에 감감 무소식이라니…. 어쩌면 그것도 대장이었던 루시안의 성향이 옮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자, 어쨌든! 오늘부터 페이트가 합류했으니까 잘 지내도록 해요! 모르는 것도 가르쳐 주고, 아직 어리니까 친절히 대해요! 예쁘다고 괜히 엉뚱한 생각 품지 말고! 페이트 자리는… 저기, 저쪽의 빈자리.” 그리고 페이트에게 손가락으로, 한 쪽에 깔끔히 치워져있는 책상을 가리키면서 앉으라고 하는 아델리에의 말에 존은 숨을 삼켰다. 지금은 주인이 없는 자리였지만, 저 자리는 루시안이 사용했던 자리였다. 【이봐, 아델리에. 무슨 속셈이야 대체?】 그리고 존은 아델리에에게 염화를 보냈다. 【저 애가 진짜로, 블레이즈 대장의 양녀야? 괜히 쓸데없는 수작질이 아니라?】 【맞아요, 루시안이 입양한 애가. 페이트 테스타로사 블레이즈.】 【그런데 왜 저 애가 우리 팀에 온 거야? 아직 어린 앤데, 항공무장대라니….】 【할아버지가 제안했고 페이트가 받아들인 거에요. 어쩔 수 없잖아요….】 라르고 킬이 항공무장대에 들어오지 않겠냐 제안을 했었다고 하는 말에 존은 조금은 놀랐다. 항공무장대의 톱이 제안을 했다고 한다면 그건 보통 의미가 아니니까, 게다가 그게 신중하기로 소문난 시공관리국의 3제독 중 한명인 라르고 킬이라면…. 【루시안은 뭘 했데?! 입양했다지만 자기 아이가 항공무장대에 들어오겠다는 걸 말리지도 않고!】 【루시안도 될 수 있으면 설득해보려 했데요. 그런데도 애가 원했다니까….】 본인이 원했다, 이 말에 존은 어처구니가 없어지려고 했다. 【…어쨌든, 존 오빠랑 다른 팀원들이 애 좀 잘 돌봐줬으면 좋겠네요. 모르는 것도 많을 거고, 아직 어리니깐요. 존 오빠는 어렸을 때의 루시안과도 같이 일했었으니까….】 【루시안과 이 애는 달라.】 물론 자신이 관리국에서 루시안과 만났을 때, 루시안의 나이는 이 아이보다 한참 어렸다. 당시의 자신은 일곱 살짜리 애가 집무관이랍시고, 상관이라고 나타나선 팀의 대장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를 따르기가 힘들었었다. 그러나 어린 소년의 마도사로서의 재능과 리더십을 보게 되고, 그에게 여러 번 구해지고 나서부터는 생각이 달라졌다. 아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대장으로 따르게 되었었다. 그리고 동생처럼 여겼다. 하지만 지금의 이 아이가, 그때의 루시안과 겹쳐보이지는 않았다. 【마도사로서의 재능도 상당하다니까…, 부탁해요.】 정신 나간 짓이다, 시공 관리국 측의. 루시안의 경우 때와는 다른 감정이 끓어올랐다. “어쨌든 환영해, 제피라고 불러.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말해야겠지만. 난 장기 출장이 있어서, 몇 개월 뒤에나 보겠네.” 그러면서 제피는 페이트에게 나중에 보자고 인사를 하면서, 트렁크 가방을 들고 사무실에서 나갔다. “존이야. 그냥 존이라고 불러줘, 블레이즈 대장하고는 형 동생 하던 사이였으니까. 저쪽은 유이리, 그리고 저기 안경 쓴 녀석은 닉슨. 원래는 인원이 더 많지만 다들 장기 출장을 나가서….” 그리고 존은 일어나 페이트에게 사무실 내의 이들을 소개했다. “어쨌든, 앞으로 잘 지내보자. 모르는 게 있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해.” “예…, 잘 부탁드립니다.” 다른 모습이었다. 대장의 자리는 아니지만, 루시안의 빈자리를 채우게 된 루시안의 양녀. 그것을 보면서 존은 다르다고, 자신이 보았던 어린 시절의 소년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자세한 것은 앞으로 지켜봐야 알겠지만…. “자, 그럼 식사나 하러 가보자고요. 페이트는 오늘은 그냥 자리만 지켜도 되, 일은 내일부터 하게 될 거야.” “아, 예….” “그럼, 존 오빠가 한 턱 쏴요!” “켁! 가, 갑자기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거야?!” 부양가족이 있는 자신에게 느닷없이 점심을 사라는 아델리에의 말에 존은 깜짝 놀랐다. 이제 아이도 있는 몸이라, 먹여살려야하는 가족이 있는 몸인데…. “에이, 연장자잖아요?” “너, 킬 제독님 보좌로 일하니까 나보다 급료도 더 많이 받잖아. 직급만으로 보면 네가 나보다 훨씬 더 위고, 이런 건 원래 직급이 위인 쪽이…” “페이트, 이 아저씨는 공처가라서. 돈을 벌어도 아내한테 갖다 바칠 뿐인, 하루하루 돈버는 기계에 지나지 않아.” “…누가!” 공처가, 하루하루 돈버는 기계라는 유이리의 말에 억울하다는 듯이 존이 버럭 성을 내는 것이었고 유이리가 했던 말에 일동이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으니. ‘우리 팀은 여자가 너무 드세…!’ 팀이 만들어졌을 때부터 멤버였던 존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웠다, 여자 팀원들의 성화를 혼자 감수해 내주었던 루시안이. 그리고 대장인 루시안이 은퇴하게 되자 여자 팀원들에게 들볶이는 자신의 신세가 서글펐다. 팀의 구성원들 중 여자는 소수였지만 다수인 남자들이 맥을 못 추었다. 그것은 대장이었던 루시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자신이나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 뭔가 저주가 걸려있는 것은 아닐까, 터가 안 좋은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자극 당했던지라 존은 울며 겨자 먹기로 지갑을 열 수 밖에 었었고….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번에 새로 보충인원으로 들어온 이 아이. 페이트가 아델리에나 유이리처럼 드세 지지 않기를…. #9 인생의 절반은 불행으로 이루어져있다 《신력 66년 4월 12일. 01:00. 미드 칠더 크라나간 시가지.》 어둠이 드리운 도시의 야경을, 높은 마천루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얼굴에는 세월의 풍파가 느껴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선, 높은 위치 탓인지 차갑기 그지없는 밤바람을 맞고 있는 중년의 남자. 아름답다고, 혹은 화려하다고 느껴도 좋을 이 풍경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그는 그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답답함마저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이 도심의 한 복판에 세워져있는, 유난히 높은 구조물 탓일까. “…시공관리국….” 시공관리국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법답, 구조물. 그것을 바로 보면서 그는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었고…, 그것을 보며 드는 주된 감정은 『혐오』였다. 모순덩어리다. “참 웅장하고 멋지군요.”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돌려 그쪽을 응시했다. “보십시오, 하늘을 떠받치듯이 선 저 탑을.” 연극의 대사를 읊듯이 지껄이는 상대방은 시커먼 로브로 온 몸을 감싸곤, 얼굴마저도 우스꽝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가면으로 가리고 있는 이. 그런 수상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는 이가, 안테나 수신탑이 있는 근처에 서서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괴상한 분위기의 남자. 그리고 ‘그’의 등장에 중년 남자는 경계하는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안쪽으로부터 썩어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기세지요. 그렇죠? 지상본부 제 2 부사령관 알렉산더 베네토 소장.” “….” “아아, 경계하지 마시죠.” “느닷없이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선, 얼굴도 보이지 않는 자를 경계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있나?” 이런 시각에 만나자는, 누구에게서 보내진 건지도 모른 편지를 받았던 것은 바로 어제 그가 자신의 집무실에 도착하자 마자였다. 보통 같으면 그냥 누군가가 장난질을 한 것으로 치부해버리곤 그냥 편지를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편지를 열어서 읽어보았던 것은 운명의 농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읽게 되었고 이 시각에 이 곳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긴히 할 얘기가 있다는, 그 단순하기 짝이 없는 글귀에 이끌려서…. “어쨌든, 나와 주셨다는 것은 얘기를 해볼 마음이 있다는 거군요?” “….” “그럼 얘기해볼까요? 당신이 생각하는 시공관리국. 그리고 지상본부의 오점에 대해서….” 서로에 대한 소개도 없이, ‘그’는 만담을 하듯 흐느적거리는 몸짓으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시공관리국의 모순─ 균형이라는 것을 내세우고 있음에도 최고 평의회라는 집단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그들이 인도하는 대로 나아갈 뿐인 지상본부에 대한 오점을. 그의 입을 통해 까발려지는 수없이 많은 오점들과 더러운 면들을 직접적으로 듣게 되었을 때 알렉산더 베네토는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썩어빠진 집단을, 바꿀 수 있다고 보십니까? 어림도 없죠.” “….”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유일한 방법은 모든 기반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것 뿐.” 모든 기반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낸다. 이 말에 베네토는 몸을 움찔거리면서 전율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 “…쿠데타라도… 일으켜야 한다는 말인가…?” “That's Right. 이해가 빠르신 분이군요? 하지만 쿠데타가 아니라… 혁명이라고 하는 게 옳겠지만요.” 이해가 빠르다기보다는, 그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었지만. 혁명과 쿠데타는 비슷하다, 무력이나 그 외의 압력을 통해 현 체제를 전복시키는 것. 다만 차이가 있다면 성공과 실패의 차이점이겠지만…. 하지만 말도 안 되는 것이라 베네토는 생각하면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떻게 그 시공관리국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무력으로!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나 개인 따위는 그 누구도 없다는 것이 그 집단에 속한 그의 생각이었다. “…시공관리국을 무력으로 무너뜨린다는 것은 억지다, 말도 안 되는 얘기야!” 그래서 말도 안 되는 것을 자신에게 속삭인 ‘그’에게 화를 내듯이 외친다. 하지만 그 말에 그는 키득거리는 웃음을 흘리면서 반박한다. “당신이라면 할 수 있을 겁니다.” “…나보고… 쿠데타를 일으키라는 건가…?” “왜요? 꺼려집니까? 당신의 손으로 직접, 모순되고 더러운 체제를 뒤바꿀 수 있다는 게 기쁘지 않나요? 킥킥….” “….” “물론, 당신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겠지요. 그렇기에 제가 당신에게 편지를 보냈던 겁니다. 당신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네가 나에게 시공관리국의 부조리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주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웃기지도 않는 얘기…” 이 말을 내뱉으면서도 베네토 본인이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 있었으니. 그의 말 중, 『쿠데타』라는 표현이 『부조리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라는 것으로 뒤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눈치 채곤 낄낄거리는 듯이 몸을 들썩였다. “당신이 바란다면 얼마든지.” “….” “믿기 힘드시면 지금 당장 누구라도 죽여 드릴까요? 지상본부 사령관은 어떻습니까? 킥킥…” 지상본부의 사령관이자 자신의 오랜 친구이기도 한 게리 시벨리우스 소장을 죽인다는 말을 너무나도 쉽게 지껄이는 것에 그의 의중을 알기 힘들어진 것은 베네토였다. 단순한 암살로 시공관리국의 부조리를 바꾼다? 아니, 그것 때문이 아니라 지상본부의 사령관인 자를 죽여 보겠다는 말을 너무나도 쉽게 하는 것 때문이었다. “아, 물론 농담입니다.” “…질 나쁜 농담이군.”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어쩔 수 없죠. 못한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그렇게 기분 나빠 하시진 마십시오. 베네토 소장.” 어찌되었든, 상대방이 낄낄거리면서 흐느적거리는 모습을 보며 베네토는 생각했다. 『광인(狂人)』이라고, 미쳐있다고. 이 자는 미쳐있다, 단순히 이성을 잃고 미쳐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유지한 채로 미쳐있는 자』다. 이성을 유지한 채로 미쳐있는 자라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라면 어떤 짓이든지 행할 것이다. 그것이 설령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고 살육을 저지르는 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만 있다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치룰 자다. 흔히 말하자면 폭군, 혹은 혁명가의 기질을 타고난 남자. 폭군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수많은 이들을 희생시킨다. 혁명가는 자신의 이상, 혁명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위험 속으로 몰고 가는 성격을 띠고 있다. 그렇기에 폭군과 혁명가는 비슷한 성격을 지닌 인간들인 셈이다. 베네토는 눈앞의 이 남자가 그렇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부조리, 모순, 오점을. 시공관리국이라는 모순투성이 집단을 무너뜨릴 수 있다. “…자네를 어떻게 믿지?” “킥킥킥킥, 믿으니까 여기로 나오신 거 아닙니까?” 나름 재치 있는 대답. 그의 말대로, 자신이 단순한 편지에 휘말려서 이 곳에 나온 시점부터가 이 남자에게 페이스를 잡힌 거였으니까. 그리고 스스로도 이 남자의 말에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빠져나올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공관리국의 모순과 부조리 때문에 희생당하는 것을, 그 집단의 높은 위치에 오르면서 숱하게 봐왔었다. 그것을 꼭 바꾸고 싶다 생각하여 이 위치까지 왔다. 하지만 바꿀 수는 없었다. “한번 믿어보십시오, 절. 저나 당신뿐만이 아니라, 시공관리국이 사라지길 원하는 이는 많으니깐 요.” 하지만 이 기회를 잡는다면…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안쪽 깊은 곳으로부터 썩어있는 시공관리국 자체를 없애고, 새로운 체제를 확립함으로 부조리와 모순을 없앤다. 진정한 균형과 평화, 그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베네토는 매혹적인 제안을 해오며, 자신에게 속삭여오는 정체불명의 이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베네토가 자신의 손을 붙잡는 것에 유쾌하다는 듯이 키득거리는 ‘그’. “…어째서 나에게 이런 권유를 하는 거지? 자네가 날 도와서, 시공관리국을 무너뜨림으로… 자네가 얻는 것이 무엇이 있다고….” 딱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어 베네토는 그것을 물었다. 그는 어째서 자신에게 이러한 권유를 하였는가. 시공관리국이 무너지고 형평성에 맞는 새로운 체제가 확립됨으로 그가 얻는 이득은? 새로운 체제에서의 권력? 돈? 일반적으론 이런 것을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베네토가 판단한 이 남자의 성질을 봐선 그런 것은 아닌 듯 했다. “…자네가 원하는 건?” “당신과는 그다지 상관없는 일입니다. 걱정 마시지요.” “…내가 자네와 손을 잡게 된다면 한 배를 타는 셈인데. 자네가 바라는 것은 말해주지 않겠다는 건가?” 베네토의 연이은 이 질문에 상대방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안테나 수신탑 근처에 서있던 남자가 훌쩍 뛰어내려서, 다가오는 것에 베네토는 흠칫거린다. 흐느적거리는 걸음이 아니라, 확실한 걸음으로 말이다. 온몸을 시커먼 로브로 뒤덮곤, 얼굴은 우스꽝스러운 표정의 가면으로 가린 남자. 하지만 그가 자신의 앞에서 멈추자 가면의 틈새로 눈빛만큼은 확실하게 보였고… 그 틈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에 얼어붙었다. 싸늘하기 짝이 없는 살기, 그러면서도 시니컬한 분위기를 띠고 있는 은빛의 눈동자. 단지 시선을 받았을 뿐인데 등골이 오싹해졌고, 주변의 공기가 싸늘해지는 것만 같아서 베네토는 본인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Vendetta.” 그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을 베네토는 들었다. 그와 동시에, 남자의 발밑으로 펼쳐지는 백색의 현란한 마법진. 정삼각형 꼴의 각마다 원형의 형태가 겹쳐져있는 베르카 식의 마법진이었다. “그럼, 이만 헤어지도록 하죠. 베네토 소장.” “…잠깐, 자네의 이름을 아직…” “이름 따윈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찬란한 베르카 식 마법진의 중심에 서서 그가 말했다. “『광대』라고 불러주십시오.” 『광대』. 그리고 『광대』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남자에, 베네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준비는 제 쪽에서 취해놓도록 하죠, 그리고 연락은 제 쪽에서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그럼, 안녕히. 알렉산더 베네토 소장.” 그리고 『광대』는 흐느적거리면서 몸을 꾸벅 숙여 인사하였고 그와 동시에 마법진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을 끝으로 그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전송 마법. 그것도 엄청난 수준의 것이었다. 특정 물체가 아니라 시전자 자체를 특정 공간으로 전송시키는 수준이라면 그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경지의 것. 전송 마법을 잘못 행했다간 대상이 이상한 곳으로 전송이 되거나, 물체의 일부분만 전송이 될 수도 있다. 시전자가 자신을 상대로 전송 마법을 행했고, 그것에 실패했다간 시전자의 신체가 따로따로 찢겨져서는 토막이 난 채 전송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알만하건만, 본인을 대상으로 전송마법을 행했다는 것은 그것을 해낼 수 있는 실력을 지녔다는 것이기도 했고…. 『광대』가 모습을 감춘 뒤. 건물의 옥상 위에 혼자 남겨지게 된 베네토는 다시금 시선을 미드 칠더의 야경으로 향했다. 그것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속엔 무언가가 북받쳐 오르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베네토는 생각했다. 악마와의 거래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으로 이 땅의 부조리를 바꿀 수 있다면. 스스로 한 몸을 버릴 수 있다고 말이다. 베네토는 마지막으로, 『광대』가 했었던 말을 떠올린다. ‘벤데타(Vendetta).’ 알고 있는 말이다, 언젠가 책에서 보았던. “…피의 복수….” 누구를 향한 것이란 말인가? 시공관리국? 아니다, 『광대』가 이 말을 했을 때, 그의 눈동자는 시공관리국이라는 『집단』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 『누군가』, 즉 특정인을 향한 증오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시공관리국을 무너뜨림으로서 누구에게 피의 복수를 한단 말인가? 그것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알 수 있을 리도 없었고…. 그리고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광대』가 했었던 말의 뜻을 작게 중얼거리며 마지막으로 미드 칠더의 야경을 훑어보곤, 건물의 옥상에서 내려오기 위해 옥상의 문을 열고 사라졌다. * * * * * * 《신력 66년 5월 1일. 14:00. 관리 외 제 97번 세계, 우미나리 시, 세이쇼 대학 부속 소학교.》 페이트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것을 나노하는 근 며칠 동안,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엄청나게 두껍고 무거워 보이는 책을 옆에다가 펴놓은 채 그것을 읽지를 않나, 걸어가는 도중에 뭔가를 계속 중얼거리지 않나, 완전히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는 듯 했다. 그래서 자주 교사에게 지적을 받기도 했으나, 그에 굴하지 않고(?) 계속 이러한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으니. 게다가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이 함께 놀자고 하는 것에도 미안하다고 하며, 집에 빨리 가봐야 한다고 말을 한 뒤 부리나케 뛰어가는 것도 이상했다. 우정이 소홀해진 걸까? 얼마 전, 페이트가 자신과는 다른 길을 택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적잖게 실망했던 나노하였다. 자신과 함께 들어가기로 했던 무장대 육사학교가 아닌, 항공무장대라는 조직에 들어가게 되었다니…. 게다가 그곳이 자신이 들어갈 곳과는 달리, 『현역』으로 활동하는 곳이며 『엘리트』들의 집단이라는 것을 들었을 땐 질투마저도 느껴졌었다. 같은 마도사로서 느낀 질투였을지도 모른다. 「페이트, 뭘 하는 거야?」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정체불명의 두꺼운 책을 펴놓고 수업시간에 교과서가 아닌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는 페이트. 그것을 보다 못하여, 나노하는 종이를 찢어 저런 글을 적어 보내는 것이었다. “『수사 우선권』… 사건을 담당한 뒤, 담당자가 우선적으로 요청할 수 있는 수사의 협조나 조사권을 말하는 것…” 하지만 페이트는 그것은 안중에도 없는 지, 혼자서 나노하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작게 중얼거리는 것이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쪽지를 발견한다. 그러더니 정말로 무성의하게(나노하는 여기서 충격을 받았다), 간단하게 끼적여 나노하 쪽으로 다시 쪽지를 보내는 페이트. 그것엔- 「공부」 ─라는, 간단명료한 내용이 적혀져있었다. 「공부라니, 교과서도 아니잖아. 그거?」 상당히 충격을 받은 채로, 다시금 쪽지를 보내는 나노하. 그리고 그 쪽지를 읽더니, 한숨을 내쉬면서 두꺼운 책의 표지를 선보이는 페이트였고 나노하는 그것을 읽고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만 같았다. 『집무관』. 페이트가 보고 있는 책의 제목이었다. ‘『집무관』이라면… 내가 알고있는 그 집무관인가…?’ 학교 공부는 모두 팽개친 채로, 집무관이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페이트가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은, 분명히 그 책에 적혀져있는 내용 중 하나였을 것이라고 나노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 달에 상반기 집무관 시험이 있어」 이어서 페이트 쪽에서 보내진 쪽지에 적힌 말. 「벌써 집무관 시험을 볼 생각이야?」 온 답장의 내용에 페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다시금 시선을 보고 있던 책으로 향하는 것이었으니… 친구인 자신이 공부에 묻혀서, 뒷전으로 밀려나버린 것이 나노하는 내심 속상했다. 이번 달에 있다는 상반기 집무관 시험, 그것 때문에 페이트가 평소와는 달리 예리해졌던 거구나… 라고 생각하면서도. 하지만 친구로서, 공부에 밀려난 것에 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나노하는 마지막으로 관심을 자신에게 돌려보기 위해서 쪽지를 던졌다. 「페이트, 오늘 모의전. 부탁해도 될까?」 최근 들어 마도사로서의 일과 그에 관련된 공부에 빠져있는 페이트이다. 그렇다면 필시, 모의전을 하자는 말에 반응을 보일 거라 생각해서 던져본 쪽지였는데… 「시험 끝나고 상대해 줄게」 나노하는 더욱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하수로 다룬다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쪽지. 확실히 최근의 모의전 때는 예전에 쥬얼 시드 사건 때나 그 후의 모의전과는 달리 자신이 밀리곤 했었지만…. 「나노하는 주요 스킬, 포격 쪽으로만 개발을 하려는 성향이 있어. 그건 잘못된 거야. 마도사는 주요 스킬뿐만이 아니라, 세컨드 스킬의 개발에도 충실히 해야 해. ‘포격으로 맞춘다’가 아니라, ‘포격이 맞게끔 만든다’가 되어야 할 거야. 세컨드 스킬을 갈고 닦지 않으면 언젠가는 곤란하게 될 거고.」 그리곤 훈계하듯이, 이렇게 긴 내용의 쪽지를 보내오는 것에 더더욱 충격을 받았다. 밀리고 있다. 페이트에게 밀리고 있다, 관리국에서의 생활 쪽에서나 마도사로서의 능력으로서나. 최근들어 급격히 밀리기 시작하고 있다 나노하는 생각했다. 갑자기 비참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의전에서 자신의 포격에 떨기만 하던 페이트였는데… 이제는 자신이 밀릴 뿐만이 아니라 훈계를 받는 입장이 되어버리다니…. 『‘포격을 맞춘다’가 아니라, ‘포격이 맞게끔 만든다’가 되어야 한다』 이 말에 나노하는 갑자기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세컨드 스킬? 그런 건 필요 없어. 나에겐 나만의 방법이 있는 거야. 난 포격을 맞게끔 만들지 않고, 포격을 맞추는 쪽으로 나아갈 거야. 이렇게 한 명의 어린 포격형 마도사는 자신을 달래듯이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이었고…. 그리고 그 누가 알았으랴. 오늘의 도발기가 짙은 페이트의 조언이, 훗날 블래스터 모드라는 것이 탄생하게끔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14:00. 관리 외 제 97번 세계, 우미나리 시, 블레이즈 가(家).》 지구온난화니 뭐니 해서, 유난히도 여름이 빨리 온 것만 같았다. 어쨌든 루시안은 자신은 어차피 이 세계, 이 행성 출신도 아니니 날이 더워지든, 지구온난화가 오든 말든 상관없다는 상당히 몹쓸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여름이 빨리 오든 상관없지, 에어컨이 있으니까. 무척이나 몹쓸 생각이었다. 햇빛이 많이 비추면 빨래가 빨리 마르니까, 나야 좋지 뭐. 정말로 몹쓸 생각이었다. 더위에 맛이 간 것일까, 나이 값도 못하는 생각을 해대면서 스무 살의 아저씨는 에어컨을 틀어놓은 채 집 안에서 드러누워 낮잠에 취해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오뉴월 개 마냥… 아니, 진짜로 오뉴월 개가 한 마리 늘어져있었다. “사람 몸 베고 자지 마. 개 주제에….” “…치사하게….” 이렇게 몹쓸 생각을 해대는 청년과 한 마리의 소녀의 탈을 쓴 개가 에어컨 바람 아래에 드러누워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얼마나 만족스러운 생활인가, 루시안은 이렇게 생각했다. ‘…은퇴하길 잘했어.’ 만약, 아직까지 은퇴하지 않았다면? 필시 사무실의 책상 위에서 처절하게 서류 처리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드러누워서 자는 낮잠은 꿈만 같은 얘기고, 기껏해야 짬을 내서 책상 위에 엎드려 자는 선잠이었을 것이다. 애완견 비슷한 신세로 전락한 한 마리의 사용마와 늘어져서 낮잠을 잔다. 이것만으로도 루시안은 은퇴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빨래랑 청소는 다 해놨으니까….’ 익숙한 일이었기에 걸리는 시간도 얼마 되지 않았다. 점심식사는 이미 먹었고, 페이트가 돌아온다 하더라도 도시락을 먹고 올 테니 점심을 따로 준비할 필요는 없다. 아침엔 열심히 일하고, 낮에는 실컷 즐긴다. 그것이 그의 생활패턴이었다. 그렇게, 한 때는 마도 통괄관이라 불리며 관리국 최고의 마도사이자 집무관으로 여겨졌던 그는 타락해가고 있었다. “…페이트가 왔나보네…. 나가봐, 알프.” “열쇠도 가져갔었는데 뭐하러…. 잠이나 잘래….” 바깥에서 문의 잠금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페이트의 학교가 슬슬 끝났을 시간대가 되었던 것에 페이트가 돌아왔다고 생각한 루시안이 알프에게 마중을 나가보라고 했으나 알프는 귀찮다는 듯이 돌아눕는다. 그리고 사람뿐만 아니라, 한 때는 그 누구보다 자신의 주인을 따랐고 생각했던 한 마리의 개 역시 타락해가고 있었다. 때 이른 오뉴월 더위와 에어컨의 축복 때문에…. “페이트, 다녀왔니…?” 타락해버린 사용마를 대신하여, 루시안은 바닥에 드러누운 채 페이트에게 다녀왔냐고 묻는 것이었고…. 가벼운 페이트의 발걸음소리가 빠른 간격으로 들려왔다. 그리고 문이 벌컥 열리더니. “담당 집무관에게 수사권을 우선적으로 주는 이유는?!” 거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더니, 폭풍 같은 기세로 자고 있던 자신의 면상에 대고 물어오는 페이트에 루시안의 표정이 멍해졌다. 이 아이답지 않은 모습이다, 이렇게 거침없고 몰아쳐오는 모습은…. “왜, 왜 그래… 오자마자 갑자기….” “사건을 담당한 집무관에게 어째서 수사권에서의 우선권을 주는 거에요?!” 루시안이 그 모습에 놀라서, 왜그러냐고 묻는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페이트는 재차 물어왔다. …사건을 담당하게 된 집무관에게 수사권을 우선적으로 주는 이유…? ………. ……. …. …왜였더라? “…아마, 수사의 효율성과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이랬던 것 같다고 중얼거린다. 확실하지 않았으니까. “확실해요, 아빠?!” “…확실하지는 않은데….” 어차피 집무관 시험에서나 나오는 것들이다. 시험을 준비할 때엔 죽기로 공부를 하지만 대부분의 집무관들이 시험에 합격하고 나면 합격하기 전에 공부했던 것들은 대부분 까먹게 되니까.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집무관 시험에 합격했던 게 일곱 살 때였고 지금이 스물이니, 벌써 13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당시에 공부했던 것들 중 떠오르는 것은 몇 되지 않았다. 실제로 공부했던 것들 중, 써먹는 것들은 몇 개 안되니까…. “…시험 때문에 너무 예민해져있지 마.” 페이트가 이렇게 민감해져있는 것은, 필시 일주일 하고도 이틀 남은 상반기 집무관시험 때문이라고 루시안은 짐작할 수 있었다. 덧붙여서 ‘그러다가 떨어지면 진짜로 실망할 테니까…’, 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했다간 미움받을까봐…. 루시안이 매년 치러지던 집무관 시험의 합격자들을 보면서 느낀 게 정말 열심히 준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집무관 시험은 상대평가인 데다가 준비하는 녀석들은 다 열심히 하잖아? 힘들 것이다, 아마. ‘…나는 열심히 했었던가?’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자신은 일곱 살의 나이에 집무관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었다. 그 때의 자신도 지금의 페이트처럼 열정적으로 시험에 대비했었던지 생각해본다.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시큰둥한 채로, 솔직히 귀찮았었던 것 같았다. 될대로 되라는 듯이 시험을 봤었고 그랬기에 수석 합격을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감동따윈 없었다. 시큰둥했다. 그때의 자신은 공부하는 시간보다는 딴 짓을 하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공부를 아예 안했던 것은 아니지만…. ‘집무관 시험은 반이 재능이고 반이 운이니까….’ 집무관이 되려고 하는 이들에게 노력은 기본이다. 당락을 결정짓는 것은 재능과 운, 이렇게 반반씩 나뉘어져있는 요소들. 자신은 단순히 그것들에 완벽히 충족되었을 뿐이었다. 단순히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닌 것이 집무관시험이라고 생각하면서, 루시안은 뒹구는 채로 하품을 내뱉는 것이었다. “…꼭 이번에 시험을 봐야겠어? 그냥 나중에 봐도 될 텐데…” “꼭 봐서, 꼭 붙을 거에요…!” 솔직히 루시안은 페이트가 어린시절만큼은 평범하게 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항공무장대에서 일하는 시간이 있기는 해도, 그래도 평범한 유년을 보냈으면 좋겠다 생각하는데…. 집무관은 조금은 성장한 다음에도 도전할 수 있으니까. 집무관이 되고나면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그만큼 그 자리가 힘든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자신이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일곱 살이라는 어린 나이 때부터 스무 살의 청년이 될 때까지, 집무관으로 일해 왔었다. 평범해야만 마땅한 그 기간동안,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해왔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것이다. ‘…연금 하나는 최고지….’ 집무관의 모든 것이 싫었으나, 딱 하나 마음에 들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리고 거실에 쭈그려 앉아선, 에어컨 바람을 쐬며 자신이 예전에 공부하던 것을 찾아내어 건네준 집무관의 일에 관한 책을 읽고있는 페이트였다. “오늘은 일 안가?” 보통이면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항공무장대의 일을 하러가기 위해 준비를 했을 페이트이건만. 오늘은 집안에 머무르고 있는 것에 루시안이 묻는 말이었다. “이번 달에 집무관 시험이 있다고 말했더니, 제독님이 집에서 쉬면서 공부하라고 하셨어요.” “…킬 제독이 허락해 줬어?” “예.” 휴가를 허락해줬다는 페이트의 이 말에 루시안의 안색이 무척이나 창백해졌다. 라르고 킬은 공과 사를 그 누구보다 뚜렷이 한다. 그런 그가 페이트에게, 집무관 시험을 앞뒀다고 페이트에게 따로 휴가를 내줬다는 것은 희소식이 아니다. 루시안에게나 페이트에게나 큰일인 것이다. 그만큼 라르고 킬이 페이트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는 뜻이다. 이번 집무관 시험에 합격할 것이라고…. 만약, 만약이지만… 휴가를 받고 공부를 했음에도 페이트가 시험에서 떨어진다면? “….”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의 질책하는 시선은 페이트 뿐만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자신에게로 향해질 것이다. 『두 번째 마도 통괄관으로 만들겠다더니, 이게 무슨 경우지?』 예지력 120%로 상승, 분명히 싸늘한 목소리로, 조롱하듯이 자신에게 날아올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은 그에게 들볶이리라. “…페이트!!” “예?!” 그리곤 이번엔 루시안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페이트가 깜짝 놀랬다. 전혀 본 적이 없는, 처절함이 절로 묻어나오는 악귀의 형상을 하고서 자신의 의붓 아버지가 애원하듯이 자신의 양손을 쥐는 것이었다. “…할 수 있지?!” “…예?” “집무관 시험 따위, 한 번에 붙어버려!” 물론 그건 쉽지 않다. 실력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라, 운이 상당히 크게 작용한다.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했고 능력이 있어도 재수가 없으면 떨어진다. 시험 당일 날, 응시생들의 컨디션이나 본인의 컨디션. 혹은 그 시험의 시험 출제관들의 성향… 시험을 어렵게 내느냐 쉽게 내느냐 등등….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외부 조건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루시안은 페이트가, 꼭 집무관 시험에 합격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떨어지게 된다면 이 아이에게도 충격일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부담스러운 상황이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될 것만 같아서…. “할 수 있지, 페이트!” “…예!” 물론 페이트가 그 생각은 알 리가 없었다, 그저 자신을 향해 격려해주는 것으로 생각해서 열의를 띤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었고…. 둘의 그 외침에 잠에 빠져들려 하던 알프가 미간을 구기면서 일어나더니. 부녀가 손을 맞잡고있는 광경을 연출해내고 있는 것에 뭐하는 짓거리냐고 묻듯이 표정을 취하는 것이었으니… ‘…페이트가 이상해졌어.’ 변하고 있다. 그것을 페이트의 사용마인 알프는 감지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옛날의 주인의 모습은 항상 작기만 했다. 능력이 있음에도 그것을 자랑삼으려 하지 않았고, 항상 움츠러들어 있었다. 그러면서 희생적이다 싶어서 프레시아 테스타로사에게도 일방적으로 이용당하다가 버려졌다. 게다가 그나마 남아있던 자신감이나 자부심도, 타카마치 나노하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사라져버렸었다. 능력이 있음에도, 가능성이 있음에도 움츠러들었던 것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더욱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에게 밀려서. 더욱 큰 나무에 가려서 빛을 받게 되지 못한 나무처럼…. ‘…아니, 이상하게 된 게 아니야.’ 변하게 되었다, 루시안 블레이즈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이상하게 되었다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줄 알게 되었으며, 자기 자신의 앞길을 스스로가 열어나가고 있다. 좋은 징조다. 가지고 있는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리고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줄 이를 부모로 만났다는 것은 페이트에게 좋은 기회다고 알프는 생각했다. 루시안 역시 페이트를 아껴주고 있다. ‘마도 통괄관이 되고 싶어.’ 언젠가 페이트가 잠에 들기 전에, 자신에게 했던 이 말은 루시안으로부터 부여받은 사상. 물론 페이트나 알프는 마도 통괄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고 있지는 않다. 그저 귀로 들은 이야기 뿐. 그리고 마도 통괄관이라 불렸다는 루시안이 어느 정도까지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이다.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알프는 생각했다. 자신의 주인이 언젠가는 의붓 아버지의 뒤를 이어, 두 번째의 마도 통괄관이라는 것으로 불리게 될 지도 모른다고. * * * * * * 《17:00. 시공관리국 본국 제 014 훈련 스페이스.》 붉은 기사갑주를 입고, 철의 백작이라는 애칭을 가진 디바이스를 든 어린 기사는 쫓기고 있었다. 사방에서 작은 맹수들처럼 몰아쳐오는 분홍빛 마력광을 띤 마력의 탄환들에게. 그것에 쫓기면서, 멈춰서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철퇴의 기사 비타는 피하고 피할 뿐이었다. “크읏…!” 이래서야 접근해서 공격을 할 수가 없다. 한 발뿐이라면 위협적이지 않은 마력의 탄환이다. 하지만 이것의 숫자가 한 발이 아니라, 수십 발에 이르게 된다면 무척이나 위협적이게 된다. 한발이면 충분히 견뎌 낼 방어가 부서질 것이다. 그래서 비타는 그저 피할 뿐…. 엑셀 슈터(Axcel Shooter)에 쫓겨서 도망만 친 지 한참이 되었다. 시작하자마자 상대방이 다짜고짜 수많은 마력 탄환의 탄막을 뿜어대는 것에 근접전을 선호하는 비타로서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뭔가… 달라…!’ 평소에 자주 모의전을 해왔던 상대, 하얀 배리어 재킷을 입고 지팡이 형태의 디바이스를 들고 있는 마도사가 오늘따라 달라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상하게 느껴졌다. 평소 같았다면 이렇게, 탄막으로 몰아가면서 주특기인 포격마법을 썼을 텐데, 그랬다면 빈틈을 노려서 반격이라도 해봤을 텐데─ 오늘은 다른 날과는 달리, 계속해서 엑셀 슈터만을 사용하며 자신을 농락하듯이 다루고 있었다. 농락당하고 있다, 금방이라도 한꺼번에 덮쳐올 수 있음에도 엑셀 슈터가 자신을 이리저리 몰아가고만 있는 것에 이렇게 밖에 느껴지지 않는 비타였다. “뭐가 세컨드 스킬이야….” ‘?’ “뭐가 『‘포격이 맞게끔 만든다’가 되어야 한다』야….” 작게 중얼거리는 상대방의 목소리가 귀에 속삭이는 것처럼 뚜렷하게 들려오는 이유는 어째서일까? “『‘포격을 맞춘다’가 아니라, ‘포격이 맞게끔 만든다’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비타?” “뭐, 뭣…?” 엑셀 슈터로 하여금 주변을 맴돌게 하여 움직임을 봉쇄시킨 뒤, 나노하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뜬금없는 말을 물어오는 것에 비타는 당황했다. 빠져나와야 할 텐데, 주변을 포위하듯이 맴도는 수많은 엑셀 슈터의 탄막에 빈틈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큭… 이대로 덮쳐온다면…’ 져버리는 건데…! 수십 개의 탄환이 동시에 덮쳐온다면 필드계의 보호마법인 팬저 힌더니스를 사용하더라도 그것이 금방 깨져버릴 것이라는 건 예전의 싸움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세컨드 스킬이니, 포격이 맞게끔 만든다느니. 나한텐 다 필요 없는데… 페이트도 참 심술 맞지….”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하하, 집무관 시험 따위. 확 떨어져 버리라지─?” 거리가 있었지만 비타는 볼 수 있었다. 나노하의 눈동자의 초점이 흐릿해져 있는 것을, 그리고 헛웃음을 흘리듯이 몸을 떠는 그 모습은 무서웠다. 왠지 모를 공포마저 느끼는 것이었고…. 악마다, 진짜 악마의 모습이다고 비타는 생각했다. “아아… 보여줘야 하는 건데, 페이트한테…. 그런 것 없이도, 이렇게 잘 싸울 수 있다는 걸…” “어, 어이─ 이봐…?” “될 수 있으면, 페이트한테 ‘직접’ 체험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리곤 실성한 사람처럼 키득거리는 나노하의 모습은 괴기스러웠다. 깔깔거리면서, 실성한 듯이 웃어대는 나노하와 그에 맞추듯이 더욱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엑셀 슈터. “비타, 페이트한테 말해줘….” “…?” “난 그런 거 없이도, 이렇게 잘 싸울 수 있다는 걸 말이야….” 그리고 엑셀 슈터가 사라졌다. 어째서인지 몰라도, 나노하 본인이 비타 주변을 선회하던 수많은 엑셀 슈터들을 물린 것이다. 그것에 비타는 영문을 모르겠지만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여 반격에 나서려고 했으나…. “나는 이렇게도, 충분히 포격을 맞출 수 있는데 말이야….” “!”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보고야 말았다. 갑자기 정상치를 훨씬 넘기면서 증폭하기 시작하는 나노하의 마력을. 그리고 나노하의 전방으로 별들이 모이듯이 모여가기 시작하는 분홍빛 마력의 빛줄기들을. “자, 자, 자, 잠깐만!” 저것이 무엇인지는 본 적이 있었기에 알 수 있었다. 어둠의 서의 방어 프로그램을 격퇴할 때 사용하였던 포격마법─. 【Star Light Breaker─】 그리고 소녀의 손에 들린 지팡이 형태의 디바이스는 비타의 예상을 확신시켜 주듯이, 그 포격 마법의 이름을 무기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마력이 별빛이 모여들 듯이 모여가면서, 그 덩어리를 점점 더 크게 부풀려가고 있다.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그것은 제 3자에게 해당하는 얘기. 당사자인 비타에겐 전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 안돼─!” 막기엔 너무나 강대하다, 피해내기엔 자신은 느렸고 포격의 범위가 너무 넓었다. 저항할 수단도 없었다. 그래서 비타는 절규하듯이, 상대방에게 농담하지 말라고, 지금이라도 그만 두라는 듯이 호소하듯이 외치는 것이었고─. “돼.” ─나노하는 광기어린 웃음을 흘리며, 악마의 표정을 하곤 비타에게 맞받아치는 것이었다. 《신력 66년 5월 10일. 09:00. 미드칠더 수도 크라나간, 시공관리국 제 09 시험장.》 대망의 아침이 밝았다. 그리고 저마다 공통된 꿈을 품고선, 수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나이 대는 다양했다. 그렇지만 성별도, 나이 대도, 출신 세계도 모두가 제각각인 그들에게 유일하게 공통점이 있다면 같은 꿈을 가지고 이 곳에 왔다는 것이다. 집무관 자격시험. ‘…오랜만에 와보는 구나, 여기도.’ 그리고 북적이고 있는 응시생들의 틈바구니에서. 13년 전엔 저들 중의 한명이었던 청년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감회에 젖어있었다. 비록 구성원이나 구조물의 배치는 바뀌었을지언정, 이 곳의 공기는 여전했다. 13년 전과 같은 공기였다. “너무 긴장하지 마.” “으…” 눈에 보일 정도로 뻣뻣하게 굳어있는 페이트의 모습은 안쓰럽게 마저도 느껴졌고…. “아, 아빠…” 페이트 팽팽한 시험장의 공기에 압박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루시안을 불러보는 것이었으나, 루시안으로서도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코코아라도 한 잔 마셔. 마시고 긴장 풀어. 시험 볼 때 괜히 긴장해봤자, 득 되는 거 없더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충고였고 루시안은 보온병 안의 코코아를 컵에 따라 잔뜩 굳어있는 페이트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든 뒤, 천천히 홀짝이는 페이트. “…그나저나, 옛날하고는 많이 변했는데….” 시험의 체계 자체가 변하였다. 13년 전, 자신이 시험을 치렀을 때의 집무관 시험은 1년에 한번 꼴로 필기시험을 치러서, 그 중에서 집무관을 뽑는 형식이었다. 실기시험 같은 것은 배제한 채로, 필기시험의 합격자들을 집무관으로 채용한 뒤 그 후에야 실전에서의 능력을 기르게 하는 것이 보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상반기 하반기로 구분하여, 1년에 2번꼴로 치루는 것 같았다. 상반기는 필기시험을 치루고, 그 상반기 시험에 합격한 응시생들이 하반기 때 실기시험을 치루는 것으로. 최종적인 합격자들을 발표한다는 것 같았으니까…. ‘좀 더, 뛰어난 인재를 원한다는 거겠지.’ 시공관리국의 힘은 선천적인 재능을 가진 인재에 거의 모든 것을 의존하기 마련이다. 원래 마도사라는 게 재능에 의해 결정되는 편이 짙다. 그 탓에 시공관리국에는 늘 인재가 부족하기 마련이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중범죄자와의 거래도 마다하지 않는 시공관리국이니까. 아무래도 이왕 뽑는 거, 확실하고 제대로 된 집무관을 뽑자는 의도이리라. “페이트.” “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편한 마음으로 보도록 해.” 가볍게 두드리듯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말한다. 한 번에 합격해버린다면 그만큼 좋은 것도 없겠지만, 떨어진다 한들 기회는 많다. 아직 어리고, 그만큼 많은 기회가 남아있다는 것이기도 하니까.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 것도 아니니까, 괜히 긴장을 해서 도리어 역효과가 나타나버리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냥 평소에 하던 것처럼, 최선만 다하도록 해.” “예….” “그래, 그럼 슬슬 들어가. 시험 끝날 때까지,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시험실 안으로 슬슬 들어가 보라고 하면서, 루시안이 시험이 끝날 때까지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하자 페이트가 조금은 놀라는 것이었다. “저…, 기다려주시려고요?” “왜 그래?” “그… 남아있으셔도 괜찮아요? 혹시나 아는 사람을 만나거나 하시게되면….” 페이트가 항공무장대에서 일하면서, 루시안에 대해서 알게 되었던 것이 있었다. 그가 시공관리국 측의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꺼려한다는 것이었다. 집무관으로 일할 때 친하게 지낸 사람들이라도, 그는 은퇴를 하고 나서는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건 아델리에나 같은 팀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에게 들었던 걸로 알 수 있었다. 이 곳에 남았다간 관리국 시절 때 아는 사람들과 만날 수도 있는데…. “괜찮아, 어차피 집무관 시험을 보러 온 녀석들 중에 날 아는 녀석은 없을 테니까. 어차피 집안일은 다 해 놨고, 집에는 알프도 있으니까. 열심히 보고 와.” “…예!” 그리고 페이트가 바삐 시험실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루시안은 미소를 머금곤 이런 것도 나름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누군가가 성장해가는 것을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는 것 말이다. ‘…어머니도 나랑 같았을까.’ 자신의 피가 섞인 아이는 아니다. 친자식이 아님에도 애정을 갖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흡족함을 느낀다. 이렇게 느끼면서도, 루시안은 자신이 왠지 늙은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되어버린 것에 실없는 웃음을 흘리는 것이었다. 대기실에 있는 의자에 앉은 채, 집무관 시험에 응시한 응시생들로 보이는 이들을 쭉 훑어보았다. 젊은이, 나이든 이. 남자, 여자… 대강은 이런 부류로 나눌 수 있겠지만 다들 어느 정도 나이가 차있어 보이는 이들이었다. 페이트 만큼 어린 응시생은 보이지 않았다. 크로노 하라오운이 어린 나이로 집무관 시험에 합격했을 당시에 그것이 몇몇 이들에게는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큰 화제가 되지 못했던 것이 있다면 루시안의 전례가 있기 때문이겠지만…. ‘…페이트가 합격하면, 어떻게 될까?’ 아직은 모르는 얘기지만, 합격자 명단에 페이트의 이름이 떠오르게 된다면? 수석 합격자가 아니더라도, 루시안은 페이트가 큰 화제를 몰지 않을까 생각했다. 왜냐하면 뒤에 붙어있는 블레이즈라는 성 때문에. 페이트가 루시안의 양녀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으니까…. 하지만 루시안의 속내는 합격보다는 불합격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아직은 어리다, 재능은 있으나 그것을 뒷받침해줄 경험이 부족하다. 게다가 루시안이 그것을 원하고 있지 않았다. 물론 합격한다면 기뻐할 것이고, 아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것도 좋겠지만…. 이른바 솔저 칠드런이라고도 하는, 어린 나이로 현장에서 일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니까. 자신이 경험했던 그것을 겪게 하는 것이 마음 편치는 않았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어린 시절은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보내고. 집무관은 나중에 되었으면 했는데…. ‘…어쨌든, 페이트 본인에게 달려있지….’ 설득을 해봤어도 소용이 없었으니, 당락의 여부는 페이트에게 있다면서 루시안은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 * * * * * 인파가 북적이는 요란한 소리에 루시안은 저도 모르게 잠들었던 것에서 깨어났다. 기다린다 말했음에도 속내론 지루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벽에 등을 기댄 채 대기실의 의자에 앉아 잠에 들어버린 것을 보면…. 잠에 들기 전에 사람들이 북적였고, 잠에 깬 뒤에도 사람들이 북적이는 것을 보면… 시험이 끝난 모양이었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시험이 끝난 뒤에 이 소리는 꼭 들려오는구나.’ 시험이 끝난 뒤, 몇몇 응시생들의 절규소리가 어딘가에서 울려 퍼지는 것에 루시안은 13년 전의 그날을 떠올리는 것이었고…. 그리고 이 소리는 또 다시 들려올 것이다, 상반기 합격자 발표할 때에도…. 왜 이리 확신 하냐면, 자신 때도 그랬었으니까. “…페이트…?” 그리고 자신의 옆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했더니, 옆에 페이트가 앉아있는 것에 루시안은 몽롱해진 정신을 깨우려 머리를 흔들면서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옆에 앉은 페이트는 묵묵부답. “시험 끝났구나….” 그래도 말이 없었다.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루시안은 설마? 하곤 생각했다. 대충은 뭔가 집히는 게 있었으니까. “…망쳤니?” 『시험을 망쳤니?』가 아니라, 『그냥 망쳤니?』 라고 물어봤다. 어차피 그게 그거지만…. 그리고 페이트는 그 물음에 한참이 있고 나서야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것이었고…. ‘…망쳤구나.’ 그렇다면 이렇게 침울해있는 것이 당연했다. 큰 기대와 꿈을 품고 있었을 테니, 그만큼 실망과 절망도 클 것이고…. 기대와 실망은 정비례하는 게 맞으니까. “괜찮아, 열심히 했으면 그걸로 된 거야.”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라르고 킬은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그의 생각이 어떻든 루시안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애가 이렇게 실망해 있는데, 만약 라르고 킬이 이 아이에게 집무관 시험을 망친 것으로 좋지 못한 말을 한다면 루시안은 그에게 뭐라 따져야 겠다 다짐하는 것이었고…. “다음엔 잘할 수 있을 거야.” “….” “돌아가자, 집에. 먹고 싶은 거 있어? 만들어 줄 테니까….” 딱히 뭐라 달래줘야 할지 몰라서, 그저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위로해주면서 루시안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페이트의 등을 다독여주며 돌아가자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페이트가 작게 중얼거리면서 묻는 말. “…아빠는, 몇 번 만에 붙으셨어요?” 아이가 묻는 이 말에 루시안은 침묵했다. ‘…몇 번 만에 붙었냐고?’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이런 상황에서는. 말했다간 위로해준다는 말이, 오히려 확인사살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몇 번 만에 붙으셨어요?” 굳이 말하기 어정쩡한 이유를 말하자면… 한 번에 붙었으니까, 수석으로. “…한 번에 붙었죠?” “….” 눈치가 빨랐다. 『붙으셨죠?』가 아니라 『붙었죠?』라고 묻는 것은 본인이 이미 예상하고 있으면서 확신하기 위해서 묻는 말이었으니까. 부정을 해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루시안은 조심스럽게, 페이트의 시선을 외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수석이었죠?” ‘…유이리냐, 아델리에냐….’ 둘 중 한명이리라. 분명 둘 중 한명에게 들었으리라. 그들이 아니라면 팀의 누군가에게 들었으리라고 루시안은 짐작하며 괜한 소리를 한, 누군지 모를 이에게 마음속으로 악담을 퍼붓는 것이었고…. 여전히 시선을 외면한 채로,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은 시끄러웠다. 하지만 한 부녀 사이엔 정적만이 감돌았다. “그, 그때는 시험 체계 자체가 틀렸고… 문제가 워낙 쉬웠었으니까…” 그래서 이처럼 얼토당토않은 핑계를 되면서,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아이의 상처를 달래주자는 취지로 말해보는 루시안. 하지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페이트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는 것을 보고 루시안은 얼어붙었다. 울고 있다. 아니, 결정적으로 울게 만들어버린 것은 자신이 한번에 합격해버렸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루시안은 무척이나 난감해졌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큰 죄를 지어버린 것 같았다. “페, 페이트…?” 울어? 라는 말을 차마 입에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드는 페이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져 있었다. 쓰디쓴 좌절을 맛보게 된 아이의 눈물이. 그리고 그것에 루시안은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고… 물론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좌절이었지만…. 소리 없이 우는 것에 다독여주는 것 밖에 해줄 수 없다. 그리고 마침내, 페이트는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페이트 테스타로사 블레이즈. 그것은 열 살의 소녀가 맛본 큰 좌절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달래주는 것은 졸지에 페이트의 친구들로부터 아저씨로 불리게 된 스무 살의 총각이었고…. 뭐라고 달래주는 말을 해야 우는 것을 멈출까. “괘, 괜찮아… 원래 인생은 절반이 불행으로 이루어진 거니까…” 다음엔 붙을 수 있을 거야─. 라는 말을 이어서 하려고 했다. 하지만 페이트는 루시안의 이 말을 듣자마자, 소리죽여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라 아예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향해졌음에도 페이트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루시안은 자신의 위로하고자 했던 말이 역효과를 낸 것에 더욱 난감해져서 다독이면서 달래보았으나 소용이 없었고…. 《신력 66년 5월 11일. 15:00. 관리 외 제 97번 세계, 우미나리 시, 세이쇼 대학 부속 소학교.》 페이트의 상태가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그것은 며칠 전과는 다른 의미로, 무척이나 좋지 않다고 말할 수 있었다. 며칠 전 전 까지는 수업 외의 공부인 집무관 시험공부에만 몰두하여. 다른 곳으로 새어나갔다고나 할까.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초월하는 상태였다. 하루 종일 망연자실해 있었다, 페이트는. 적어도 하야테는 그렇게 느꼈다. 어디 아픈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데, 헛것을 본 사람처럼 초점을 흐릿하게 하고선 수업을 듣는지 마는 건지…. 아직은 휠체어를 탄 채의 자신도 따라가기 힘든 수업에는 집중하는데. 사지 멀쩡한(?) 애가 저러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나저나 학부모 참관 수업이라니….” 어쨌든 종례를 했음에도, 책가방 챙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망연자실해 있는 친구의 혼을 깨우기 위해 하야테는 화제를 돌려보았다. 하야테가 입에 올리고 있는 것은 담임교사가 말했었던 학부모 참관 수업. 말이 학부모 참관 수업이지, 실상은 교사와 학부모가 아이의 평소 생활이나 수업 태도, 혹은 그 외의 것에 대해서 상담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하야테는 알고 있었다. “…어차피 우리 부모님은 못 오실 테니까.” 화제를 돌려보려고 했던 하야테의 말에 아리사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리는 말이었다. 하긴, 하는 일이 일이고 보니까 어쩔 수 없지만…. 하야테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언니가 와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스즈카의 부모님 역시 아리사와 마찬가지인 입장이었으나 스즈카에겐 언니가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들도 나름 귀찮은 일이 많다고, 휠체어 위의 소녀는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나노하는?” “아빠가 와 주시겠지, 엄마는 가게를 봐야 하실 테니까. 그래도 엄마보다는 아빠가 와 주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나노하가 『엄마보다는 아빠』라고 하는 말에 확실히 그렇게 보일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하야테는 원래 샤멀을 데리고 오려고 생각했건만. 자피라에게 나오라 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샤멀의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았으니까…. “그나저나 나노하, 비타랑 모의전 할 때 무슨 일 있었어?” “? 왜?” “아니… 근래에 비타의 상태가 몹시 안 좋아보여서….” 나노하와 모의전을 하러 간다고 나갔던 날. 비타는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실신한 채로. 처음엔 시체가 들것에 실려 들어온 줄 알았건만 실신해있다는 말을 듣고서야 그것이 시체가 아니라는 것을 하야테는 알아차렸던 것이다. 비타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 다음날, 정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서도 멀쩡치 못한 것이, 몇 시간 동안은 동공이 축 풀어진 채로 멍하니 지내는 것이었고. 하얀 색과 분홍색을 보면 기겁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동공이 풀어진 채 멍하니 있는 것(지금 페이트의 모습과 흡사했다)은 거의 사라지거나 했지만 하얀색 옷이나 분홍색을 보게 되면 기겁하는 건 여전했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봐도 입을 절대로 열지 않으니 알 수가 없어서, 하야테는 비타가 나노하와 무슨 일이 있었던가 해서 물어보는 것이었다. “으음… 모르겠는데?” 하지만 열쇠를 쥐고 있을 거라 생각한 이는 상큼한 미소를 머금곤 모르겠다고 부정하는 것이었고. 본인이 모르겠다는데 친구를 추궁하거나 캐물을 수는 없다 생각해서 하야테는 더 물어보려는 것을 그만 뒀다. 범인이 바로 눈앞에서, 상큼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소녀라는 것도 모르고선…. “페이트는 루시안 아저씨가 오시는 거야?” 그리고 반응을 끌어내보자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답변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리액션조차도 없었다, 이래서야 호러 영화에 나오는 좀비 같다고 하야테는 생각했다. “…페이트, 무슨 일 있어?” “으응, 집무관 시험에 떨어졌데.” 페이트에게 물었던 말인데 아무렇지도 않게 나노하의 입에서 대답이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무척이나 즐겁다는 듯이, 경쾌한 어조로 말이다. “완전히 망쳤다던데? 그렇게 공부했는데도 말이야.” 상큼하게 웃는 얼굴로 이렇게, 친구의 치부와 아픈 곳을 마구 찔러대는 모습은 열 살짜리 소녀의 것으로 보이지 않다고 하야테는 생각했다. 도대체 이 둘 사이엔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이런 말을 듣고 있음에도, 페이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그리고 천천히 나무늘보와도 같은 움직임으로 그제야 책가방을 챙기기 시작하는 것이었고…. 그 모습을 보며 하야테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내일 있을 학부모 상담 때, 교사가 분명히 페이트의 저런 이상행동에 대해 루시안에게 물어볼 것이라고…』말이다. 평소에 페이트가 집무관이 되고 싶다고 했던 것을 하야테 역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험을 봤고 완전히 망쳐버렸다면 큰 충격을 받은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노하와 이상하게 틀어져버린 관계도… 시간이 흐르면서 원래대로 되돌아올 것이고. 일단은 페이트가 제정신을 차리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다. “…어라?” 그때, 시선을 밖으로 돌린 하야테는 의외의 사람을 발견한다. “저기, 루시안 아저씨 아냐?” 하야테의 말에 페이트를 제외한 일동의 시선이 모두 바깥으로 향해졌다. 백색에 가까운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외국인 남자라면, 그리고 이 곳에 찾아올 남자라면 루시안 밖에 없다는 것이 그것을 본 그들의 생각이었다. 문제는 그가 어째서 학교까지 찾아왔느냐 이겠지만…. 가끔은 아침에 학교 앞까지, 페이트를 자전거로 데려다주는 경우가 있었지만 말이다. “루시안 아저씨?” 하야테의 이 부름에 그제야 찾았다는 듯한 표정을 한 뒤, 아이들이 거의 모두 빠져나간 교실 안으로 루시안이 들어왔다. 이미 아저씨라는 부름엔 익숙해져 있었던지, 이제는 아저씨라고 불리어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루시안. “아아, 안녕. 애들아.” “…아저씨가 여긴 왜 왔어요?” 하지만 아리사가 아저씨라고 부를 때엔 표정이 구겨지는 것은 감출 수 없었다. 하야테가 부르는 ‘아저씨’는 호의적인 어투였지만 아리사가 부르는 ‘아저씨’는 적대적인 느낌이 짙었으니까. 실제로 루시안은 얼마동안은 고민했었다.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기에 이 아이가 왜 날 적대하는 거지?』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쪽에서 잘못했으면 잘못했지, 자신이 잘못했던 것은 없다 생각해서 이제는 그러려니 생각하는 것이었고…. “페이트 데리러.” 그리고 루시안은 여전히 멍하니 자리에 앉아있는 페이트를 보며 한숨쉬는 것이었다. “페이트, 집무관 시험에 떨어졌다면서요?” 목소리가 너무 컸다, 나노하의 질문은. 마치 페이트더러 들으라는 듯이, 해맑은 목소리로 웃으면서 말하는 것에 루시안은 잔기침을 흘렸고…. “아직 발표가 난 게 아니니까, 봐야 알겠지.” “망쳤다고 하던데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니?’ 페이트 본인이 마저 못해 말해줬을 것이리라고 루시안은 생각하면서, 왜 애가 갑자기 이렇게 목소리를 키우는 건지 의아해했다. 하지만 페이트는 이 말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런데 애는 도대체 왜 웃으면서 밝은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하는 거야? 라고도 생각했다. “집무관 시험은 상대평가니까…, 페이트한테 어려웠으면 다른 사람들한테도 어려웠을 거야….” 하지만 본인이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망쳐버렸다면, 아무리 상대평가라고 하지만 힘들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페이트가 자기 입으로 울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리라. 어찌되었든 루시안은 가방만 챙겨뒀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페이트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실제로 아침에 등교를 할 때에도 자신이 직접 데려다 주었을 정도였으니…. “아, 루시안 아저씨. 내일 학부모 참관 수업이 있데요. 오실 거죠?” 딸인 페이트가 아닌 하야테를 통해서 올 거냐고 묻는 말을 들으니, 다른 사람이 들었다간 하야테가 딸인 줄 알만한 상황. 학부모 참관 수업, 그 말에 루시안의 표정이 조금은 미묘해졌다. “…꼭 나와야 하는 거야?” “아저씨, 그걸 말이라고 해요?” ‘…너한테 물어본 거 아냐.’ 아리사의 어김없는 적대적인 어조에 인상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참관 수업이 아니라, 참관 수업 뒤에 선생님하고 학부모 상담도 하는 거니까. 꼭 나오셔야 한다고요.” “…상담이라….” 학부모 참관 수업, 그리고 교사와의 학부모 상담. 하야테가 이 말을 하는 것에 루시안은 앞이 막막해졌다. 물론 여기 있는 페이트의 친구들은 자신과 페이트의 사정을 잘 아니까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학부모 참관 수업이라고 한다면 다른 아이들의 부모들도 오는 것이다. 나이차가 열 살 남짓밖에 나지 않는 부녀를 그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대부분 좋지 않거나 이상하게 여길 것이니까. 사정도 모르는 이들에게 그런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교사라도 다를 건 없겠지만…, 물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아마 자신과 상담을 하게 된다면 페이트와의 관계를 묻게 될 것이고, 아버지라고 답한다면 나이가 어떻게 되냐는 물음을 받을 것이고…. “한 번 생각해 봐야지…. 그나저나 야가미,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하야테의 부모님이 없다는 사실을 루시안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이제는 은퇴한 길 그레이엄이 이곳까지 올 리는 없었기에 묻는 말이었고. 그 말에 하야테는 잠시 생각하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웃으며 답했다. “샤멀이 와줄 거예요.” ‘딱하기도 한 샤멀 씨.’ 루시안은 하야테가 웃으며 하는 말을 듣고 샤멀이 측은하다 생각했다. 어쩌면 동질감일지도…. 자신처럼 늙은 사람 취급받는 그녀가…, 아니 샤멀의 경우는 애초에 프로그램이고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으니 그런 취급을 받아도 별 상관은 없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어쨌든 불쌍했다나 뭐라나. “자피라한테 부탁해볼까 생각했는데, 그래도 학교에 ‘개’를 데려오는 것은 좀 그렇잖아요?” 웃으면서 하야테가 덧붙이는 말…. 사용마, 다른 말로는 수호수라고 불리는 존재를 개 취급 하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던 것을 오늘 깨닫는 그였다. “타카마치는?” “저야 뭐, 아빠가 오실 것 같으니깐 요.” “츠키무라는?” “저는 언니가 와줄 것 같아요.” 차례대로 물어보니 마침내 한 사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루시안은 그쪽에게 물어보는 것을 패스, 그다지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아저씨, 왜 나한텐 안 물어봐요?”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던지, 인상을 찌푸리면서 아이가 적대적인 어투로 묻는 것에 루시안은 한숨을 깊게 내쉬면서 하는 말에 루시안은 가식적인 미소를 머금고 말해주었다. “너희 부모님은 꼭 나와 주셨으면 좋겠네, 한번쯤 만나 뵙고 싶었거든. 버닝스.” 따지려고 말이야, 라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만약에, 만약의 일이지만 아리사의 부모 중 한 사람이라도 학부모 참관 수업에 나오게 된다면. 루시안은 기필코 그들에게 따지리라고 생각했다. 딸 교육 좀 똑바로 시키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리사가 뒤에, 부모님은 못 오신다고 덧붙이는 말에 이를 빠득 가는 것이었고…. “…페이트, 집에 가자.” 루시안은 책상에 앉아있는 페이트와 눈을 맞춘 뒤, 힘없이 웃으면서 달래는 것이었다. 그리고 페이트가 잠시 뒤, 천천히 가방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에 느닷없는 탄성을 내뱉는 페이트의 친구들이었다. “페, 페이트가 움직였다…!” ‘그게 그렇게 신기하니?’ 자신들이 아무리 불러 봐도, 말을 걸어 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페이트가 루시안이 와서 집에 가자는 말을 하자 반응을 보이는 것이 신기했던지, 하야테가 내뱉은 말이었다. 가방을 손에 쥔 채로 일어나, 다른 손으로는 루시안의 옷자락을 꼭 붙잡곤 그의 뒤로 숨는 페이트. 마치 그 모습은,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취하는 행동과도 같았다. …특히나 나노하의, 약간은 웃음기를 머금고 있는 시선을 말이다. 루시안이 느끼기에도, 그것이 참 기묘한 웃음이었으니까. “그럼 애들아, 안녕….” 원래는 페이트가 해야하는 대사이건만, 자신이 한다는 게 조금은 어처구니없다 느껴지면서도 페이트의 친구들에게 루시안은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잘 가라는 말을 하는 친구들이었으나, 페이트는 그 잘 가라는 인사에도 대꾸조차 하지 않고 루시안의 뒤에 바짝 붙어 따라가는 것이었으니…. “…기운 차려, 페이트.” 교실에서 나온 뒤, 루시안은 아직까지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페이트에게 그만 기운차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집에서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 생각했다. 집에서는 멍하게 있는 일이 많았지만, 그래도 자신과는 얘기도 하고 집 안을 돌아다니거나 했는데. 학교에서는 완전히 살아있는 시체처럼 구는 것이니…. 착잡했다, 아직 어린 아이가 이렇게 절망해있는 것을 보니까. 역효과였다, 집무관 시험을 보게 했던 것은. 그걸 막았어야 했는데…. 하루라도 빨리 기운을 차려야 할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루시안은 한숨을 내쉰 뒤. 학교 정문 근처에 세워둔 자전거를 떠올리며 페이트를 태우고 집에 가기 위해 아이와 계단에서 걸어 내려가는 것이었다. 《18:00. 관리 외 제 97번 세계, 우미나리 시, 블레이즈 가(家).》 “며칠 동안은 집에서 쉬게 해야겠어.” 소파에 쭈그려 앉아선 혼자 코를 훌쩍이고 있는 페이트를 어깨 너머로 곁눈질 한 뒤, 루시안은 공간 투사 윈도우 건너편의 아델리에에게 말했다. 【…충격이 컸나보네.】 “아직 애잖아.” 아이의 꿈과 희망이 현실에 무참히 짓밟힌 것이다. 아무리 조숙하고 생각이 깊다곤 하지만 아직 아이니까, 처음으로 맞닥뜨린 것이나 다름없는 큰 절망에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루시안이었다. “제독의 반응은 어때?” 【아직 모르시는 것 같던데. 내가 알아서 해둘게, 할아버지 쪽은.】 집무관 시험에 떨어진 것으로 페이트가 라르고 킬에게 괜한 구박을 당할 것만 같아서 루시안이 하는 말이었고, 아델리에가 알아서 막아주겠다는 말에 고맙다는 말로 응수했다. 【오늘은 페이트랑 같이 조사나 나가려고 했는데 말이야. 다음으로 미뤄야하려나….】 “…조사?” 페이트와 함께 조사나 나가려고 했다던 아델리에의 말에 의아해져서 말꼬리를 올리는 루시안. “제독 보좌인 네가 사건 조사를 왜 나가? 그냥 현장에서 일하는 국원들한테 맡기면 될 텐데.” 【좀 큰 사건이라, 일손이 엄청 부족하거든.】 골치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며, 미간을 찌푸리곤 하는 말에 루시안은 의아해졌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데? 【…별일이네, 관리국 일에 더 이상 간섭하기 싫어하던 사람이 관리국 일에 대해서 알려들다니.】 “…페이트랑 나갈 뻔 했던 일이잖아, 무슨 일인지는 알아야지.” 게다가 큰 사건이라고 말을 한 것을 보면 상당히 위험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으니까…. 순전히 페이트가 걱정되어서 묻는 말이라고 루시안이 하는 것에 아델리에는 피식 웃음을 흘린 뒤. 한숨을 내쉬면서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 【성왕교회 쪽에서 수사를 도와달라고 요청했었어.】 “성왕교회서?” 의외였다. “…폐쇄적인 집단에서 수사협조를 요청하다니, 무슨 일인데?” 【성왕 교회의 성유물이 도난당했다던가? 그거 찾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더라니까.】 성왕 교회의 성유물이라면 성왕에 관련된 것이나 고대의 베르카에 관련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고작 그런 것 가지고 시공관리국 항공무장대 쪽에 도와달라는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할아버지도 도와주기 싫은 눈치셨는데, 우호관계를 들먹이니까 별 수 없다나봐. …하여튼, 그 정신 나간 신도 집단은 귀찮게 시리 별걸 다 도와달라고 한다니까.】 “….” 【성왕 교회에서 성유물을 관리하던 한 사제가 어떤 여자한테 눈이 멀어서, 그 여자한테 성유물을 줘버렸데.】 본인이 말해놓고도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한숨을 몰아쉬는 아델리에. 그리고 그녀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루시안 역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엔 미간을 잔뜩 찌푸린다. “…미친놈이잖아. 사제라는 놈이 여자에 눈이 멀어서 그런 짓을 하나….” 성왕교회엔 꼭 사제라고 해서 독신생활을 해야 한다거나 하는 규정이 있지는 않다. 옛날에는 그런 것이 규정 비슷하게 있었다고는 들었으나 지금은 어디까지나 관습으로 남아있을 뿐, 꼭 결혼을 하고 싶다면 못할 것도 없다 한다. 아무리 여자한테 눈이 멀었다지만 성유물을 줘버리다니. 성유물이 개인의 물품도 아닌데, 무슨 결혼 반지마냥 줘버렸다는 것만으로도 사제 실격이라 루시안은 생각했다. 애초에 성왕 교회엔 관심도 없던 루시안이 이렇게 충격을 받았는데, 그 신도들이 받을 충격은 어느 정도일까? 일반 신도들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많은 이들이 등 돌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여자가 갖고 튄 성유물을 찾는 것을 도와달란 얘기군?” 【그렇지. 근데 여자가 증발해버린 것도 아니고. 며칠 째 헛물만 켜고 있다니까.】 “그래서, 조사를 어떻게 하고 있는데?” 【그냥 찾고 있지. 일단은 공항이나, 물류보관창고 같은 곳을 찾아보고는 있는데 워낙 찾을 곳이 많아서. 나도 페이트랑 같이 오늘 가 보려고 했는데…】 페이트의 상태가 좋지 못하니까, 당분간 쉬어야겠다고 하는 말에 그러지는 못하게 되었으리라. 그러면서도 한마디 했다. “…단순한 조사인 줄만 알았다가, 질량병기 때문에 죽을 뻔하고 링커코어까지 망가졌으면서 또 조사를 나가려고 그래?” 죽을 뻔한 위기에 처했었음에도 이 일을 계속하려는 아델리에에게 루시안이 하는 말. 그 일을 계기로 자신은 완벽하게 은퇴했지만, 정작 부상을 당한 당사자는 은퇴하지 않았던 것이고…. 【뭐, 그 덕택에 AMM과 AMF의 존재가 알려진 거니까. 될 수 있으면 아픈 기억은 좋은 쪽으로 생각할래.】 “…바보냐?” 【바보 집무관만 따라다니면서 보좌하다 보니, 어느새 바보가 돼 있더라.】 바보냐고 묻는 말에 상대방이 재치 있게 답하자 루시안은 실소했다. 하지만 이내 아델리에가 심각한 표정을 하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AMF에 대한 대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어. 항공무장대 몇몇 마도사들을 상대로 AMF에 대한 대처방법을 시험해보는데, 출력을 저하시킨 AMF에도 쩔쩔매는 상황이니까.】 “…순간적인 고출력 마법으로 AMF가 발동하기 전에 파괴하거나, 살상 설정의 마법을 사용한다.” 【전(前) 마도 통괄관께서 남겨주셨던, 현재로서는 유일한 해법이지만 그걸 해낼 수 있는 녀석이 몇이나 되겠어?】 전(前) 마도 통괄관이라고 불러주는 아델리에에 루시안은 웃음을 흘린다. 【어쨌든 할아버지한테는 잘 말해둘 테니까, 빨리 기운 차리게 해 줘. 아빠잖아? 힘들 땐 가족이 가장 힘이 되어줘야 하니까.】 “쓸데없는 참견 하지 말고 너 할 일이나 잘해.” 그리고 이 말에 웃음을 흘리면서 잘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아델리에는 통신을 끊는 것이었다. “…들었지? 빨리 기운 차려.” 아델리에와의 통신이 끊어진 뒤, 루시안이 소파 위에 쭈그려 앉아있는 페이트에게 하는 말. 하지만 페이트는 슬쩍 고개를 들어서 루시안을 응시한 뒤, 다시 고개를 숙여버렸고…. “…한 번에 붙었으면서….” 원망하듯이 내뱉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13년 전 집무관 시험에서 단번에 붙었던 것 때문에 양녀에게 이렇게 미움 받게 될 줄을 그때의 자신이라고 짐작했으랴…. ‘이 정도로 좌절하면 안 되는데….’ 아직 이 아이에게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루시안은 생각했다. 그것이 확실하게 드러나려면 이런 곳에서 좌절하면 안 된다. 적절한 시기의 좌절은 후에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기가 아니다. “푹 쉬도록 해. 그리고 아직 기회는 많으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최선을 다해서,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줘야 한다 생각했다. * * * * * * 《신력 66년 5월 12일. 14:00. 관리 외 제 97번 세계, 우미나리 시, 세이쇼 대학 부속 소학교.》 철저하게 주시당하고 있었다, 수업을 하고 있는 교실의 맨 뒤에서 다른 학부모들과 나란히 선 채로 수업을 지켜볼 때 루시안은 그것을 느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을 힐끔거리면서 쳐다보고 있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외국인이라는 것에 호기심을 갖았던 것일까. 다른 학부모들이 누구의 가족이냐 묻는 말에, 페이트의 부모라고 말했더니 그들의 시선이 조금은 기묘해졌던 것이다. 그나마 자신에게 호의적인 눈빛을 보내면서 말을 건네주고 있는 이는 안면이 있는 샤멀이나 나노하의 아버지인 타카마치 시로였던 것이고…. 어찌되었든 이미 예상했었던 것이기에 루시안은 그렇게 상처를 받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페이트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웃으면서 손으로 인사를 건네 보았으나 무시당했던 것도 씁쓸했을 뿐─. “앉으세요.” “아, 예….” 그리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사가 지목하여 학부모 상담 1순위가 된 것이다. 담임교사 역시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물론 나쁜 의미로. 그러지 않고서야 직접적으로 자신을 지목하며 먼저 상담하자고 했을 리도 없을 테니. “저기… 실례되지만, 진짜로 페이트의 아버님이 맞으신가요?” 이 질문이 나올 줄 알고 있었기에, 루시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붓아버지입니다만…. 나름 사정이 있어서요.” “아. 죄송합니다, 너무 젊으신 분이 오셔서 처음엔 깜짝 놀랐거든요….” 그러면서 우스갯소리처럼 페이트의 오빠인 사람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하는 말에 루시안은 실소했다. “저…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실례지만. 무슨 일을 하시나요?” 그리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교사가 대뜸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오는 것에 루시안의 표정이 잠시 동안이었지만 멍해졌다. ‘…뭐라 말해야 하는 거지?’ 집무관? 마도 통괄관? 뜻하지 않게 엄청난 위기에 봉착하게 되자 루시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나 빨리 이런 느닷없는 질문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일단은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교사가 마시라고 자신에게 건네주엇던 음료의 마개를 따서 들이키는 것이었고…. “실례지만, 혹시 무직…이신가요?” 그녀가 아주 조심스레 물어오는 것에 루시안은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것을 그녀에게로 뿜어버릴 뻔 했었다. ‘무, 무직…?’ 아저씨라고 불리게 된 이후로 처음있는 신선한 충격. …무직, 직업이 없냐니…. 한마디로 지금 백수냐는 질문.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지금은 직업이 없긴 하지만 교사라는 사람이 엄연한 한 명의 학부모인 자신에게 이런 것을 물어보는 것에 어처구니가 없을 수밖에 없었고…. “가,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시는 건가요?” “저, 이걸 봐주시겠어요?” 그리곤 서류를 모아놓은 서류철을 뒤지더니, 미리 추려놓은 듯이 따로 빼내어져 있던 것을 내미는 교사였고. 루시안은 그녀가 제시한 그것을 훑어보았다. “…학생카드?” “예, 매년 학생에 대한 것을 기록하기위해 작성하는 건데… 이건 보다시피 페이트가 직접 작성한 거에요. 얼마 전에 말이에요.” 그러다가,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눈치 채셨나요?” 다른 항목에는 또박또박, 잘 써진 글씨가 채워져 있었다. 이름, 나이, 주소, 연락처, 가족관계, 특기사항, 장래희망 등등…. 그런데 유일하게 비어있는 것은 가족관계 항목의 한 칸. 바로 루시안 블레이즈라는 이름이 적혀진 것의 옆, 부모의 직업 항목. 아무것도 써져있지 않았다. “혹시 깜빡하고 페이트에게 물어보니까, 깜빡한 것이 아닌 것 같더라고요. 본인도 뭐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면서….” 이것 때문에 자신은 실업자, 혹은 백수 신세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혹시 블레이즈 씨께서 무직이 아니신가 해서….” “아, 아뇨…. 그게 아니라….” 그렇다고 마땅히 뭔가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이 은퇴한 몸이니까. 일했을 때 모아뒀던 돈들과 매달 오는 연금으로만 먹고 사는 것은 엄연히 말하자면 무직이나 마찬가지다. “…공무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몸담았던 직업세계를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말을 찾아내어, 루시안은 맥 빠진 웃음을 흘리면서 답하는 것이었다. “아, 공무원이셨군요….” “예.” “그런데 페이트는 왜…?” 자신의 아버지가 공무원이라면 왜 그것을 적지 않았던 것일까요? 라고 묻는 표정을 짓는 것에 루시안은 뭐라 답해야할지 막막해져서,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게…, 제가 5개월 전 은퇴를 해서 말이죠…. 은퇴한 뒤에 페이트를 입양했던 거라….” “은퇴요?” “예, 일이 많이 힘들었고… 적성에 그다지 맞지 않아서…. 어쨌든 지금은 그냥 집에 있는 것은 맞습니다만….” “그럼 생활비는…?” 계속 꼬치꼬치 캐묻는 것에 루시안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아내곤, 애써서 미소를 머금고 답한다. “일하면서 모아둔 돈과, 연금으로 충당하고 있죠.” “…그걸로 충당되나요?” 미심쩍어 하는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이, 원래 공무원의 연금의 양이 일한 기간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눈에는 스무 살의 청년이 공무원으로 일해 봤자 얼마나 일했을까 하는 생각이 깃들어 있었고…. 물론 그녀가 루시안이 일곱 살 때부터 그쪽 세계에서 일해 왔다는 것을 알 리는 없었지만. 모아둔 돈 역시 상당했고 연금도 넉넉했었기 때문에,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엔 뭐라고 써야 할까요…?” “….” 전직 공무원? ─이라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은퇴했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어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한 뒤, 조심스레 자신이 근래에 하는 일과 가장 관련이 깊은 직업을 입에 올렸으니 “…‘주부’…?” “….” 교사의 표정이 미묘하게 뒤틀린 것은 당연지사였다. 애초에 주부라는 것이 여성에 국한되는 의미가 짙은 단어인데, 물론 요즘 세상엔 여자만 집안일을 한다는 법도 없지만…. …주부라니, 루시안이 본인의 입으로 그걸 말했다는 것이 더욱 그녀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저, 정말 괜찮으시겠나요…?” “…별 상관은 없습니다만….” 주부라 쓰여도 별 상관없다 생각하는 루시안이었기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루시안이 주부라고 말한 것에, 꽤나 당황한 것처럼 펜을 한참이나 돌려대던 교사는 별 수 없다는 듯이 루시안의 직업 사항에 『주부』를 적는 것이었고…. “저… 요즘 페이트의 상태가 이상한 걸… 알고 계시나요?” ‘…잘 알고 있죠.’ 잘 알고 있었다, 마음 속으로 답한 것처럼. 그리고 교사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페이트의 최근 학교 생활. 수업의 태도라든지, 평소의 행동이라든지. 학교에서 페이트를 지켜보고있는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었고 그것은 루시안이 알고 있는 모습과 별 다를 것이 없었다. “처음엔 수업에 전혀 집중을 안 하고, 어디서 이상한 책을 구해와선 그것만 보고 있었어요.” ‘『집무관』말인가.’ 자신이 옛날에 공부할 때 썼던 책이기도 하며 잡동사니 틈바구니에서 찾아내어 페이트에게 건네주었던 것이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최근까지 그러더니, 어제부터는 애가 하루 종일 멍하니 있고….” ‘…집무관 시험을 망쳤으니까 당연한 거지만….’ “혹시나 집에서 무슨 일이 있거나 한 것은 아닌가…. 페이트가 요즘 어째서 그러는 건지, 알고 계시나요?” 물론 알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잘. 그렇다고 『집무관 시험을 망쳐서 그런 겁니다』라고 말했다간 뒷수습을 할 방법이 없으니까. 루시안은 머리를 굴리는 것이었고….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마땅한 대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루시안은 될대로 되라는 듯이, 교사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시선을 돌린 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꿈과 희망이 짓밟혔죠.” “…예?” 느닷없이 꿈과 희망이 짓밟혔다니. 이 말에 교사는 페이트의 의붓 아버지라는, 이 루시안 블레이즈라는 남자에 대해 점차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그, 그게 무슨…?” “그, 그러니까… 시험을 망쳤거든요….”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대답이어서 황급히 수습하는 말을 내뱉었다. “시험이라고 함은…?” ‘젠장, 작작 좀 물어봐!’ 계속해서 꼬치꼬치 캐물어오는 교사에 루시안은 급기야 마음 속으로 악담을 퍼부었다. 물론 이것이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다는 얘기이고 그녀가 교사에 적합한 자격을 가졌다는 것이겠지만. “페이트도 공무원이 되고 싶어 하거든요, 그걸 대비해서 여러 가지 자격증 시험을 준비했는데, 얼마 전에 그걸 망쳐버렸었나 봅니다.” 이것이야말로 교사가 납득할 수 있는 답변이었다. “그렇군요. 그래서 애가 그렇게 기운이 없었던 거군요….” 납득했나보다, 그리고 루시안은 그제야 쾌재를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럼 그럴 때야말로, 가족이 아이에게 큰 힘이 되어줘야 한다고 전 생각해요.” 그리곤 갑자기 진지한 표정과 어투로 이 말을 하는 교사에 루시안의 표정이 의외라는 듯이 변했다. “아이들은 꿈이 많은 만큼, 그것이 하나씩 사라져가는 것에 크게 절망할 수 있으니깐 요. 전 가족이라는 것이, 그럴 때에 아이에게 도움이 되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 “아버님이 페이트에게 힘이 되어주세요. 페이트도 아버님을 따르는 게 분명하니깐 요.” 루시안은 그 말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의 페이트는 자신을 따른다기 보다는 피하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부모를 싫어하는 일이 있더라도, 부모가 아이를 싫어하게 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힘들고 어려운 때, 친구들이나 동료들이 모두 등을 돌린다 하더라도 버팀목이 되어줘야만 하는 것이 가족이니까. 설령 친자식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부모가 된 이의 도리라고 루시안은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고 그제야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 * * * * * 수업이 끝난 시각은 두시였으나 학부모 상담이라든가, 그 뒤에 있는 학생 상담 때문에 페이트는 해가 거의 저물어가는 시각이 되어서야 학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자신의 담임교사인 그녀는 맨 처음의 학부모 상담 상대로 루시안을 선택했었다. 그리고 그와 무슨 얘기를 했었는지는, 자신과의 상담 도중에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었고… 그저 철저히 페이트 본인에 대한 얘기를 중점적으로 상담의 주제로 하였다. 근래에 들어서 수업에 소홀히 하는 것 같다거나, 힘이 없어 보인 다거나. 이런 것을 중점적으로 말이다. 페이트는 물론 그녀의 이런 지적에 대꾸할 힘도 없었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면서 힘없이 수긍할 뿐이었었다. “….” 자신의 차례가 가장 늦었기 때문일까, 학교 안에는 그 누구의 모습도 찾기 힘들었다. 친구들도 모두 먼저 돌아갔던 것이다. 어쩌면 그게 더 나을 지도 모르겠다며, 페이트는 고개를 조금 숙인 채로 학교의 현관에서 나와 정문을 향해 걸어가는데…. “…아빠…?” 그때, 유일하게 정문 앞에 서 있는 누군가의 기척을 발견하고, 그것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고선 중얼거리는 페이트. 자전거 위에 올라탄 채로, 정문 앞에 있는 이는 루시안이었다. 기다렸던 것일까? 한참동안이나? 아무도 없는 교내에 오로지 혼자 남아서 기다리고 있던 루시안의 모습에 페이트는 망연해졌다. 그리고 그는 자전거를 타고 페이트에게로 다가왔다. “이제 끝났어?” 말을 건네어 오는 그에, 페이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타, 집에 가야지.” 그리고 그가 자전거의 뒷좌석을 가리키면서 타라고 하는 것에 페이트는 망설였다. 될 수 있으면 그를 피하고 싶었다. 그가 싫다던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지금은 그와 접촉하는 것을 피하고 싶었으니까. 루시안도 그걸 느꼈을 것이라 페이트는 생각했다, 그는 현명하니까. 하지만 그가 자신을 향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뒤에 타라고 권하는 것에 페이트는 마저못해 그 위에 올라탔고…. 페이트가 뒤의 안장 위에 앉자 루시안은 꽉 잡으라는 말을 남기곤 페달을 밟아 자전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은 이미 집에 돌아갔는지, 하교하는 길에도 학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가끔 길을 지나가는 행인들의 모습만이 보일 뿐인 허전한 거리. “페이트.” 그리고 한참동안이나 묵묵히 페달을 밟고 있던 루시안이 부르는 말. “난 내가 집무관이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었어.” 뜬금없이 이 말을 하는 것에 페이트의 표정에 처음으로 눈에 띄는 확연한 반응이 왔다. “어머니나 주변의 사람들이 집무관이 되어보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를 해서. 타의에 의해서 집무관 시험을 봤었고 집무관이 됐었던 거야.” “….” “바보였지, 원래 애들은 꿈이 많은데 나는 아니었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모른 채 다른 사람들이 권유했던 것을 강요로 받아들이고 해버렸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권유했기에 집무관 시험을 봤었다 말하는 루시안. “그때의 난 내가 뭘 하고 싶어 하는 지도 모르는, 말 그대로 철부지 어린애였거든. 그리고 집무관이 되고 나서,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집무관 일을 해왔었어.” “….” “그 점에서 넌 나와 다른 거야.” 웃음기가 깃든 목소리로, 서로 다르다고 루시안이 말한다. “난 내가 하고 싶었던 것도 모른 채, 다른 사람들이 권한 것을 따라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넌 네 스스로가 그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잖아.” “….” “그 때의 난 형편없는 놈이었어.” 마도 통괄관이라 불리었었던 마도사이자 집무관이, 스스로가 형편없었다 말하는 것에 페이트는 멍해졌다. 자신을 달래기 위해서 억지로 꾸며내거나 한, 가식이 깃들어 있는 말이 아니었다. “한 번 떨어진 거로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마.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나처럼 뒤늦게 후회하지 않도록….” “….” “이미 지난 일이니까 잊어버려. 시험은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거지만 한번 잃어버린 꿈은 되찾을 수 없으니까.” 최고라고 불렸던, 그리고 앞으로도 최고라고 불릴 그를 동경했다. 그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노력했다. 그 누구에게도 당당하게, 자신이 루시안 블레이즈의 딸이라고 말할 수 있도록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토록 열심히 했던 것인데, 한 번의 시험을 망치고 나서는 그 동경이 질투로 변했던 것이다. 고작 한 번의 시험을 그르친 것으로 그에 대한 인식이 변해버렸다. 자신과는 정도가 다른 그의 재능을 시샘했고 질투했다, 부러웠다. 그러면서도 최고의 자리, 자신이 한없이 동경하던 그것을 스스로 걷어 차버린 그가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루시안을 피했던 것이다, 친구들과도 어쩐지 얽히고 싶지 않았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한번 잃어버린 꿈은 되찾을 수 없다』 그가 했던 이 한 마디가 마음속에 새겨져왔다. 경험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그러면 루시안 K. 블레이즈라는 이는 꿈을 잃어버렸고 되찾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것일까? 그는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자신의 유년을 보내왔다. 그런 그가 페이트를 보면서 느낀 감회는 다양했을 것이다. 루시안은 그런 페이트를 보며 결심했었던 것이다, 이 아이의 꿈을 이루어줘야겠다고. 자신처럼 꿈을 잃어버린 채, 되찾지도 못하게 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그러니까 그렇게 침울해 있지 마. 넌 아직 네 꿈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니까.” “…예….” 그리고 그가 자전거를 모는 와중에, 슬쩍 뒤로 고개를 돌려 웃으며 말하는 것에 페이트는 뚜렷한 목소리로 답하는 것이었다.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저녁, 뭘 먹고 싶어?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만들어 줄게.” 그리고 이렇게 묻는 말에 페이트는 웃으면서 답하는 것이었고. “…아무거나,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그런 대답이 제일 싫대도 그러네.” 하지만 정말로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페이트는 생각했다. 그리고 웃고 있는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나오자, 루시안의 허리를 붙잡고 그의 등에 그것을 닦아냈다. 그러면서 소녀는 생각했다, 루시안이 자신에게 베풀어주고 대해주었던 것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꼭 집무관이 되어야겠다고…. #10 AMM Type Second 《신력 66년 5월 16일. 18:00. 미드칠더 수도 크라나간 시가지》 “음, 그랬구나.” 운전석에 앉아서 차량의 운전석을 잡은 이가 조수석에 앉은 아이가 했던 말에 웃으며 맞장구를 쳐줬다. “루시안이 집무관 일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니까.” 페이트가 루시안이 해주었던 말을 이야기해줬던 것에 아델리에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집무관이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라고 했었던 말을 말이다. “루시안한테 집무관 시험을 봐보라고 강하게 권했던 사람이 우리 할아버지였던 것 같은데…. 그때는 루시안이랑은 안 친했으니까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랬을 거야.” “제독님이요?” “루시안의 어머니랑 우리 할아버지랑 아는 사이거든. 실제로 집무관으로 일할 때, 할아버지가 루시안은 좀 많이 혹사시켰지. 그땐 나도 덤으로 고생 좀 했었는데….” 하긴, 집무관 보좌였으니까. 집무관이 고생하게 되면 집무관 보좌역시 고생하게 되기 마련이라고 페이트는 조수석에 앉아 생각했다. “…영웅은 끊임없이 가시밭길을 걸어야한다나 뭐라나? 루시안에게는 안됐지만 할아버지의 명대사였지.” 그러면서 고난의 연속이었던 13년 동안의 집무관 인생이었다면서 우스개 소리를 하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아델리에 씨는… 아빠의 어머니, 할머니를 아시나요?” “응, 나도 어렸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거기에 신세지다시피 했었거든. 어렸을 때 양친을 잃었다는 말을 시원스레 하는 것에 당황한 쪽은 페이트였다. 어쩐지 물어봐선 안 될 말을 물어본 것 같아서…. “죄송해요.” “괜찮아, 부모님 일은 이미 익숙해졌거든. 어쨌든, 어렸을 때 아주머니한테 꽤나 신세 많이 졌었으니까 루시안 만큼은 아니지만 잘 알고 있지. 좋은 분이셔.” “…어째서 아빠는 제게, 할머니에 대해서 얘기해주시지 않는 거죠?” 궁금했다. 루시안의 모친에 대해서. 루시안이 말하길, 그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입양된 쪽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부친의 부모에 대한 것을 궁금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 그래서 루시안에게 자세한 것에 대해 물어봤음에도 그는 대답을 회피할 뿐이었고…. 그래서 든 생각이, 자신에게는 그다지 말해주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음… 글쎄…. 대강 왜 그러는지 짐작은 가는데….” “….” “아직은 네가 아주머니를 알게 되는 건 이르다고 생각하나?” “그래도… 혹시, 아빠는 절 입양한 것을 숨기려고…?” 물어볼 때마다 일부러 대답을 회피하는 것을 보면 이런 생각도 자주 들었다. “하하하, 그런 건 아니야. 아주머니도 이미 알고계실 테니까.” “….” “음… 네가 집무관이 되고나면. 언젠가 만날 일이 올 거야. 아마 아주머니 쪽에서 먼저 널 찾지 않을까 싶네.” 사진 속에서만 봤던 이가 자주 신경쓰였다. 루시안이 집을 비울 때엔 몰래 그의 방에 들어가선 사진을 쳐다보며, 누구일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으니까. 분명히 어디선가 본 듯한 사람인데…. 아무리 생각해본들 떠오르지 않았고 루시안이 말해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알 수가 없었던 것이고…. 집무관이 된다면 그쪽에서 자신을 먼저 찾을 거라는 말에 페이트는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델리에 씨는 운전 잘하시네요.” “몇 안 되는 장기 중 하나. 원래는 할아버지의 차지만, 할아버지가 운전하기 싫어하시게 되고 나서부터는 내가 몰게 됐어. 덕분에 라르고 킬 제독의 운전수가 되어버렸지만.” 평소의 항공 무장대 일 같았으면 이렇게 느긋하게 수다를 떨거나 할 수 있는 일이 못되었다. 훈련이라든지, 아니면 사무실에서의 업무라든지. 이런 것들로 시달리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오늘 이렇게 항공 무장대를 나와, 차를 타고 미드칠더의 수도인 크라나간의 시가지를 달리는 이유는 사건의 조사를 돕기 위해서였다. 아델리에가 말해준 바, 성왕교회의 성유물이 도난당했으므로 그것을 되찾는 데에 협조한다는 것. 물론 페이트는 성왕교회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바가 없어서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어쨌든 아델리에가 차를 갖고 가자고 했던 것에 어쩐지 소풍을 가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페이트는 크라나간을 돌아다녀 본 적 없지?” “예.” “일 때문에 힘들고 지치겠지만, 이런 기회에 창밖을 통해서라도 눈에 익혀두도록 해. 처음엔 일이 힘들지만 가면 갈수록 틈이 나곤 하니까, 그때 나가서 놀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그리곤 신호등에 걸려서 멈춰선 틈에, 창 밖의 한 음식점을 가리키면서 저 곳이 꽤나 맛있는 집이라고 말하는 그녀였다. “그런데 왜 하필 저하고…” 페이트는 차가 신호등 앞에 멈춰서, 아델리에가 운전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키지 않은 때에 말을 꺼냈다. “음, 나랑 가는 게 싫어?” “아,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잘 할 수 있을지…” 물론 그녀가 싫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항공 무장대의 일을 할 때, 아직은 미숙한 자신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이이기도 하며 루시안의 친구이자 집무관 보좌였던 이. 그리고 자신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여주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다만 조금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도사로서 싸운다거나, 혹은 사무실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은 대강 요령이 붙었다. 하지만 현장에 나가서 무언가를 조사한다거나 하는 것은 처음으로 하는 일이었다. 뭔가 실수를 해버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델리에에게 어쩐지 폐가 되어버릴 것만 같아서…. “괜찮아, 현장 조사에서 실수 같은 건.” 신호가 바뀌자 다시금 차를 움직이면서 아델리에가 웃으면서 하는 말. “모두 다 뭘 찾느라 정신이 팔려있어서, 실수를 해도 뭐라 할 만큼의 여유는 없을 거야.” “….” “집무관이 되려면 이런 것도 익숙해져야 할 걸? 미리 기회를 만들어보는 것도 좋잖아?” 물론 사건 자체를 모두 통솔하는 집무관이 직접 현장에서 조사를 한다거나 하는 경우는 거의 없겠지만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니까. 대표적으로 루시안이 은퇴하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조사도 집무관이 직접 움직인 케이스이기도 했다.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뛰어난 마도사가 한 명 쯤은 동반해줬으면 했기도 했고.” “…예?‘ “그냥 단순 조사이긴 하지만, 가끔은 재수 없으면 위험하게 되거든. 괜히 이 일이 목숨 걸고 하는 일이 아니니까. 게다가 나, 이젠 마법을 쓸 수가 없거든.” “마도사셨어요…?” “어설프긴 했지만.” 그녀가 마도사로서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처음 듣는 페이트였다. “그래도 진짜 재능이 없어서, 집무관 나리께서 직접 가르쳐주고 그랬는데도 마도사 랭크는 A밖에 안됐어. 페이트보다 못한 마도사였지. 하지만 지금은 마도사 짓거리는 접었고.” “…왜요?” “음, 링커 코어가 완전히 망가졌거든. 예전에 조사를 하다가 부상을 입어서. 그땐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죽는 줄 알았던 때를 이렇게,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것도 나름 대단하다. 어찌되었든 링커 코어가 완전히 망가져서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그녀의 말에 페이트는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육체를 움직이는 것이 심장이라고 한다면, 링커 코어는 마도사로서의 심장이나 마찬가지. 링커 코어가 완전히 망가지거나 이상이 생기게 되면 마법을 사용하는 데에 지장이 오게 된다. 심하면, 아델리에의 경우처럼 아예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수도 있었고…. “그러니까 혹시 위험에 처하게 되면, 페이트가 지켜줬으면 좋겠는데.” “…예.” “하하, 농담이니까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 그래도 마법을 못 쓰게 된 다음부터는, 나름의 방법이 생겼으니까.” 마법이라는 힘이 사라지고 난 뒤, 기계라는 힘에 의존하게 되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저… 어쩌다가 링커 코어가…?” 궁금했던 것인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어 묻는 페이트. 그리고 아델리에는 잠시 뒤에 말했다. “AMM.” 『AMM』. 페이트로서는 생소한 말이었다. “안티-마기 머신(Anti-Magi Machine). 대(對) 마도사 질량병기의 이름이야. 마력의 결합을 흩어버려서 마법을 무효화시키는 AMF라는 기술이 탑재되어 있는, 마도사를 사냥하기 위한 질량병기지. 그거에 당했거든.” 『마도사를 사냥하기 위한 질량병기』. 이 대목에서 페이트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마력의 결합이 흩어져버린다면 대부분의 마법은 무효화된다. 그리고 마법이 무효화가 된 마도사는 보통의 인간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공격당하여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링커 코어가 망가졌다는 얘기였다. 페이트는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그 대 마도사용 질량병기와 마주치게 된다면?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마도사는 보통의 인간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자신 역시 보통의 여자아이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릴 것이다. 마도사로서 여러 가지 일을 겪어왔었지만, 링커 코어가 망가지거나 하는 일은 결코 생각하지도 못했던 페이트였다. 하지만 아델리에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을 처음으로 생각해보았다. 링커 코어의 죽음은 마도사로서의 삶을 끝마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누구나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런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미치는 것이었고…. * * * * * * 《18:40. 미드칠더 수도 크라나간 제 16 물류보관창고》 뭘 찾아야하는 것인지 막막했다. 적어도 페이트는 자신의 주변에 펼쳐진 진풍경에 그렇게 생각했다. 너무나 많은 물품들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된 이곳, 제 16 물류보관창고. 물류보관창고는 크라나간 내에 수십 개가 있으며 그것들은 보관하고 있는 물품의 분류에 따라 번호가 매겨진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페이트가 있는 제 16 물류보관창고의 경우는 의류나 섬유 따위가 유통되기 전에 거치고 보관되는 곳이었다. 주변에 있는 수많은 컨테이너에는 온갖 의류나 섬유들이 들어있는 셈이었다. 이 곳에 도착하여서 현장의 수사를 담당하고 있는 수사관에게 아델리에게 말을 걸었고, 그가 말하길 사라진 성유물의 특성상 의류나 섬유 쪽에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는 것에 이곳에 오게 되었다. “…넓기도 하지, 이런 곳이 지하로 20층까지 있다니….” 앞날이 막막하다는 한숨을 내뱉는 아델리에. 실제로도 여기저기에 많은 국원들이 컨테이너들을 하나씩 열어서, 직접적으로 살펴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졸지에 옷장 뒤지는 것처럼 되 버렸네, 어쨌든 해보자.” 아델리에는 그러면서 수사관에게서 건네받은 카드 키를 들고 컨테이너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컨테이너가 열리고 드러나는 내용물은 수십, 수백, 수천 벌의 옷가지들이었다. 주로 분류를 해보자면 남성 의류 쪽이라고나 할까. “이거 꽤나 유명한 브랜드 옷인데….” 안으로 들어가서 직접 뒤지고 있던 아델리에가 하는 말에도 페이트는 크라나간 쪽의 생활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다. “뭘 찾으면 되는 건가요?” “으음… 엄청나게 낡아빠진 천 조각.” 멋들어지고 화려한 옷들 틈에서 낡아빠진 천 조각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우습게 느껴지는 페이트였다. “딱 봐서 느낌이 올 거야. 고대 베르카의 마지막 성왕의 성해포라나 뭐라나? 우스운 노릇이지. 옛날에 죽은 사람이 걸친 낡아빠진 천 조각을 성스러운 물건이라고 숭배하는 꼴이라니….” 성왕 교회. 자세히는 모르지만, 페이트는 그것을 들어본 적은 있었다. 고대 베르카의 성왕들을 숭배하는 종교집단. 성왕(聖王)─모든 이들을 인도하는 신의 사자. ─라는 것이 성왕 교회의 성왕에 대한 말이었다. 물론 그것을 받아 들이냐 마느냐는 개인차이지만. 그 성왕들이 이끌었다고 하는 옛 베르카. 옛 미드칠더와 전쟁 시, 질량병기의 남용으로 인해 멸망하여 지금은 존재치 않지만 그들의 흔적은 아직도 여기저기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현재의 미드칠더에도 상당한 영향을 줬다. 고대 베르카, 마지막 성왕이 입은 성해포.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던 그녀가 입은 그것이 사라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된다는 게 영 내기치는 않는 아델리에였다. 아주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이 남긴 물품 따위가 무엇이기에 『현재』의 살아있는 이들에게 이리도 영향을 미치는가? 그들의 시신은 썩어서 한 줌의 흙이 되었건만. 그녀에게 있어서 성왕 교회의 이런 모습은 『현실』을 외면하고 『과거』의 영광만을 바라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델리에 씨?” 그때, 아델리에가 멍하니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에 페이트가 이상하게 여겨서 부르는 말이었고. 그것에 정신을 차리고 아무 것도 아니라 답한 뒤 컨테이너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옛 미드칠더와 베르카는 대립하던 세력이었다. 그런데 그 베르카가 멸망하여 사라진 후. 베르카를 멸망시킨 것이나 마찬가지인 미드칠더가 성왕의 성유물을 찾는데 협조한다니…. ‘…우스운 일이야.’ 찾던 것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페이트와 함께 컨테이너 안을 뒤지던 걸 그만두고 아델리에는 그 컨테이너를 닫았다. “어떻게 생각해, 페이트?” “예?” 이 아이는 어떻게 생각할까? 「과거」를 위해 「현재」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말이다. 「과거」는 「현재」를 위한 지침일 뿐. 『꼬리를 위하여 머리가 움직여대는 꼴이다.』 이것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성왕교회의 요청에 의해 마도 통괄관이 성왕교회 쪽과 얽혀서 어쩔 수 없이 협력하게 되었던 때. 수사와 조사의 방침을 두고 의견이 엇갈리게 되자 성왕교회 측의 한 기사에게 정면에 대고 내뱉었던 독설이었다. 때문에 젊은 집무관, 마도 통괄관은 성왕교회로부터의 항의를 받았지만…. 그래서 더더욱 궁금했다. 마도 통괄관이 입양한 아이. 이 아이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하고…. 그리고 아델리에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페이트에게 물어보려고 할 때 그들이 있는 구역에 큰 폭음이 들려오며 폭발이 공간을 휩쓸었다. 다른 층으로부터 들려온 폭음과 진동이 아니었다. 그들이 있는 층에서 무언가가 폭발을 일으킨 것이었다. “무슨 일이지…?!” 저 쪽에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불꽃이 폭발하는 것에 미간을 구기는 아델리에.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의 뒤에 물러나 있으라는 듯이 페이트의 앞에 서는 것이었고…. 마법도 쓰지 못하는 몸, 게다가 마도사로서의 재능도 자신보다 한참 위인 아이를 보호하려는 듯이 나서는 게 우스웠지만 그것은 본능적으로 취한 행동. 폭발의 소리와 진동을 느낀, 같은 층에서 조사를 하고 있던 국원들이 그 주변으로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뭐가 폭발한 거야?!” “빨리 불부터 꺼! 다 번지겠어!” 옷가지나 섬유를 보관하는 곳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쉽사리 타기 마련이니까, 잘못하면 큰 화재로 번질 수도 있었기에 나온 말. 지금은 아니지만 집무관 보좌로서 일할 때, 위험에 마주서게 될 때마다 들었던 섬뜩한 예감이 아델리에를 스쳐지나갔고. 현실이 되었다. “크악!”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 퍼진다. 비명을 지른 것은 불을 향해 소화기를 뿌리려던 한 국원. 가슴 한복판에 무언가에 꿰뚫린 구멍이 난 채로, 그가 피를 뿜으면서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곤 쓰러진 것이다.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단말마의 비명만을 남기고 죽임당한 동료의 모습에 망연자실해하는 국원들. 불꽃 속에서 푸른빛의 광선이 뿜어져 나왔고, 이어서 또 다른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끼이이이익─ 그때, 타오르는 불꽃의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것은 자동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을 때 도로에 스퀴즈 마크를 남기는 기이한 소리. 불꽃의 저 너머에 시커먼 형상이 확연히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요란한 바퀴소리는 그것으로부터 들려오고 있었고 푸른 광선 역시 그것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것이었다. 그것이 불꽃을 빠르게 빠져나와 조명 아래에 모습을 드러냈다. “…모터사이클…?” 창고 내부의 조명에 모습을 드러낸 그것을 보며 한 국원이 작게 중얼거린 말. 실제로 그 기기의 외형은 모터사이클과 같았다. 전후(前後)에 한 개씩 하여, 두 개의 바퀴를 가진 채 그것을 통해 움직이는. 그러면서도 탑승자를 태우기 위한 자리나 핸들 따위는 일절 없었다. 게다가 크기는 어지간한 자동차에 맞먹으면서 무겁고 두터운 장갑을 두른 육중한 외형의 그것. 그리고 보통의 모터사이클이라면 라이트가 달려있어야 할 전방엔 카메라의 렌즈를 떠올리는 것이 부착되어 있었고… 그 기계의 전방에 푸른빛이 수렴해갔다. “모두 피해!” 아델리에가 그 모습을 살펴보곤 비명을 지르듯이 국원들에게 외친다. 하지만 그 외침이 채 닫기도 전에, 기계의 전방에 맺혀가던 푸른빛이 광선이 되어 뿜어져 다른 국원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제기랄, 질량병기냐?!” “없애버려!” “부서 버리겠어!” 눈앞에서 동료들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살해당하는 것을 본 분노가 치민 것일까? 살아남은 이들이 분노를 표하면서, 보급형 스토레이지 디바이스를 꺼내어 질량병기에게 겨누었다. 질량병기는 단 하나. 그것에 비하면 스무 명을 조금 넘는 마도사들의 수는 압도적이다. 그들이 일제히 사격 마법을 퍼붓는다면 모터사이클 형태의 질량병기가 아니라, 장갑차가 온다 하더라도 너덜너덜하게 된다. 하지만, 하지만 저 모터사이클의 형태를 띤 질량병기가 『자신이 알고 있는 질량병기』라면? “안 돼!” 그만 두라고, 그리고 도망치라는 말을 단 한마디에 담아 외쳤다. 하지만 그 외침은 속절없이 마도사들의 사격 마법이 질량병기에게 쏟아졌고… 각각 다른 마력광을 띤 사격 마법의 빛줄기들이 질량병기에게 쏟아졌다. 회피기동은 없었다. 그리고 보통의 모터사이클이라면 사람이 탑승할만한 부분에서 발전기의 형태를 띤 기기가 튀어나온다. 그것을 보며 아델리에는 확신했다, 저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후에 어떻게 될 지도…. 질량병기의 내부에서 튀어나온 원통형 발전기의 형태를 띤 것으로부터 흐릿한 파장이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원래는 질량병기를 향해 쏟아진 사격 마법의 탄막이 그 파장에 닿자마자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뭐, 뭐야!” “마법이 사라졌어?!” 그것을 보며 놀라는 마도사들. 그들은 앞에 펼쳐진 광경에 넋을 놓으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다시금 사격 마법을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마력의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법의 사용이 원활하지 않은 것에 경악했고…. 질량병기는 그런 그들의 모습엔 아랑곳하지 않으며, 이번엔 자신의 차례라는 듯이 다시금 광선을 모아 마도사들에게 내뿜었다. 마력의 결합이 되지 않는 것 때문에 방어 마법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너무나 놀랬기 때문에 피하려는 생각을 한 이도 없었다. “AMM…” AMF를 보고 확신하게 된 그것의 이름을 아델리에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 질량병기는 그녀가 알고 있는 AMM의 모습과는 달랐다. 루시안과 더불어 AMM과 직접 접촉했던 유일한 인물인 아델리에.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AMM의 외형은 원통 형태를 띤 질량병기였는데…. 이동방식 역시 달랐다. 그녀가 처음으로 접촉했던 AMM은 허공에 부유하는 이동 방식을 취했으나 저것의 경우엔 두 개의 바퀴로 움직이는, 모터사이클 자체인 이동 방식을 갖고 있다. 게다가 광선의 발사나 AMF 파장의 발동 속도 역시 원통형의 것보다 빨랐다. AMF를 보통의 마도사들이 공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그들은 AMF라는 것의 존재에 대해서도 몰랐으니까, 도망치지 않고 사격 마법으로 응수한 시점부터 그들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었던 셈. 스무 명에 가까운 마도사들이 순식간에, 너무나도 허망하게 살해되었다. 단 한 대의 기계, 질량병기 AMM에 의해서. “빨리 지원을 요청해야…” 상대할 수 없다. 기존의 프로토 타입과는 한참이나 차이나는 성능에 아델리에는 페이트를 데리고 여기를 빠져나가기 위해 고개를 돌렸고. 새하얀 망토, 그리고 감색의 배리어 재킷을 입고선 한 손에는 디바이스를 들고있는 페이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페이트…?!” “제가, 저걸 부수겠어요.” 이 아이가 저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아델리에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리고 그런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페이트는 아델리에의 앞에 나서서 바르디슈를 AMM에게 겨누었고 “플라즈마 랜서(Plasma Lancer)…” 페이트의 좌우에 각각 네 개 씩, 총 여덟 개의 뇌전이 형성되었다. “파이어!” 그리고 질량병기가 아직 자신들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을 때, 바르디슈를 그것에게 겨누곤 발사시키는 페이트. 여덟 발의 플라즈마 랜서가 기계에게 쏘아진다. 정확히 질량병기의 전방을 노리고 발사된 여덟 발의 플라즈마 랜서. 아주 빠른 순간동안 고속 직사형의 사격마법을 발동시키는 페이트의 재능에 아델리에는 내심 감탄했다. “…!”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향해 쏘아진 마법을 눈치 챘던지, 육중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빠른 기동으로 제자리에서 한 바퀴 턴 하는 것이었고 절묘한 제자리 회전에 전방을 노리고 발사된 플라즈마 랜서는 측면의 두터운 장갑에 부딪칠 수 밖에 없었다. 장갑 자체가 워낙 두터운 탓이고, 살상 설정의 마법도 아니었기에 약간 찌그러지는 정도의 타격밖에 주지 못한 플라즈마 랜서. 그리고 질량병기, AMM의 센서가 페이트를 향해졌다. ‘인식했어.’ 센서의 렌즈가 움직이는 것을 포착하곤 생각하는 페이트. 이어서 AMM의 전방으로 푸른빛이 모여가고, 공격 준비를 하는 것에 “실드!” 뒤에서 아델리에가 외치는 것이었고, 그 말이 무엇인지 이해한 페이트는 재빨리 실드를 쳤다. 다행히도 타이밍이 늦지 않았던 덕에 발사된 광선은 실드에 부딪쳐 팅겨나가 애꿎은 컨테이너를 박살내었다. “AMM의 공격은 배리어로 막는 것보다는 실드로 막는 게 효과적이야! 배리어로 막아도 타격은 누적되니까, 될 수 있으면 실드로 방어해!” “…예!” 경험자로서 해줄 수 있는 충고였다. 하지만 아델리에는 불안했다. 이전의 AMM 프로토 타입과는 다른, 처음 보는 형태의 것이다. 게다가 아까 페이트가 처음으로 시도했던 공격을 재치 있게 흘려보내는 인공지능마저도 가지고 있었다. 육중한 장갑에 어울리지 않는 기동성, 두터운 방어, 짧은 시간동안 행해지는 공격. 과연 이 아이가 저 AMM을 이길 수 있을까? 인조 마도사라 하여 재능이 있다는 사실은 루시안이 아주 예전에 말해주었었다. 하지만 저 질량병기, AMM이 위험한 까닭은 AMF라는 마법을 무효화시키는 기술이 탑재되어있기 때문. 현재로서는 S랭크의 마도사조차도 상대하는 데에 쩔쩔매는 것이 AMF기술이 탑재된 AMM. 이대로 자신은 따로 빠져나가서 지원을 요청할까? 인식을 당한 현재로서는 페이트와 함께 도망친다 하더라도 빠른 기동성을 가진 저것이 따라올 것이다. 그래서 자신만 따로 빠져나가서 지원을 요청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안 돼. 아직 페이트는 AMM에 대한 지식이 없어…!’ 페이트는 AMM과 AMF의 기능에 대해 알지 못한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자신이 페이트를 직접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적어도 현재로서 파악할 수 있는 약점이라도 알려줘서 도와줘야한다 그녀는 생각하는 것이었고…. 【Blitz Rush】 바르디슈로부터 블리츠 러시의 사용을 알리는 트리거 보이스가 흘러나온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지는 페이트의 신형. 모습이 갑자기 사라져서 깜짝 놀랐던 아델리에는 페이트의 모습이 AMM의 위쪽에서 나타나는 것을 발견했다. 위쪽에서 습격하는 형태로, 하켄 폼 상태의 바르디슈를 AMM에게 내리꽂는 페이트. 그리고 AMM의 내부에서 외부로 나오는 AMF 발생장치. “AMF야, 도망쳐 페이트!” 하켄 폼 상태의 바르디슈로 마력 참격을 시도하는 페이트였으나 그것에 AMM이 AMF로 대응하자 아델리에는 외쳤다. 그리고 그 외침과 동시에 바르디슈로부터 하켄이 사라지고 바르디슈 자체로 후려치는 꼴이 되어버렸다. 다행히도 아델리에가 말해줬던 까닭에 AMM이 회전 기동을 하기 전, 재빨리 빠져나와 컨테이너의 뒤로 숨는데 성공했으나 크게 당황했다. ‘…마력이 흩어졌어…!’ 처음 겪는 상황이었다. 저것이 바로 AMF? 차 안에서 아델리에가 해줬던 말을 떠올리며 페이트는 깜짝 놀란 마음은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괜찮아!?” 그리고 아델리에가 컨테이너 뒤에 숨어있는 자신에게 다가와서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여 답한다. “저게… AMF인건가요?” “…그래. 발동되면 일단 효과범위 내의 거의 모든 마법은 무효화되는 거나 마찬가지야.” 물론 효과범위에도 바깥쪽에 위치한 마법은 무효화가 아니라 약화되는 수준이지만. 마법을 적중시키려면 효과범위를 거쳐야하기 때문에 무효화되는 것이다. “…일단 다른 데로 몸을 숨기자, 될 수 있으면 불이랑 가까운 쪽으로.” “불쪽으로요?” “응, AMM은 적외선 탐지기능이 있어서, 불이랑 가까운 쪽으로 가면 그것을 무력화시킬 수 있어. 마법으로 움직이지는 마, 마력의 흐름도 감지할 수 있는 것들이라.” 그것은 라르고 킬의 보좌로 일하면서, 그녀가 현재의 AMM의 데이터를 끊임없는 연구한 끝에 파악해낸 것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컨테이너 사이를 걸어서, AMM의 시야를 피해 불이 붙은 쪽의 컨테이너 뒤에 숨는 페이트와 아델리에. “잘 들어, 페이트. 인식 당해버린 이상 싸우는 수밖에 없어. 둘 다 밖으로 빠져나가려 했다간 저것의 속도에 따라잡힐 거고, 그렇다고 너 혼자 놔두고 밖으로 나가기엔 넌 AMM에 대해서 몰라.” “….” “AMM의 확실한 공략 방법은 두 가지야. 첫째, 살상 설정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 둘째, 순간적으로 고출력의 마법을 사용해서 AMF를 발동시키기 전에 파괴하는 것. 이 중에서 할 수 있는 게 있어?” 실제로 그러했으니까, 혹시나 이 아이가 이 중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하여 묻는 아델리에. 하지만 페이트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살상 설정의 마법을 사용해본 적이 없어서,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고출력의 마법이 있긴 하지만 그것들을 빠른 순간에 사용하는 것은 무리이고…. 거의 대부분의 것들이 사용에 시간이 걸리는 것들이니까. “…그렇다면 AMF의 발동 시간까지의 틈을 노리는 수밖에 없겠네.” 살상 설정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어쨌든 아델리에는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페이트의 움직임을 보았을 때, 스피드 쪽으로는 충분한 것 같았으니까. “AMF 발생장치가 튀어나오고 완벽히 발동될 때까지는 짧지만 약간의 텀(Term)이 있어, 1~2초 정도. 그 짧은 시간동안 센서부분을 파괴해. 마력변환 능력이 전기 쪽이지?” “예.” “그럼 센서부분을 파괴하고 나서, AMF가 발동하기 전에 안에다가 디바이스를 꽂고 전류를 흘려보내버려. 그러면 파괴까지는 아니더라도 맛이 갈 테니까, 그 틈에 마법으로 부수는 거야.”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센서를 파괴하고 마력변환을 통해 디바이스 쪽으로 전류를 흘려보내더라도 파괴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살상 설정의 마법이 아닌 이상에 확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살상 설정의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고출력의 마법을 순식간에 사용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딱 한 명밖에 성공하지 못했던 이 방법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아델리에는 페이트를 믿어보기로 했다. ‘써야할 지도 모르겠는데….’ 그리고 페이트가 숨어있던 것을 그만두고 나가자 아델리에는 자신의 안주머니에 잠들어있는 것들을 매만지면서 생각하는 것이었고…. * * * * * * 페이트는 비행마법을 사용한 채였다. 창고 내부의 천장이 아주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비행은 유지할 수 있었고, 컨테이너 박스들 사이를 움직이며 모습을 찾으려하는 모터사이클 형태의 질량병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페이트는 한 가지를 파악했다. 모터사이클의 형태를 한 AMM에게는 대공 능력이 없다. 따라서 하늘 쪽으로 행할 수 있는 공격으은 단순한 광선을 통한 공격밖에 없다는 것이 된다. 육중한 동체를 이용한 돌진 역시 행할 수 없을 것이고…. ‘…일단은….’ 시험 삼아서 포톤 랜서 한 발을 생성, 발사시켰다. 그리고 단발의 포톤 랜서가 충돌하기 전에, 다시금 AMF가 발동되는 것이었고 포톤 랜서는 목표에 닿기도 전에 사라졌다. 페이트는 약간의 시간차를 잡아낼 수 있었다. AMF장치가 기동되면서 빛을 발할 때와, 그것으로부터 흐릿한 파동이 뿜어질 때까지의 짧은 시간차를. 2초 남짓. 하지만 과연 그 2초 남짓의 시간동안 접근할 수 있을까? ‘…소닉 폼을 쓴다면….’ 확실히 방어가 얇아지긴 해도 소닉 폼을 사용하면 속도를 비약적으로 상승시킬 수 있다. 하지만 지형의 특성상, 컨테이너 박스가 상당수 있기 때문에 직선적인 움직임에는 제약이 따르고…. 이동계 마법을 써서, 컨테이너 박스들을 그대로 통과한다면 직선적 거리고 달려들 수 있다. 자신이 쓸 수 있는 단 하나의 이동계 마법인 썬더러(Thunderer). 자신이 만들어낸 마법이 아닌, 양부인 루시안 블레이즈가 페이트에게 적합하게 맞춰서 전수해준 그의 마법. 하지만 그것을 소닉 폼 상태에서 사용해본 적이 없었기에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페이트는 망설이는 것이었고…. ‘…어쩔 수 없어.’ 딱히 방법이 없는 이상 해봐야한다. “바르디슈, 소닉 폼.” 【Sonic Form】 겉에 걸치고 있던 하얀 망토 형태의 배리어 재킷이 사라진다. ‘그러고 보니, 이 배리어 재킷을 입고 나선 소닉 폼은 처음이구나….’ 예전에 루시안이 직접 바르디슈를 들고 마리엘에게 찾아가, 배리어 재킷의 형태를 바꿨던 적이 있었다. 루시안이 말하길 자신의 배리어 재킷과 비슷하게 바꿔봤다고 했던가? 겉모습은 바뀌었지만 소닉 폼 상태가 되고, 소닉 폼 상태에서만 발동되는 이동 보조마법인 소닉 세일(Sonic Sail)이 생겨나자 페이트는 바르디슈를 AMM에게 겨누었다. 그리고 다수의 포톤 랜서들을 만들어내어. 기관총이 연사되듯이 빠르게 하나씩 AMM에게 쏘아보내는 페이트. ‘틈을 만들어야 해.’ 움직이게 만들어놓아선 안 된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AMF기능을 사용하게 만들어 제자리에 붙잡아두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이었고 기계는 기계답게 고정된 패턴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었다. 포톤 랜서들이 쏟아지자 그 자리에 멈춰선 채로 AMF를 발동시키며 포톤 랜서들을 무효화시키자 페이트는 계속해서 포톤 랜서들을 만들어내며 그것을 쏘아 보내는 것이었고…. 그리고 포톤 랜서를 열 네발 째 발사시켰을 때, 페이트는 포톤 랜서가 아닌 여덟 개의 플라즈마 랜서를 만들어내어 일제히 발사시켰다. ‘…이때야!’ 맹렬히 쏟아지는 플라즈마 랜서에 멈춰선 채로 AMF를 발동시키는 AMM. “바르디슈, 썬더러!” 【Thunderer!】 다섯 발의 플라즈마 랜서가 AMF의 효과영역에 마저 들어가기 전에 소닉 폼 상태에서의 썬더러를 발동시키고 움직였다. 움직이는 동안 하켄 폼으로 스스로가 전환을 마치는 바르디슈. 직선 거리상에는 컨테이너 몇 개가 있음에도 이동계 마법의 특성을 이용해, 그것을 그대로 통과하여 멈춰선 AMM에게로 달려들었다. 플라즈마 랜서는 사라져있었다, 그리고 AMF 발생 장치로부터 뿜어져나오던 파장은 그쳐있었다. 계산대로였다. 여덟 발이나 되는 플라즈마 랜서의 마력 수치에 덮여져서, 소닉 폼 상태에서 사용한 썬더러의 마력 수치는 감지하지 못했던 것. 플라즈마 랜서는 단번에 마력을 끌어모아 사용하는 것이고 썬더러는 지속적으로 마력을 깎아먹는 이동계 마법이니까. 계속 유지하게 되면 썬더러의 마력이 더욱 많이 소모되지만 짧은 순간이라면 플라즈마 랜서의 마력이 더 많이 소모되므로, 썬더러의 마력 수치는 플라즈마 랜서에 묻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계는 자동적으로 AMF 기동을 잠시 동안 멈추게 된다. 그 틈을 노려서, 페이트는 썬더러를 유지시킨 채로 접근해 바르디슈의 하켄을 AMM의 센서를 향해 휘두르는 것이었고─ 마력으로 형성된 바르디슈의 하켄이 AMM의 전방에 부착된 센서를 꿰뚫었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켄은 정확히 질량병기의 센서를 꿰뚫고 들어갔다. 하켄 폼의 특성상 마력으로 형성되었긴 하지만 뇌전에 가까운 것이다. 비록 살상 설정의 것은 아니지만 기계를 망가뜨리기에는 충분하다 페이트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페이트가 이런 생각을 할 때, AMM이 발작을 일으키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 하켄 폼의 바르디슈가 센서에 꽂힌 채로, 상처 입은 짐승이 난동을 부리듯이 AMM은 그 자리에서 마구 회전해댔다. 갑작스러운 그 반응에 당황한 것은 페이트. 센서에 꽂힌 바르디슈를 빼내고 그것으로부터 떨어지려고 했지만 기계가 워낙 움직여대는 통에 그러질 못했고…. 꽂혀있는 바르디슈를 빼내지 못하고, 손으로 계속 쥐고 있었기 때문에 페이트는 허공에서 마구 흔들리는 꼴이 되었다. 마치 성난 황소의 등에 탄 사람처럼 이리저리 뒤흔들리다가 회전하는 바퀴에 채여서 컨테이너 쪽으로 내던져진다. 내던져져서 컨테이너에 부딪치자 그 충격을 온몸으로 느끼며 고통에 찬 비명을 내뱉는 페이트. “페이트!” 그리고 AMM은 성난 황소처럼 페이트에게 달려들었다. 【Defenser】 거대한 기계가 엄청난 속도로 돌격해오는 것을 보고 내던져진 페이트는 황급히 방어마법을 전개하여 막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방어마법을 펼쳤음에도 튕겨져 나가는 페이트의 작은 몸. 원래 페이트는 막는 것에는 능하지 않다. 방어를 택하기 보다는 빠른 속도를 통한 회피를 택하기 때문에 페이트의 방어마법은 강도가 약할 수 밖에 없다. 그랬기 때문에, 디펜서를 사용했음에도 내동댕이쳐진 것이었고… 난동을 부리던 AMM에 의해 내던져진 페이트의 모습에 아델리에는 경악했다. ‘기동을 멈추지 않았어…!’ AMM의 동체 중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은 바로 센서 부분이다. 다른 부분의 장갑들에 비해 강도가 약하고, 곧장 내부로 이어져있는 곳이기에. ‘…역시, 살상 설정이 아니면 안 되는 건가….’ 비 살상 설정의 마법은 역시나 파괴력이 부족하다. 만약 페이트가 아까 해내었던 공격이 살상 설정의 마법이었다면 센서 부분에 마력의 참격이 꽂히는 즉시 AMM의 내부를 태워 기동을 멈췄을 것이고…. 아직은 무리였던 것이다, 저 아이에겐. 아직 마땅한 공략방법이 없어, S랭크의 마도사도 힘겹게 파괴하는 것을 상대로 이 정도까지 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긴 하지만 지금은 실제 상황이다. 훈련이 아니다. 찰나의 틈을 노려서 센서를 파괴시킨 뒤, 그것을 통해 내부를 헤집어놓는다는 것은 말이 쉬운 것이었다. 그것이 그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저것의 공략에 애먹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저 AMM은 관리국 측의 통제를 받아 연습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마도사들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고…. “으윽….” 고통에 찬 신음을 내면서 컨테이너로 내던져진 페이트는 바르디슈를 지지대 삼아 일어서려 했다. 소닉 폼 상태에서의 단점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배리어 재킷, 장갑의 강도가 너무나도 약해진다. 배리어 재킷을 부분 해제함으로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지만, 그만큼이나 방어가 감소하는 것. ‘…안 돼, 이대로라면….’ 고통을 느낌과 동시에 자신의 미숙함을 느꼈다. 살상 설정의 마법을 사용할 만큼 능숙하지 못한 자신의 미숙함을. 만약 자신이 살상 설정의 마법을 사용하는데 능숙했더라면 아까의 공격으로 저것을 부쉈을 것을…. 센서를 파괴하는데 성공했으나, 그것의 기능이 완전히 다한 것은 아니다. 그 증거로, 센서 부분이 부서진 AMM은 비틀거리는 움직임으로나마. 자신을 향해 기수를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시각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전방의 센서 부분이 공격을 당한 탓인지, 주요 공격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광선 공격 기능은 사용할 수 없는 듯 했으나 기수를 페이트 쪽으로 향한 채 제자리에 선 채로 바퀴를 요란하게 굴려댔다. 타이어가 창고의 바닥과 마찰로 인하여 요란한 소리와 고무가 타는 냄새를 풍긴다. 소형 차량의 크기에 맞먹는다. 게다가 동체 자체가 두터운 장갑으로 덮여있어, 무게 역시 상당하다. 또 부딪친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 방어 마법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아까처럼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날아가 내던져질 것이니까. ‘피해야 해…’ 목의 건너편으로 비릿한 철분의 향이 풍겨오는 것을 느끼면서, 페이트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선다. 몸 안의 어딘가에 큰 타격을 입은 듯 했다. 비행 마법을 발동시켜 피하려 하는 순간, 목 안으로부터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왔다. 그리고 피를 조금 토했다. 그와 동시에 발동되려면 비행 마법이 취소되었다. 그와 동시에 다시 달리는 AMM. 컨테이너를 등지고 있는 페이트를 그대로 들이받을 것처럼 육중한 동체의 그것이 움직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자신을 향해, 전방에서 돌진해오는 그것을 바라보며 페이트는 피해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몸이 비명을 지르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탓에 그러질 못했다. 죽는 걸까? 페이트는 이런 생각이 들자 두려웠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소녀의 몸을 엄습했고 모든 움직임을 봉쇄해갔고…. 그 순간 떠오르는 것은 자신을 ‘만들어 주었던’ 어머니도, 함께 해주었던 친구들도, 늘 자신을 도와주었던 사용마인 알프도 아니었다. 친자식이 아닌 자신을 극진히 돌봐주고 헌신적으로 대해주는 이, 그 누구보다도 아껴주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동경하는 사람이었다. 그였다면, 루시안이었다면 이 상황에 어떻게 했을까…. 페이트는 돌진해오는 AMM을 흐릿한 눈으로 응시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었고….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꼈을 때, 그리고 AMM의 육중한 동체가 아이의 작은 몸을 치어버리려고 하기 전의 찰나의 순간─ “페이트!” 황급히 뛰어온 아델리에가 몸을 날려, 페이트의 몸을 감쌌고 그녀가 타이밍 좋게 뛰어든 탓에 페이트를 향해 달려오던 AMM은 페이트가 아닌 애꿎은 컨테이너의 벽에 부딪쳐 그것을 부숴놓았다. 컨테이너의 벽을 완전히 산산조각 내놓곤 그 안에 처박혀 넘어지는 AMM. “페이트, 괜찮아?! 정신 차려!” 하마터면 이 아이가 죽을 뻔했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자신 역시 죽을 뻔 했다. 아델리에는 페이트를 감싸 안은 채 몸을 날려 AMM의 돌진을 절묘하게 피해내었던 것이다. 페이트를 안은 채로 아델리에는 아이의 상태를 살핀다. ‘피…’ 기침을 해대는 소녀의 입에선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예 의식을 잃거나 한 것은 아닌지, 붉은 빛의 눈동자는 흐려지거나 하지 않았었다. 부상을 입긴 했지만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치명적인 것은 아닌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아델리에는 이를 갈았다. “아델리에 씨….” “…괜찮아. 아직은….” 『아직은….』 이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AMM이 벽을 부수고 안에 처박힌 컨테이너의 안에서 그것의 요란한 기동음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아마 처박혀 넘어지거나 해서, 일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거겠지. 그리고 아델리에는 페이트를 벽에 기대게 한 뒤, 아이에게 말했다. “…못 본 걸로 해줘.” 무엇을 말인가? 고통에 겨워하면서도, 페이트는 아델리에가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에게 이 말을 하는 것에 의아해했다. 하지만 그녀가 품속에서 꺼내든 것을 보고 그 말을 대강 이해할 수 있었다. 아델리에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작은 원통형을 띤 물체. 안전핀으로 보이는 것이 꽂혀있는, 관리 외 제 97번 세계의 영상매체를 통해서나 자주 접했던 물건이었다. “…수류탄…?” 엄연히 질량병기의 근절을 목표로 하는 집단에 속해있건만, 저런 것을 어디서 구했단 말인가? “마법을 쓸 수 없으니까, 이런 걸 선택할 수 밖에 없더라고….” 자조적인 웃음을 머금고, 아델리에는 왼손에는 수류탄을 쥔 채. 그리고 안주머니에 넣은 오른손에는 권총으로 보이는 것이 들려나왔고 페이트를 향해 힘없이 웃어보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진즉에 쓰는 거였는데….” 시공관리국이라는 집단은 질량병기를 절대로 금하고 있는 집단이다. 그 어떤 상황이 되었든, 질량병기를 사용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으며 그것을 사용했다간 상황을 고려치 않고 중범죄로 다루어 무거운 형을 내린다. 하지만 자신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자신의 몸을 지킬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것들을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게, 몰래 휴대하고 다녔다. 어디까지나 위험하게 될 때를 대비해 사용해야겠다고 ‘생각만 했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진짜로 사용하게 될 줄이야…. ‘…내 착각이었어.’ 바보 같이 이 아이의 모습에서, 그 옛날 어린 마도 통괄관을 떠올려버렸다. 때문에, 이 아이라면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버렸던 것이고…. 해낼 뻔 했으나 해내지 못했다. 페이트는 아직 어린 아이다. 재능은 있으나 아직은 미숙한 점이 많다. 어린 시절부터 숱한 위험을 헤쳐 왔던 루시안과는 달랐다. 그런 아이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꺼내든 질량병기들에 망연해있는 페이트를 뒤로 한 채, AMM이 처박힌 컨테이너로 다가간다. 부서진 벽을 통해 보이는 AMM의 모습은 장갑의 여기저기가 충격에 의해 일그러진 채, 바닥에 쓰러져서 일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그런 AMM의 타이어를 향해 권총을 겨누곤 방아쇠를 당긴다. 계속해서 울리는 요란한 총성. 타이어 자체가 보통의 것과는 강도가 다른지, 권총의 탄환 몇 발에 찢겨지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탄창 하나를 모두 쓰고서야 너덜너덜해지게 되었다. 권총의 탄창을 하나 비운 뒤, 왼손에 들고 있던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았다. 앞바퀴가 너덜너덜해진 채, 일어나려 하는 기계의 모습에 웃음마저도 흘러나왔다. 이렇게 하면 참 쉽게 부술 수 있는데, 어째서 질량병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인간을 향해 질량병기를 사용하면 안 된다. 그것엔 아델리에 역시 동의했다. 하지만 그것이 기계라면 상관없을 듯한데…. 괜한 이념과 겉치레를 챙기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낳는 시공관리국의 허울 좋은 방침에 대해, 그리고 증오스러운 저 고철덩어리에게 “꺼져버려, 개자식.” 욕지거리를 내뱉은 뒤 그녀는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컨테이너의 안에 던져 넣곤, 페이트 쪽으로 몸을 날려 아이를 감쌌고─ 수류탄으로 인해 발생한 엄청난 폭발이 컨테이너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렸다. 영상매체를 통해 보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폭발과 충격에, 아델리에에게 감싸진 채로 멍한 눈으로 완전히 날아가 버린 컨테이너를 응시하는 페이트. “…못 본 걸로 해 줄 거지?”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아델리에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오는 말. 그녀가 질량 병기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데에 큰 충격을 받았던 페이트였으나 그것이 곧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것이라는 걸 깨닫곤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날 수 있겠어?” “…예….” “그래, 이제 괜찮아. 폭발 소리를 듣고 구호반이 곧 올 테니까….” AMM의 공격에 의한 폭발, 그리고 수류탄이 폭발하면서 낸 소리와 충격을 바깥에서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이, 그저 귀로만 위력에 대해서 들어왔던 수류탄이었다. 그것이 폭발할 때, 날아온 파편이 왼팔에 파고들어 피를 흘리게끔 만들었음에도 아델리에는 부러 내색하지 않았다. 이 아이가 괜한 걱정을 하게 될까봐. 그리곤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알고 구호반이 올 거라 생각하면서, 아델리에는 페이트의 작은 몸을 부축해서 일으켜주는 것이었고…. 그러나─ 들려오는 것은 구호반이 승강기를 타고 내려오는 소리 따위가 아니었다. 증오스러운, 그리고 공포를 유발시키는 기계의 요란한 동작음. 타오르는 불꽃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에 아델리에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갔고 “이런 제기랄…” 그것이 현실이 되어 닥쳐오자 아이의 앞임에도 불구하고 욕지거리를 내뱉고야 말았다. “빌어먹을 고철 덩어리 자식!”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질량병기는. 앞바퀴의 타이어가 너덜너덜해진 채 다 찢겨나갔음에도, 뒷바퀴의 타이어에 불이 붙어 녹아가고 있었음에도, 폭발로 인해 장갑이 박살나 부서진 내부가 드러났음에도, 두 동강이 날 것만 같은 동체에도 그것은 용케도 서 있었던 것이다. “좀비냐, 네놈은…!” 저런 상태가 되었음에도 움직이고 있는 것에 아델리에는 분에 겨워 내뱉었다. 기계와 인간이 다른 점이 있다면 저것─. 인간과는 달리, 기계는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 가도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으니까. 그리고 저 AMM 역시 파괴 직전까지 갔음에도, 본연의 임무인 마도사의 살육에 충실하려는 것이었다. 타이어가 찢어발겨진 앞바퀴, 타이어가 녹아내려가는 뒷바퀴를 움직여대는 AMM. 금속으로 이루어진 타이어의 휠이 회전하면서 바닥을 긁자 마찰로 인한 불꽃이 튀면서 무척이나 듣기 싫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모습에 아델리에는 소름마저도 돋았다. “그만 움직여, 이 빌어먹을 자식아…!” 나름의 방법으로 힘겹게 구한 수류탄은 하나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탄창을 권총에 넣은 뒤 너덜너덜해진 고철덩어리를 향해 쏜다. 오른 손으로부터 전해지는 권총의 반동이 파편이 박힌 팔을 저리게 만들었다. 계속해서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고 총알은 너덜너덜해진 고철덩어리에 모두 박혔다. 하지만 작은 쇳조각들이 박혀오는 것에 쓰러질 생각 따윈 없는 듯 했다. 반쯤 무의식중에 방아쇠를 당겼으나, 반동이 느껴지지 않았고 그것으로부터 탄환이 다 떨어졌다는 것을 느낀다. 끝나는 건가, 이대로…? “…페이트….” 탄환이 떨어지고, 마법조차도 사용할 수 없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 아이를 승강기까지 도망치게 하고. 그동안 시간을 버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저렇게 만신창이가 된 AMM이라면 시간을 버는 쯤은 할 수 있을 테니…. 그래서 페이트에게 시간을 벌 테니 도망치라는 말을 하려 했는데…. 그때, 페이트의 전방으로 황색의 마법진이 펼쳐지고 마력이 모여 가는 것에 아델리에의 얼굴이 멍해졌다. “…포격 마법?” 마도사로서의 지식은 남아있기에, 페이트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 몸으로 포격 마법을 사용하려는 것인가? 무리다, 몸이 망가지면 기본적으로 링커 코어 역시 타격을 입는다. 비록 아주 큰 치명상은 아니더라도, 컨테이너에 내던져졌을 때 링커 코어 역시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이 정도의 포격 마법을 사용하려면 힘에 부칠 텐데…. 게다가 AMF에 의해 무효화될 것인데…. “부축해주세요, 아델리에 씨….” 만류하려는 말을 했던 아델리에였으나 페이트가 이렇게 말하자 내뱉지 못했다. “부술 수 있어요, 이제….” 그리고 페이트가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 웃는 얼굴로 말하며 AMM을 가리키는 것에 아델리에의 시선이 망가져있는 그것으로 향해졌다. “…AMF가….” 부서져있었다. 처참하게. “아델리에 씨가 부쉈어요.” 아마 수류탄을 던져 넣었을 때의 폭발로 부서진 듯 했다. 그리고 페이트가 아델리에 더러 웃는 얼굴로 그녀의 덕택이라고 말하는 것이었고…. 상당한 양의 마력이 모여서 찬란한 황색의 마법진을 이루었다. “아니야, 페이트.” 소녀가 들고 있는 디바이스가 카트리지라고 명명된 몇 개의 탄환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력이 더욱 증폭되었다. 페이트의 마력이 증폭되어 모여 가는 것을 처참한 꼴이 되어서도 느꼈던지, AMM은 바퀴가 사라졌음에도 돌진해오기 위해 휠밖에 남지 않은 바퀴를 움직여댔고─ 아델리에는 페이트를 응시하면서, 곧 웃음을 흘린 뒤 말했다. “네가 부수는 거야.” 포격 마법을 사용하려는 아이의 몸을 부축해준다. 그 반동을 함께 버텨주기 위해서. AMF 장치가 부서진 이상, 이제 마법으로 저것을 부수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이제 저것은 마도사 학살병기에서 단순한 기계로 전락했으니까. “플라즈마…” 부축을 받는 채, 육체로부터 통증이 몰려옴에도 페이트는 이를 악 다문 채 중얼거렸다. 처음으로 상대해본 질량병기 AMM. 그것을 부서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스매셔!” AMM이 휠밖에 남지 않은 바퀴를 움직이면서 돌진해오려는 순간, 페이트가 큰 소리로 트리거 보이스를 외치며 앞에 펼쳐진 마법진을 향해 손을 뻗었고─ 강렬한 포격 마법이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돌진해오려던 AMM의 모습을 완전히 뒤덮었고, 수많은 피를 흘리게끔 만들었던 증오스러운 기계병기의 최후를 알리는 마지막 피날레였다. 부상을 입은 아이를 부축해주면서, 승강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왔던 아델리에는 승강기의 문이 열리고 지상의 모습을 보게되자 망연해졌다. “…뭐야.” 바람을 타고 풍겨오는 기름이 타는 냄새, 그리고 그것에 뒤섞인 피비린내가 후각을 자극해온다. 시각으로 감지하는 것은 처참하게 부서져있는 기계의 파편들과 주변에 널려있는 처참한 마도사들의 사체들. “…보지 마, 페이트.” “….” 무언가에 꿰뚫린 듯이, 여기저기에 구멍이 나있는 처참한 모습의 사체들에 아델리에는 손으로 아이의 눈을 가려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기계들의 잔해와 마도사들의 사체가 뒤섞여있는 모습에, 아델리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페이트의 눈을 가린 채로, 기동을 멈춘 것으로 보이는 기계들의 사이를 걸어갔다. 습격을 받은 건가…? 죽어버린 마도사들의 사체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저 너머에 살아남은 마도사들이 있었기에 아델리에는 페이트를 부축하며 그곳으로 향했다. “저기, 생존자다!” 그쪽에서도 자신들을 발견했던지, 보고 외치는 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달려온 그들에게 일단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물었다. 습격을 당한 것은 자신들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제기랄, 우리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지원 요청을 받고 여기 와 보니까, 모두 다 죽어있었다고!” 죽어있었다는 말은 미리 와서 조사를 하고있던 국원들을 말하는 것일까. 분통이 터진다는 듯이 악에 바쳐 한 마도사가 외치는 말에 아델리에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저것들은… 당신들이 부순 건가요?” AMF가 탑재되어있는 AMM을 마도사가 부수기란 쉽지 않다. 파편으로 보아하니 상당한 수의 AMM들이 습격을 해왔던 것 같은데, 보통의 마도사 부대가 그것을 부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 물어본 말이었으나…. 그리고 그 질문에 마도사가 답한 말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우리들이 부쉈다고 하기 보다는, 자기들끼리 부수고 있었지.” 『자기들끼리 부수고 있었다』 이 말에 아델리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야. 기계 놈들이, 질량병기 놈들이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었다고. 모터사이클같이 생긴 것들이랑, 동그랗게 생긴 것들이랑….” 동그랗게 생긴 녀석? 모터사이클같이 생긴 것들이라고 함은, 지하의 창고에서 자신들을 습격했고 가까스로 파괴하는 데에 성공한 AMM을 의미하는 말이겠지만… 동그랗게 생긴 것들에 대해선 아델리에는 아는 바가 없었다. “…일단은 이 아이를 부탁해요, 부상을 입었으니까….” 어찌된 영문인지 잘 알 수는 없었으나, 아델리에는 일단 페이트의 치료가 우선이라 생각하여 마도사들에게 페이트를 치료해 달라 부탁하는 것이었다. 본인 역시 팔에 파편이 박힌 채, 피를 흘리고 있건만 말이다. 하지만 그다지 대수로운 부상도 아니라는 것처럼, 아델리에는 주변을 시선으로 훑었다. 무슨 일인지 대충은 파악하기 위해서 질량병기들의 파편틈을 걷는다. 최대한 멀쩡한 외관을 유지한 기계를 찾으려는 의도였다. ‘…마법에 파괴된 게 아니야….’ 물론 마법에 의해 파괴된 듯한 잔해들도 더러 있었으나 그건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파편들이, 질량병기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보였으니까. 모터사이클 형태의 AMM이라면 접촉해서 대강은 알고 있다. AMF기술을 탑재한, 복티아 라르셀의 작품이리라. 하지만 동그란, 구(球) 형태의 질량병기에 대해선 오늘 처음 듣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것이 모터사이클 형태의 AMM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니…. 불타고 있는 잔해들을 한참이나 찾는동안 찾아낸 것이, 원통형의 형태를 띤 것들도 더러 섞여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의 형태는 AMM 프로토 타입과 비슷했으나 크기가 대체적으로 더 작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나마 형태가 온전한 채로 부서진 잔해를 찾아내었다. 그것은 구체 형태의 질량병기였다. ‘마법으로 파괴됐구나….’ 형태가 그나마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질량병기에 의해 파괴된 것은 아닌 듯 했다. 아마 마도사들이 남아있는 것을 파괴했겠지만…. 어쨌든 기계에 관한 지식이 충분한 것은 아니었으나, AMM에 대해 나름 연구하면서 쌓인 지식을 믿어보기로 하며 그것을 살펴보기 시작한다. 아까 마도사가 말해줬던 그대로, 그것은 구체의 질량병기였다. 비록 불에 그슬렸으나 푸른색을 띤 장갑을 가진 그것을 한참동안이나 살펴보더니, 아델리에가 내린 결론은 ‘…이건 AMM이 아니야.’ AMM이 아니라는 것. 비록 잔해이지만 그것의 내부구조와 형태를 살펴본 아델리에가 내릴 수 있었던 결론이었다. 함께 일하던 집무관인 루시안이 은퇴하고, 마도사로서의 능력도 잃게 되어 소속이 라르고 킬의 보좌로 옮겨가게 되었던 아델리에는 틈틈이 AMM에 대해 나름의 조사를 했었다. 루시안이 남기고 갔던 조사 데이터들의 사본과 기술부 내 복티아 라르셀의 보고서들, 그리고 루시안이 파괴했던 AMM 프로토 타입의 잔해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말이다. 라르고 킬 역시 그것을 용인해주었고…, 그 역시 AMM의 공략방법을 원하곤 했었으니까. 그래서 AMM에 관해서는 어지간한 기술자들만큼의 지식은 갖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내린 결론인즉, 이것들은 AMM이 아니다. 그리고 주변에 널려있는 잔해들 중, 모터사이클의 형태를 한 잔해를 살펴보았다. “이건 AMM인데… 뭐야, 일이 어떻게 된 거야….” 그것의 내부구조와 반쯤 파괴되어있는 눈에 익숙한 형태를 띤 AMF 발생장치를 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내뱉는 말. 페이트와 자신이 조우했고 페이트가 파괴한 모터사이클 형태의 질량병기는 AMM이었다. 하지만 구체 형태의 질량병기는 AMM이 아니다. 혼란스러웠다. 일단은 조사반이 파견되어 자세히 잔해들을 조사해봐야 알겠지만…. AMM과 AMM이 아닌, 또 다른 질량병기가 충돌했다. 이 일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파편이 박힌 팔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그 고통으로 인해 몽롱해진 머리가 깨어나는 느낌이었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로 천천히 정리해나가기 시작했다. 창고의 조사 중 습격해온 모터사이클 형태의 신형 AMM. 그리고 그것을 페이트가 파괴했다. 승강기를 타고 지하에서 나오니 수많은 잔해들과 사체들이 널려있었고… 그 현장에 남아있던 마도사가 말하길, 자신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땐 모두 죽어있었고 AMM과 또 다른 질량병기들이 싸우고 있었다고 했다. AMM은 어째서 이곳에 나타난 것인가? 잔해의 수를 보면 단순히 한 대가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한 무리가 나타났다 봐도 됐다. 그것도 처음 보는 형태의, 여러 의미로 좀 더 진보했다 해도 되는 것들이. 그리고 AMM과 교전을 벌인 정체불명의 질량병기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으로선 여기까지였다,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는. 더 이상까지는 생각을 해 봐도 답이 나오질 않았으니까…. “으윽… 제기랄….” 팔에 박힌 파편 때문에 다시금 큰 통증이 몸을 휘감는 것에, 그녀는 파편들의 틈에 주저앉은 채로 욕지거리를 내뱉었고…. 저 쪽에서 마도사들과 조사를 위해 이제야 막 파견 나온 조사반 국원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통증과 동시에 느끼며, 그녀는 다시금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이었다. 조사는 의외로 빠른 시간 내에 끝났다. 그것도 그럴 것이, 사방에 널린 것이 샘플이었고 조사 대상인 지라. 단서니 뭐니 찾는 데 시간을 쏟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널려있는 기계의 파편들과 잔해들을 모두 기술부에 보내었고 기계 좀 만진다는 기술자들이 총 동원되어 달려들었으니까. 질량병기들의 습격에 조사에 동원되고 있던 32명의 마도사가 사망, 85명의 마도사가 부상을 입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성왕 교회의 요청에 따라 수사에 조력하던 중에 일어난 것이었기에 시공관리국에선 성왕 교회 측에 항의를 했었으나 성왕 교회 측은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부인하였기에 두 집단의 사이는 더욱 불편하게 되었고…. 어찌되었든, 기술국에서 올라온 보고서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첫째, 모터사이클의 형태를 한 질량병기는 복티아 라르셀이 만들어낸 AMM의 체계를 기본으로 개량된 신형이라는 것. 그것은 즉, 실종되었던 수석 기술사관인 복티아 라르셀이 어딘가에 살아있으면서 질량 병기를 개량하고 만들어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시공관리국의 수석 기술사관이 범죄에 이용되는 마도사 살육용 질량 병기를 만들고 있다는 그 사실은 기술국 전체를 큰 충격에 빠뜨렸고, 복티아 라르셀을 알고 있던 이들도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이번에 새롭게 나타난 AMM은 AMF의 출력이 증대되고 기동성을 우선시하여 지상에서의 전투에 특화된, 정식명칭 AMM-Type Second.는 『AMM 육전형』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두 번째 보고서는 기술국이 아닌 시공관리국 자체를 뒤흔들어놓았다. AMM과 충돌한 것으로 여겨지는 다른 형태의 질량병기. 잔해와 파편들을 조사해본 결과, 그것은 AMM이 아니었다. AMM의 시스템 체계와는 전혀 다른 것을 채택하고 있는 질량병기였으니까. 그것의 파편을 해체하고 조사한 기술사관들은 그것이 AMM과는 전혀 다른 기기라고 표현했다. 마도사들을 ‘살해’할 수는 있으나 ‘살육’하기엔 부족한, 다른 용도를 위해 만들어진 기계라고 말이다. 오로지 마도사들을 죽이기 위한 기능에 충실한 AMM에 비하면 너무나도 잡스러운, 다용도성을 띤 기계다. 물론 질량병기로서도 사용할 수 있겠지만…. 그들은 이것이 절대로 복티아 라르셀이 만든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기술사관들이 말하길, 이렇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을 만든 이가 너무나 친절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기기에 새겨두었기 때문이라 했었고… 그 이름은 제일 스칼리에티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떠한 명칭도 붙여지지 않는 그것을 가제트 드론이라고 그들은 부르기 시작했다. 시공관리국 기술국 내에서, 기계공학 분야로는 최고라 평가되던 복티아 라르셀. 그리고 범법자이자 천재 기술자 제일 스칼리에티.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AMM과 가제트 드론. 이 두 질량병기의 충돌과 그 틈에 끼어서 희생된 수많은 국원들. 어째서 AMM과 가제트 드론이 충돌하게 되었는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제 16 물류보관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한 컨테이너가 사라졌다는 것이 알려지고 나서 수사의 초점은 ‘컨테이너 안에 무엇이 있었는가?’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몇 년 뒤, JS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전조였으며, AMM들에 의한 마도사 살육은 머지않은 앞날에 일어날, 훗날에 T.F사건이라고 불리게 될 시공관리국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사건의 토대이기도 했다. 《21:00. 미드칠더 수도 크라나간, 국립병원》 어차피,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것을 예상했건만 착잡했다. “….” 대기실에 비치된 의자. 그 위에 주저앉다시피 해서 한숨만 몰아쉬고 있는 이는 루시안.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의자에 앉아있었다. 이들도 아마 자신과 같은, 환자의 가족인 사람이겠지만…. 어차피 그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페이트가 부상을 당했다. 연락을 받았을 때에, 제 관리 외 97번 세계의 집에서 저녁을 준비하던 도중 물을 끓이기 위해 올려둔 냄비를 엎어버렸다. 다행히 아직 끓지 않은 물이어서 부상은 없었지만…. 그만큼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만….’ 설마하니 이렇게 갑작스레 다가올 줄은…. 시공관리국, 항공무장대, 마도사. 이 세 개의 조합이라면 목숨을 내던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부상을 입거나 하는 것은 일상다반사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리고 페이트는 그쪽에 속해있고…. 자신도 역시 그랬었다. 수많은 마도사와 국원들이 다치고 죽는 것을 봐왔다. 자신도 그렇게 될 뻔 한 적도 여러번 있었고. 옛날부터 자주 있었던 일이었기에 이미 익숙해져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다치는 것에는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특히나 자신의 양녀라면…. 너무 답답한 심정에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생명에 큰 지장이 있거나 한 부상은 아니라고 하지만…. “여기, 커피라도 한잔 해.” “…됐어.‘ “빨리 받아, 한 손으로 쟁반 들고 있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실제로 자판기에서 뽑아온 커피를 올린 쟁반을 아델리에는 한 손으로 들고 있었다. 한쪽 팔은 붕대로 감은 채로 루시안더러 자판기의 커피 한 잔을 내미는 것이었고 그것에 루시안은 씁쓸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든다. “치유 마법 몇 가지만 받으면 괜찮을 거래. 그러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마.” “….”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우습게 느껴졌다. 걱정하지 말라고 해봤자 걱정이 되지 않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AMM하고 접촉했다며?” “…그래. 수십 명이 죽었어.” 바깥에서 조사를 하고 있던 수십 명의 국원들이 질량병기 간의 싸움에 말려들어 희생되었다. AMF가 탑재된 그것들에 보통의 마도사에 지나지 않는 그들이 대항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어쩌면 다행일지도 몰라. 괜히 밖으로 나갔다가 휩쓸렸을 테니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이제는 미지근해진 커피를 홀짝이면서 루시안이 툭 내뱉은 말이었다. 솔직히 말해, 루시안은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국원들이 다치든 죽든 그런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그가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친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주변 이들이 다치거나 죽게되는 것….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이었다. “AMM 육전형이라고…?” “응. 신형이지.” 자신이 처음으로 조우했었고 부수었던 AMM 프로토 타입이 아닌, AMM 육전형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띤 AMM이 나타났다는 말에 루시안은 놀랐었다. 그리고 페이트가 그것과 싸우다가 부상을 입었다는 것을 들었을 땐 경악했었고…. 현재로서는 거의 유일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AMF의 해법을 제시했던 것은 자신이었다. 그것을 페이트에게 가르쳐주거나 했던 적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페이트가 AMM과 접촉했다니…. 물론 페이트가 그것을 파괴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말을 들었었지만, 부상을 당했다는 것 때문에 루시안은 그것엔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복티아 라르셀이 살아있다는 얘기겠지. 육전형이라는 형태로 개량되어서 새로운 AMM이 나타난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그러겠지.” “집히는 데 있어? 아는 사이였다며….” 아델리에는 이번 일로 확실해진 것이 있다면 두 개의 범법집단이 격돌했다는 것이라 생각했다. AMM과 가제트 드론이라는 두 질량병기의 집단이, 복티아 라르셀과 제일 스칼리에티에 의해 각각 탄생된 기계병기가. 그리고 재수없이 시공관리국은 이번 일이 휘말려버린 것이고…. 물론 무엇 때문에 범법자들의 집단이 충돌하였는지 까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실종 상태로 표기되어서 이제 곧 사망처리가 될 신세였던 복티아 라르셀도 범법자로 낙인찍혔다. “…없어.” 한참이 지나서, 루시안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때, 치료를 마치고 돌아온 페이트의 모습이 보이는 것에 루시안은 시선을 돌려버렸다. “페이트 괜찮아?” “예, 이제 괜찮아요.” 루시안이 차마 보고 싶지 않다는 듯이 시선을 돌리는 것에 아델리에가 대신해서, 치료를 마치고 돌아온 페이트에게 묻는 말이었고 웃으면서 페이트는 답했다. 아마도 그 웃음은 루시안을 의식해서 지어보인 웃음이었겠지만…. “…진짜로 괜찮아?” 루시안이 중얼거리듯이 이렇게 묻는 말. 그리고 루시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페이트에게 다가갔다. “레스톨레이션 필드.” 그리고 발동되는 회복마법, 루시안 블레이즈가 유일하게 사용할 줄 아는 회복 마법이었다. 질병 따위를 고칠 수는 없지만, 몸 안쪽으로부터의 부상이나 상처는 급속도로 회복시킬 수 있는 광역 치료 마법이 페이트를 감쌌고 그 모습에 아델리에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마법은 다시는 안 쓸 거라고 하던 인간이….” 그랬던 인간이 딸아이가 다쳤다는 것에 마법을 사용하다니, 어느새 완전한 애 아빠 다됐다고 생각하면서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 반쯤 농담하듯이 생각했다. 만약 페이트가 범법자들에게 납치되거나 감금된거나 한다면 루시안이 다시금 마도사로서 일어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그것을 바란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돌아가자, 집에.” “아빠…, 화나셨어요?” 어쩐지 화가 난 것만 같은 루시안의 기색에 페이트는 그의 돌아가자는 말에도 머뭇거렸다. 하지만 루시안으로부터의 답은 없었고… 그 모습을 보며 아델리에는 그가 화가 났다고 하기 보다는 안타까워하고 있다 생각했다. “오늘은 수고해줬어, 페이트. 가서 씿고 아빠가 해주는 밥 먹고 푹 쉬도록 해.” “아, 예…. 수고하셨어요, 아델리에 씨.” “…가자.” “아, 잠깐만. 기다려봐 애 아빠.” 더는 이 곳에 있기도 싫다는 듯이, 페이트더러 가자고 손을 붙잡고 병원에서 걸어나가려는 루시안에 아델리에는 깜짝 놀라서 그를 다급히 붙잡았다. “이거 가져가.” 그리고 내미는 것은 휴대용 저장장지였다. “…뭔데?” “이번 사건의 조사 보고서의 사본. 신형 AMM하고… 가제트 드론인가 뭔가 하는 고철덩어리들이랑. 여기에 다 적혀져 있어.” “필요 없어.” “그래도 가져가. 그리고 한번 봐봐, 혹시나 네가 뭔가 알고 있을만한 것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에도, 아델리에는 억지로 휴대용 저장장치를 루시안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곤 그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잘 가라고 말하는 것이었고…. 억지로 떠맡겨지듯이 그 휴대용 저장장치를 넘겨받은 루시안은 도망쳐 나오듯이, 페이트의 손을 붙잡고 병원의 로비를 빠져나왔다. “아델리에가 아니었다면 죽었을 거야.” “….” 그리고 병원 밖으로 나오자마자 루시안이 무뚝뚝한 어조로 내뱉은 싸늘한 말에 페이트는 얼어붙었다. 그녀에게 이야기는 대강 다 들었었다. 평소에 호신용으로 숨겨두었던 질량병기를 사용했고, 그 덕에 AMF 장치가 파괴되어서 페이트가 마법으로 AMM 육전형을 파괴해냈다는 것도….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를 추궁한 거였지만…. 아델리에는 처음에 페이트가 혼자서 AMM 육전형을 파괴했다고 루시안에게 말했으나 루시안은 그걸 믿지 않았다. 아직은 미숙한 아이다, 살상 설정의 마법도 사용할 수 없는데…. 그런데 그 AMM을 혼자서 파괴해내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이 일을 해야겠어?” “….” “항공무장대는 지금이라도 그만둬, 차라리 무장대 육사학교로 가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몰라.” 그쪽으로 간다고 집무관이 못되는 것은 아니니까, 라고 생각하면서 루시안은 페이트에게 말했다. 차라리 그곳에서 안전하게 정규적인 과정을 거치는 것이 더 나을 테니까. 정신력의 문제다, 이 일은. 실력의 유무는 두 번째 이야기고,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이 압박감을 이겨낼 수 있느냐 없느냐가 최우선의 요소이기도 했다. 그리고 루시안은 그것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의 목숨엔 그렇게 위협이 오는 것은 아니다. 물론 본인도 위험했던 때가 많았지만 압도적인 마도사로서의 재능과 역량, 그리고 집무관으로의 판단력으로 그것을 헤쳐 나갔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목숨까지는 보장해주지 못했고, 한 명씩 한 명씩 다치거나 죽어갈 때마다 압박감을 느꼈던 것이다. “…괜찮아요, 전….” 하지만 페이트가 하는 말은 괜찮다는 말. 그리고 그것에 루시안은 안타까워하는 것이었고…. 이미 이 아이가 버텨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치거나 죽게 되면 주변의 사람들, 친인들 역시 괴로워하게 된다. 다른 이들에게도 간접적으로나마 폐를 끼치기 된다는 것이다. 만약, 아직까지도 자신이 마도사로서─ 집무관으로서 시공관리국에 속해있었더라면 지켜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더 이상 집무관도 아니고 스스로가 마도사의 길을 버렸다. 시공관리국과의 인연을 끊고, 마법과의 인연도 끊어버린다. 그것은 그가 은퇴하기 전부터 했었던 맹세 비슷한 것이었고… 물론 자신이 직접, 3 제독 중 한명에게 복귀하겠다고 말을 한다면 그들은 쌍수를 들고 그것을 받아들여 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자신이 그런 길을 선택하게 될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 루시안은 생각했다. 다시는 그 길을 걷고 싶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의지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곧 마도 통괄관의 의미였기에…. 그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상처와 고통으로 얼룩진 길. 그래서 루시안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 다무는 것이었고…. #11 광대(The Fool) 《신력 66년 6월 13일, 13:00 미드칠더 수도 크라나간, 시공관리국 무장대 육사학교》 붉은 색의 동그란 보석이 걸려있는 디바이스를 양손에 들고, 그것을 전방의 기계를 향해 겨누었다. 발전기를 작게 축소시킨 듯한 형태의 그 기기는 아지랑이처럼 옅은 파장을 뿜어대고 기동 중이었다. AMF 발생장치라고 했던가? 그것을 노려보면서 디바이스의 주인인 타카마치 나노하는 심호흡을 한번 하였다. 주변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동기들의 시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곳에 소속되어 일하고 있는 친한 친구도…. ‘막을 여러 개 덧씌워서…’ 마력을 끌어 모아서 디바이스의 전방에 수렴시킨다. 특기인 집속포나 사격 마법으로 펼치는 탄막이 아닌, 단발의 공격이다. 하지만 그것의 위력은 보통의 사격 마법과는 다른 것이었다. 사격 마법에 마력으로 형성된 막을 여러 겹, 계속해서 덧씌운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가속시킨다. 마력의 막을 덧씌울수록, 그리고 그것을 제자리에서 가속시키면 시킬수록 컨트롤하기가 힘들어졌다. 하지만 나노하는 자신과 자신의 디바이스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을 동원하였고─ “슛(Shoot)─!" 여러 겹의 마력의 막이 덧씌워진 사격마법을 목표물인 AMF 발생장치에게 발사한다. AMF의 효과범위에 들어가자 덧씌워진 마력의 막들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덧씌워진 막 때문에 본래의 알맹이인 사격 마법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고─ 사격 마법이 AMF의 효과영역을 꿰뚫었다. 그리고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지는 않았지만 발생장치에 사격 마법이 적중하자 그것은 조금은 크게 찌그러졌고 좌중에서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와, 대단한데? 정말 재능이 있구나, 너!” 그리고 앞에 나와서 서 있던, 항공무장대에서 자신의 친구와 함께 파견 나온 여성이 감탄을 흘리는 말이었다. “그걸 해내다니…. 설마하니 진짜로 될 거라는 생각은 못했지만….” 근 며칠동안은 AMF 발생장치라는 것의 해법을 배우기로 했었다. 얼마 전에 질량병기들에 의해 수많은 국원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들 중에는 마도사인 이들이 상당히 끼어있었음에도 인명피해가 심각했던 이유는 아까의 그 장치 때문이라고 했다. AMF, Anti-Mag link Field. 마력의 결합을 방해하고 결과적으로 마법을 무효화시키는 기계 장치. 질량병기들은 그것을 탑재하고 있었다 한다. 그래서 그것을 대비한 특별 훈련을 위해서, 항공무장대에서 그녀가 임시 교관으로 파견되었던 것이고…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자신의 친구가 파견 나온 것에 나노하는 놀랬던 것이다. 솔직히 페이트도 놀랬었다, 엄연히 AMF가 장착된 AMM을 파괴시켰던 것 때문에 라르고 킬의 지시로 아델리에와 함께 무장대 육사학교에 파견되었던 것이지만…. “이름이 나노하라고 했었지? 자, 여러분 다시 한 번 설명하겠습니다.” 완파시키지는 못했지만 AMF의 효과영역을 뚫고 장치에 타격을 준 나노하를 앞에 세우고 아델리에는 잘했다는 듯이 어깨를 두드려준 뒤 말한다. “AMF 발생장치는 AMM이라는 질량병기에 탑재된 장치입니다. 마력의 결합을 방해하여 마법을 무효화시키는 장치죠. 보통의 방법으로는 이것을 파괴하는 것은 힘듭니다. 하지만 방법이 몇 가지 있죠.” 더운 날씨에 관리국 제복을 입고 바깥에 나와서 마도사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고역이었음에도 아델리에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설명한다. “첫 번째, 살상 설정 마법의 사용. 물론 여러분은 아직 미숙하니까 거의 불가능할겁니다. 물론 가능하다 하더라도 허가 없이 사용했다간 징계를 받게 될 거고요. 두 번째, AMF 발생장치의 기동과 효과발생까지의, 1~2초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AMM의 전방에 부착된 센서부분을 파괴해서 내부에 마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물론 이것도 어지간한 마도사는 사용하기 힘들지요.” 물론, 페이트의 경우엔 그것에 성공했었다고 아델리에가 덧붙이는 것에 교육생들에게선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그리고 세 번째, 다중 탄각 마법입니다. 사격마법에 마력으로 이루어진 막을 여러 겹 덧씌워서, 가속시켜 발사하는 것이지요. AMF의 효과영역에 들어서더라도 덧씌워진 마력의 막이 사라지는 것이지, 내부의 사격마법에 아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어느 정도 마력의 막을 덧씌워야 합니까?” 그때, 교육생들 중 한 남자 교육생이 손을 들어서 묻는 말. 그 말에 아델리에는 한숨을 내쉬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전부.” 너무나도 막연하고 무성의한 이 말에 침묵이 흘렀다. “…마력량의 관리도 하지 말라는 얘깁니까?” 어딘가에서 다시금 들려오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마도사로서의 경력이 있는 아델리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속으로는 『교본에 충실할 뿐인 애송이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고… “여러분은 뭔가 큰 착각을 하고 계십니다만….” 실전경험이 없는 이들이기에 가능한 질문이었기다. “AMM이라고 하는 것들은 그냥 멍청하게 서 있는 기계가 아닙니다. 본국이나 관리국 내에 장치된 보안 장치, 센트리 건들과는 다릅니다.” 이들 중에서 AMM이나, 혹은 그보다는 조금 못한 존재인 가제트 드론과 접한 이는 없으리라 생각해서 설명한다. “AMM은 마도사를 『살육』하자는 의도로 만들어진 『대 마도사 학살병기』입니다. 가만히 서서 기다리지 않고, 여러분들을 죽이려 들겠죠. 그런 상황에서 마력량을 조절한다고요? 모든 마력을 동원해서 다중 탄각 마법을 사용해도 부술까 말까라는 것을 명심하시길.” 살상 설정의 마법. AMF장치의 기동과 효과발생까지의 짧은 틈. 그리고 다중 탄각 마법의 사용. 이것들이 현재까지 나온 확실한 해법이었고 그나마 보통의 마도사들이 해낼 수 있는 것은 마지막 것뿐이었다. 시공관리국은 본격적으로 AMF에 대한 대처방법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수많은 희생이 있고서야 본격적으로 AMF에 대한 훈련을 시키는 것은 엎어진 물을 주워 담으려는 것보다 못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앞으로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다. 수많은 마도사들이 모여서 한참동안이나 머리를 굴린 끝에 나온 견론이 다중 탄각 사격 마법. 물론 이전에도 루시안이 제시했던 해법이 있었지만 보통의 마도사들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루시안의 경우는 사격 마법을 사용하는 타입의 마도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떠올리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다. 다중 탄각 사격 마법을 통해서 보통의 마도사들도 AMF의 효과영역을 뚫고 타격을 입히는 것이 가능해졌다. 비록 위력의 정도는 무척이나 개인차가 심한 편이지만…. ‘…이들이 과연 AMM과 마주치게 된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직은 거의 대부분이 실전경험이 전무한 이들이다. 이들 뿐만이 아니라, 지금 대 AMF 훈련을 받고 있는 다른 교육생들도 마찬가지리라 생각하면서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고…. 질량병기에 대한 경각심이 없다, 이들은 그것들을 그저 고철덩어리로 생각하고 있다. 그녀는 이러한 생각은 반드시 큰 화를 불러올 것이라 생각했다. * * * * * * “페이트!” 다중 탄각 사격 마법을 통한 AMF의 공략에 대한 교육을 끝마치고서, 아델리에와 함께 항공무장대로 귀환하려던 페이트는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제 돌아가는 거야?” “아…, 응.”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따라온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자신이 선보였던 것은 AMF 효과의 발동까지의 1~2초 남짓한 시간동안 AMF에 접근해서 그것을 파괴하는 것뿐이었고 말이다. 어찌되었든 AMM을 파괴했던 적이 있는 마도사였기에 라르고 킬이 가보라고 했었던 것이고. 항공무장대로서 해야 할 서류 처리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돌아가려던 때에 나노하가 부른 것이었고…. “점심은?” “응? 점심…?” “응, 아직 안 먹었으면 같이 먹을래?” 물론 아직 먹지 않았다. 이제야 막 항공 무장대로 돌아가서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으니까. 그런데 나노하가 같이 점심을 먹지 않겠느냐고 묻는 말에 아델리에 쪽을 슬쩍 쳐다본다. 어디까지나 직급을 따지고 보면, 제독 보좌인 그녀는 자신의 상관이었으니까. 그리고 페이트가 힐끗거리면서 눈치를 보는 것에 아델리에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교관님도 같이 드실래요?” “너희들만 괜찮다면야.” 어린 아이들이다. 비록 시공관리국에 속해서 나름의 일이 있다고는 하지만 우정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녀였기에 허락해주었던 것이다. “몸은 괜찮아?” 부상당했었다는 것은 대강 들었다. 그래서 묻는 것이었고 페이트는 친구의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여 응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뒤엔 교육생들이 처음으로 현장 실습 나가지 않니?” “아, 3일 후에요. 이세계(異世界)로 조사 파견 나가요.” 조사 파견을 나간다는 말에 아델리에는 미간을 구겼다. ‘…어째 불길한데.’ 원래 조사라고 한다면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축에 속한다. 하지만 자신은 그 조사 도중에 두 번이나 피를 보았기 때문에…. 그나마 조사를 위한 파견이 안전한 축에 속한다고는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조심해, 단순히 조사라고 생각했다가 큰 일 나는 수가 있으니까.” 경험자로서의 충고였다. 하지만 나노하는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었으니. “볼켄 리터의 비타랑 시그넘 씨도 도우러 온다니까, 괜찮을 거에요.” “시그넘도?” 볼켄 리터의 구성원, 시그넘과 비타 역시 이세계로의 조사에 파견된다는 말에 페이트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하긴, 어둠의 서 사건 이후에 그들의 행보는 시공관리국 측에 협조하는 것으로 저질렀던 범죄 행위의 대가를 치루기로 했던 것이니까. 게다가 확실히 시그넘까지 끼어있다면 괜찮을 거라 페이트는 생각했다. “…볼켄 리터…, 어둠의 서 사건의 관련자들 말하는 거지? 그들이 껴있다고 괜찮으려나?” “괜찮을 거에요, 시그넘은 강하니까.” 저보다도 더, 라는 말을 페이트는 덧붙일 뻔 했었다. 확실히 현재로서, 시그넘은 자신보다 강하다. 전투 시의 감각 역시 뛰어나 상대방이 어떤 타입이든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페이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공관리국의 이런 선택, 단순히 조사에 불과한 일에 과다 인력을 투입하는 것은 근래에 있었던 일 때문이리라 아델리에는 생각했다. 단순히 조사라 여겼던 일들이 크게 번지면서, 질량병기들에 의해 수많은 희생이 나왔으니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는 생각임이 틀림없다. 그 방침에는 본인 역시 동의하지만 이 사고방식이 더 빨리 확립되었다면 이전의 희생은 최소화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아델리에는 두 아이가 애들다운 대화를 나누면서. 앞장서서 식당으로 걸어가는 것을 뒤에서 따라가는 것이었다. * * * * * * 《15:00 관리 외 제 97번 세계, 우미나리 시 블레이즈 가》 빽빽하게 미드칠더의 문자가 기록되어 있는 조사 보고서를 읽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얼마 전, 페이트가 부상을 당했을 때에 병원에서 아델리에가 자신에게 건네주었던 휴대용 저장 장치에 저장된 조사 보고서였다. 그리고 그가 보고있는 것은, 가제트 드론이라고 새롭게 명명된 질량병기에 관한 보고서. ‘가제트 드론이라….’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아무래도 페이트가 부상당한 일과 관련되어 있어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지만 루시안은 그것을 쭉 읽어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마도사의 살육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AMM과는 달리,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될 수 있게 설계된 질량병기. 그리고 그것을 만든 이의 이름과 프로필을 보게 되었을 때 마음의 한켠이 얼어붙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스칼리에티….’ 광기를 머금은 오렌지 빛의 눈동자. 비록 사진이긴 하지만 그 눈동자가 자신을 노려보고있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쓰디 쓴 웃음을 흘리면서, 루시안은 한숨 쉰다. 제일 스칼리에티─. 인조 마도사의 연구를 했었으며 미드 칠더가 낳은 몇 안 되는 천재 기술자들 중 하나. 그러면서도 현재 최고 랭크에 등록되어 있는 광역 차원 범죄자. 집무관 쪽이나 수사관 쪽으로 뼈가 굵어있는 이라면 알고 있을 이름이다. 그리고 그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의 손으로 붙잡아 감옥에 쳐 넣겠다고 다짐을 하는 이름이기도 했고…. 그가 떳떳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이 이름을 새겨놓은 가제트 드론. 그리고 복티아 라르셀의 AMM Type Second. 통칭 AMM 육전형. 물론 스칼리에티가 기계공학 쪽으로도 뛰어난 기술자(물론 범법 기술자이지만)이긴 하지만 복티아 라르셀의 뒤를 따라올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한 분야에 매진한 자와, 여러 분야를 섭렵한 자. 이정도의 차이인 것이다. 둘의 접점은 루시안이 알기론 전혀 없었다. 둘은 만난 적도 없다, 물론 서로가 이름정도는 들어봤을 수도 있지만…. AMM의 경우는 화력과 마도사 살해의 효율성을 중시하였기에, 마도사를 없애는 것에는 가제트 드론 같은 것을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양산이 쉽지 않아서 다수를 확보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가제트 드론은 AMM에 비해서 양산이 쉽다. 라는 것이 기술국의 보고 내용이었다. 높은 질을 가진 소수의 기계병기, 그리고 낮은 질이지만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다수의 기계병기 간의 싸움이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루시안은 제일 스칼리에티가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마음에 걸렸었다. 때문에 옛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제일 스칼리에티를 보았을 때, 그때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 기분이 나빠졌다. “…너무 엣날이라, 잊고 있었어.”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감옥에 쳐 넣는 것이 아니라 『죽이고 말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랬던 옛날의 집념은 숱한 수난과 고통의 길을 걸으면서 퇴색되기 시작했고 사라졌지만. 그러나 이 보고서로 인해 루시안은 그것들을 다시금 떠올렸다. 씁쓸한 과거의 기억이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은 그저 평범한 소시민에 지나지 않는다. 마도 문명을 버리기로 했다. 그것이 자신에게 좋은 것을 주었던 기억은 없으니까. 과거를 떠올리니 쓰디 쓴 커피를 맛본 것처럼 씁쓸했다, 한숨을 몰아쉬면서 루시안은 그것을 달래보려는 것이었고…. 아주 예전의 과거를 떠올려봤자, 좋은 기억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루시안은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것이었고…. 《신력 66년 6월 16일, 17:00 관측 외 이세계(異世界), 유적지》 햇빛조차도 잘 들지 않는 곳이었기 배리어 재킷을 입었음에도 피부로 한기가 느껴졌다. 불빛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환경 탓인지, 어두컴컴한 유적 내부의 복도를 걸으면서 기분 탓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나노하는 레이징 하트를 쥔 손에 더욱 힘을 불어넣었다. 어쩐지 테마 파크에 있는, 『유령의 집』 같은 곳에 온 기분이었다. 물론 혼자서 이 어둠 속을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디까지 들어가야 하는 거야.” 뒤쪽에서 들려오는 것은, 함께 유적 내의 조사를 맡게 된 동료 국원. 마력으로 밝힌 불에 의지해서 어두컴컴하고, 기껏해야 사람 두 명이 지나갈만한 좁은 복도를 일렬로 걸어간다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온 불평이었다. 무장대 육사학교 동기이긴 하지만 연상인 그의 불평에 나노하는 어쩐지 공감할 수 있었다. ‘운이 나빴던 걸지도….’ 유적지 내부의 조사에 뽑힌 것은 순전히 운이 나빠서였다. 다른 이들은 답답하지도 않은 유적지 바깥에서 외부조사를 맡고 있는데, 시그넘이나 비타도 그 중에 포함되어 있고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외부조사를 맡고있는 이들이 부러웠다. 그냥, 한시 바삐 내부의 조사를 끝마치고 넓은 바깥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이 좁고 어두운 복도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다. “…거의 다 빠져나온 것 같은데?” 그리고 선두에 서서 복도를 걸어가던 이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에 좁은 공간을 따라 걸어가던 이들은 희색을 띠었다. 물론 어두웠기에 서로에게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저쪽에서 불빛이 보여.” 실제로 좁은 통로의 머지않은 저편에선 희미하지만 불빛이 보여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향해 아까보다는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한시라도 바삐 내부의 조사를 끝마치고 넓은 바깥으로 나가야겠다는 일념 하에.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좁은 통로를 빠져나왔다. 유적지 내부의 조사를 위해 특별히 뽑힌 스무 명의 마도사들은 좁은 통로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넓은 공동이 펼쳐지는 것에 놀랐다. 상당한 크기의 공동, 얼핏 보아선 제단과 비슷한 것이 중앙에 솟아있는 그곳의 광경에 누군가가 탄성을 흘렸다. 그리고 탄식 또한 흘러나왔다. 이렇게 공간이 넓다는 것은, 조사하는 데에 긴 시간이 걸린다는 얘기니까. 애초에 조사라고 해봤자 그냥 살펴보고 특이한 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오는 것 뿐이지만…. “여기는 불이 밝혀져 있는데….” 어떤 식으로 조명 문제를 해결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공동의 벽면을 수놓은 수많은 불빛들의 모습에 한 남자 마도사가 중얼거리듯이 내뱉는 말이었다. 지하에 있기에 공기가 정체되어 있거나, 먼지로 뒤덮여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쾌적한 공기에 다시 한 번 놀라는 것이었고…. “자, 쓸데없는 데에 놀라지 말고 빨리 뭔가가 있는지 찾아보자고.” 선두에 서서 통로를 걸었던 이가 다그치는 것에 마도사들은 그제야 본연의 목적을 떠올리고서 그것에 충실하기 시작했다. 각자 흩어져서 유적지 내부의 넓은 지하 공동을 살피기 시작하는 마도사들. “…특이한 양식의 유적인데, 별 다른 건 없어.” “고대 베르카 식이랑 비슷한데…, 여기도 별 다른 건 없는데? 벽면엔 아무 것도 없다고.” 흩어져서 이것저것을 살펴보기 시작하던 마도사들이 저마다 내뱉는 말이 공동의 내부를 울린다. 애초에 마도문명이 자리잡지 않은 세계에서 태어났기에 고대 베르카의 문명이라든지, 유적이라든지에 대한 지식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나노하였지만 대강 훑어봐도 뭔가 특이점이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물론 자신들은 전문적으로 조사에 전념하는 국원들이 아닌, 어디까지나 처음으로 현장에 파견된 새내기들이었지만. 현장에 대한 지식이라곤 아직까지는 교본에 실려 있던 것과 교육받았던 기초적인 것뿐이었기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발견해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동반하였던 것이, 현장에서 뼈가 굵어있는 인솔 국원이어고. 그가 바로 통로에서 선두에 섰던 남자이기도 했다. 그의 눈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잡히고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나노하는 유적의 공동 내부를 살피는 것을 관두곤 그가 뭘 하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다른 국원들이 유적 내의 벽면이나 바닥을 조사하고 있는 동안, 그는 제단처럼 공동의 중심에 솟아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제단과도 같이 보이는 시설물의 가장 위쪽엔 무언가를 봉인해둔 것 같은 함이 놓여있었고…. “뭔가 특별한 봉인이 있는 것은 아닌데….” 자물쇠도 없이, 그저 뚜껑으로 닫혀있을 뿐인 함을 보며 그가 중얼거리는 말을 나노하는 들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경계하면서 스토레이지 디바이스를 겨누곤 그 함의 뚜껑을 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뿜어지는 은은한 붉은 빛에 모든 국원들의 시선이 제단 쪽을 향해졌다. 함의 뚜껑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붉은 빛을 띤 보석과도 같아보이는 결정체. 아름답다고 해도 좋을 그 모습에, 다가왔던 국원들의 표정이 멍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그들은 실제로 이것이 무슨 보석과도 같은 것은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었으나…. “…이런 제기랄.” 함을 열었던 국원의 표정만큼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일그러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렐릭(Relic)….” 그는 이 붉은색 결정체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대강이긴 했지만, 이것이 로스트 로기아에 속하는 것이라는 사실과 실제로 지금 시공관리국 측에서 몇 개를 찾아내어 보관하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용도를 알 수 없는 로스트 로기아, 렐릭. 그 역시 소문으로만 들었던 것이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용도를 알 수 없다는 점이 더욱 경악스럽게 만드는 것이었고…. 용도를 알 수 없다는 말은, 언제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할 게 없다는 뜻이다. 이 자리에서 폭발을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그것을 발견한 것이 자신, 그리고 자신이 인솔한 새내기들이라는 것에 더욱 그의 표정이 참혹해졌다. “…로스트 로기아다. 일단은 이것을 회수해야겠군.” 하지만 발견해버린 이상, 이것을 그냥 내버려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현장에서 나름 잔뼈가 굵은 그로서도 조금은 두렵거나 했지만 자신의 일에 충실히하기로 했다. 다행히 함의 크기는 그다지 크지 않아서 힘을 합하면 충분히 들 수 있다. 그래서 그는 함 주위에 방어 결계를 친 뒤 신체가 건장한 남자 국원 몇을 불러서 그것을 들게 하려고 했고…. 그때, 국원들의 귀에 들려오는 것은 기계의 요란한 기동음. “크억─” 그리고 누군가의 단말마 비명소리였다. 비명소리에 깜짝 놀라서 시선을 돌렸고 그곳엔 몸에서 피를 뿜고 있는 국원의 모습이 보여왔다. 마치, 배후에서 무언가 칼날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가슴팍에는 칼에 찔린 것 같은 큰 상처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그 피에 젖어서 보이는 것은, 초승달 형태를 띤 갈고리 같은 칼날.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강철로 이루어진 기계병기. 거미와도 같은 다리를 가진, 실제로 거미라 봐도 무방한 형태의 기계병기가 동체에 부착된 칼날로 국원의 몸을 꿰뚫었던 것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그것에 모두는 놀랐다. 그리고 국원 한 명을 동체의 칼날로 찔러 죽인 그것을 선두로, 여기저기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수많은 질량병기들. “제기랄, 설마 기다리고 있었던 거냐?!” 누군가가 흘리는 이 말. 하지만 인솔 국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 기계병기들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기보다는 저것들이 자신들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지금도, 통로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기계병기들이 꾸역꾸역 밀려오고 있었으니까. “모두 한 곳으로 모여! 흩어지지 마!” 엄청난 물량에 포위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 이런 상황이라면 흩어져서 따로 당하는 것보다, 한 곳에 모여서 포위하고 있는 것들에게 포격이나 사격을 사용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해서 외친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기다리지 않고 움직이는 질량병기들. 흩어져있던 마도사들에게 달려들어 동체에 부착된 칼날을 꽂아넣어갔다. 피가 튀기고 비명이 울려퍼진다. 그 처참한 모습에 한 군데 모이는 데에 성공했던 마도사들은 질량병기들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다. ‘…AMM이 아니야…!’ 그리고 그들의 포격 마법에 질량병기들이 부서지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나노하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대 AMF에 대한 교육을 받을 때, AMF 장치의 효과범위 내에 들어간 포격 마법은 거의 대부분이 무효화되었던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의 저것들은 포격 마법을 무효화시키지 못하고 그것에 파괴당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노하는 레이징 하트를 들고 엑셀 슈터를 사용했다. “슛!” 도합 10발의 엑셀 슈터를, 한 마도사에게 달려들어 칼날을 꽂으려 하는 질량병기에게 집중시킨다. 다중 탄각을 입힌 엑셀 슈터가 아니다. 보통의, 특별한 처리가 되지 않은 엑셀 슈터. 만약 저것들이 AMM이라면 보통의 엑셀 슈터는 동체에 명중하기 전에 사라졌어야 한다. 하지만 10발의 엑셀 슈터는 그것의 동체에 모두 적중하여 완전히 파괴시켜놓는 것이었고…. “고, 고마워…!” 어린 동기가 자신을 구해줬다는 사실에 아까까지만 해도 죽을 뻔 했던 마도사는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서, 황급히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었다. AMM이 아닌 기계병기라면 마법을 완벽히 무효화시키지는 못한다. AMM이 아니라는 사실에 나노하는 망설이지 않고 다시금 10발 남짓의 엑셀 슈터를 만들어 그것을 쏘아보냈다. 보통이라면 포격 마법을 사용하여 한꺼번에 많은 수의 질량병기들을 파괴했겠지만 지금의 장소는 지하의 공동이다. 섣불리 포격마법을 사용했다간 오래된 유적과 불안정한 지반이 그 위력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되면 모두가 꼼짝없이 매몰될 것이니…. 희미한 불빛이 어둠을 가까스로 밝히고 있을 뿐인 지하 공동 안에 빗발치는 사격 마법의 불빛들. 하지만 통로를 통해 계속 밀려들어오는 기계들의 숫자는 엄청났다. 부수는 숫자보다도 충원되는 숫자가 많았고 그에 따라 비명소리는 늘어만 갔다. 사격 마법의 탄막은 옅어져만 갔다. “…!” 정신없이 엑셀 슈터를 만들어내고 쏘아대고 있는 나노하의 눈에 들어오는 건, 질량병기들의 칼날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고 있는 마도사들의 모습. 또 다른 마도사의 팔이 잘려나가는 참혹한 모습에 이를 갈게 되었다. 그리고 엑셀 슈터를 발사시키는 나노하. 어린 소녀 마도사는 자신의 안위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챙기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몸도 추스르지 않고 계속해서 사격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급격한 마력의 소모를 가져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소녀는 사격 마법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결계까지 쳐주고 있었다. 나노하에겐 재능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양의 마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이 아닌 집단에서의 전투에서 발휘되기가 힘들다. 집단끼리의 전투는 혼자서 싸우는 것이 아닌, 여럿이서 함께 싸우는 것이니까. 게다가 그것이 신출내기인 마도사들의 집단이라면 더더욱 어렵게 된다. “안 돼…!” 그리고 또 다시 다른 마도사들이 살해되는 광경을 두 눈으로 보게 되자 나노하는 이성을 반쯤 잃은 상태로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미친 듯이 사격 마법인 엑셀 슈터를 난사해대었고 그것에 많은 수의 질량병기들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이제야 막 알에서 부화한 새끼 거미 떼처럼 그것들은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마도사들의 숫자는 줄어만 가고 탄막은 옅어져만 간다. 그리고 질량병기들의 포위망은 좁혀져마 왔고…. 절망적인 상황,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든 혼자서라도 헤쳐나가기 위해 어린 마도사는 안간힘을 썼다. 비록 자신보다 나이가 많긴 하지만 동기이다, 함께 교육을 받아온 이들이 저 곳에 있다. 게다가 지금도 질량병기들은 자신들이 들어온 통로를 통해 들어왔다. 그건 곧 바깥에 있는 이들도 이것들과 교전을 벌이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들을, 그리고 그들을 지켜야 한다. 이 생각만이 어린 소녀의 사고를 뒤덮었고…. 그것은 소녀 본인의 안위에 대해서도 잊게끔 만들었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질량병기가 아닌, 타인을 향해 달려드는 질량병기들에게만 엑셀 슈터를 발사하는 나노하. 그리고 나노하는 자신의 배후에서 칼날을 겨누곤 빠르게 달려드는 질량병기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Master!】 그것을 눈치 챈 레이징 하트가 주인을 부르는 소리. 【Protection!】 그리고 인텔리전트 디바이스 답게, 자체적인 판단을 통해서 방어 마법을 사용하는 레이징 하트. 그 덕에 나노하의 배후를 겨누고 달려들었던 질량병기의 칼날은 방어 마법에 막혀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 틈에 먹이에 달려드는 개미떼처럼 몰려오는 질량병기들. 낭패라는 듯이, 곤란하게 되었다는 듯이 혀를 차면서 나노하는 그것들에게 엑셀 슈터를 발사하여 파괴했다. 정신없는 난전. 자신의 안위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안위까지 신경쓰게 되어버린 나노하에게 있어서 난전이었다. 한정된 공간에서의 난전은 원거리 타입의 마도사에게 있어서, 가지고 있는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인 셈이다. 만약 싸우고 있는 공간이 탁 트여있는 외부였다면 포격 마법으로 한꺼번에 파괴시킬 수 있었을 텐데. 장소의 제약.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한정. 그리고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전투. 이것들이 나노하의 마도사로서의 능력이 발휘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되었고 그것은 너무나도 치명적인 결과가 되어 나타났다. “…!” 다른 이들에게 달려들려던 질량병기를 향해 엑셀 슈터를 발사하려던 찰나─. 차갑고 싸늘한 것이 몸을 꿰뚫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의 뒤를 이어 끔찍한 고통이 몰려오며 뜨거운 액체가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도…. 【Master!】 레이징 하트의 외침. 그리고 나노하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꿰뚫은 칼날을 두 눈으로 보게 되었다. 자신의 몸을 꿰뚫은 질량병기의 칼날을 보게 되자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것만 같았다. 발사하려던 엑셀 슈터의 빛이 흐려지더니 사라졌다. 칼날이 빠져나가자 소녀의 작은 몸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유적의 차디 찬 바닥에 쓰러진다. 눈꺼풀 서서히 감겨오는 것에 필사적으로 저항해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초점이 희미해지는 눈으로, 나노하는 자신의 몸을 꿰뚫은 질량병기가 다른 이들에게 달려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레이징 하트를 쥔 손에 점점 힘이 빠져갔다. 죽는 걸까? 두려웠다, 이런 공포를 느낀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처음으로 죽음이란 것과 이웃하게 된 것이다. 죽고 싶지 않다. 이 단순한 생각만이 나노하의 머리에 울려 퍼지는 것이었고…. 그것을 끝으로, 나노하의 의식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 * * * * * 마지막 마도사의 몸에 질량병기 세 대의 칼날이 꽂히는 것으로, 사격마법의 탄막은 끝을 맺었다. 인간들의 피가 낡고 오래된 유적의 메마른 바닥을 적셨다. 그리고 질량병기의 장갑에 얼룩져있었다. 기계의 파편들과 뒤섞인 마도사들의 사체. 그리고 부서지지 않고 살아남은 기계들은 자신들이 칼을 꽂아넣었던 시체들에게 다시금 칼을 꽂아 넣기 시작했다. 확인사살이라고 하는 행위를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바이탈을 확인할 수 있음에도, 그것들은 바이탈이 완전히 정지한 사체에까지 무자비한 칼날을 쑤셔 넣었고 그렇게 마도사들의 사체는 회손되었다. 지극히 기계적인 움직임. 죽어있는 자도, 아직 죽지 않은 자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꽂히는 예리한 칼날. 다시금 피가 튀었다. 그리고 그것들의 기계적인 행동은 제단의 아래쪽에 쓰러져있는, 하얀 배리어 재킷을 피로 물들이고 쓰러져있는 어린 마도사도 피해낼 수가 없었다. 제단의 위쪽부터 차근차근 쓰러진 마도사들에게 칼을 꽂아넣은 질량병기 중 하나가 쓰러져있는 소녀 쪽으로 접근해왔다. 【바이탈 잔류, 섬멸 명령 이행.】 기계는 어린 마도사의 생명이 아직 꺼지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그냥 두더라도 죽게 되겠지만 그것은 다른 기계들이 행하는 것처럼, 생명을 마저 끊기 위해 칼날을 들이대는 것이었고. 그리고 그것을 높이 쳐들어 꽂아 넣으려고 할 때─ 【이상 발생, 기체 내 온도 급락─】 갑자기 기체의 내부에 발생한 이상현상에 작동을 중지했다. 쓰러진 소녀의 목을 꿰뚫으려다가 멈춰서는 칼날. 그리고 이어서 무척이나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그것으로부터 들려왔다. 질량병기는 주어진 AI를 통하여 스스로가 내부에 생긴 문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것으로 인해 기체의 내부의 온도가 급강하하면서 안으로부터 얼어붙어간다. 금속이 빠르게 얼어붙어가는 기분 나쁜 소리가 공동 내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마침내, 내부뿐만이 아니라 외부의 장갑까지 얼어붙게 되었을 때. 그것은 동작을 아예 멈추는 것이었고─ “아아… 이게 뭐야, 끔찍하구먼.” 그리고 들려오는 ‘인간’의 목소리에 마도사들의 사체에 칼날을 꽂던 기계들이 하던 일을 멈추었다. ‘인간’이었다, 술에 취한 사람처럼 흐느적거리고 있는, 온몸을 검은 로브로 가리고 있는 인간.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어린 애한테까지 칼날을 들이대면 쓰나…?” 그것은 아까까지만 해도, 쓰러져있던 나노하에게 칼날을 꽂으려 헀던 질량병기에게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기계에게 사람과 대화하듯이 말을 건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웠지만…. 질량병기들의 동체가 그에게로 향해졌다. 그것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상대방을 분석한다. 기계들이 바이탈 측정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상대방이 인간이라는 것. 아까의 질량병기가 얼어붙게 된 것이 마력 원소의 작용으로 인한, 소위 마법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것으로 인한 것이라는 것도…. 그는 공동 내의 처참한 광경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처럼,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피가 얼룩진 바닥을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곤 얼어붙은 질량병기에게로 다가왔고─ “안되지, 그러면….” 왼손을 뻗어 그것을 후려쳤고, 얼어붙은 질량병기는 얼음이 부서지듯 산산조각이 났다. 그 행동, 아군의 기체를 파괴한 것이 명백해진 그를 마도사로 규정한 질량병기들은 주저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수많은 마도사들의 피가 묻어있는 칼날을 세우고서, 먹이를 발견한 개미 떼처럼. 피범벅이 된 질량병기의 무리가 자신에게 달려드는 것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검은 로브로 온몸을 감싸고 있던 그가 고개를 쳐든다. “얼어붙어라─.” 고개를 들자 드러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광대가면. 이어서 발 밑으로 펼쳐지는 삼각형 형태의, 은빛을 띤 베르카 식의 마법진. 요즘 쓰이는 근대의 베르카 식이 아닌, 고대 베르카 식의 마법진. 게다가 그 크기또한 방대해서, 엄청난 양의 마력이 빠르게 수렴해가는 것이었고─ “「긴눙가가프(Ginnungagap)」─.” 마력 원소의 급증, 빙한(氷寒) 계통 광역 마법의 행사. 그것은 광대 가면의 사나이에게 달려들려 했던 질량병기들의 인공지능이 마지막으로 판단했던 것이었고. 그것들은 그것을 끝으로 동시에 그 자리에서 모두 다 얼어붙어버렸다. 순식간에 수십 대의 질량병기들이 얼어붙었다. 마도사들의 사체는 멀쩡했으니까, 그것은 그가 질량병기들만을 추려서 얼려버린 것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처럼 모두 제자리에서 얼어붙어버린 질량병기들의 틈 사이를, 춤추는 것처럼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유유히 걸어가는 광대. 광대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제단의 최상부, 수많은 마도사들의 사체가 굴러다니고 있는 곳이었고 또한 렐릭이라는 로스트 로기아가 감춰져있던 함의 앞이기도 했다. “렐릭… Relic…, 유물이라….” 노래를 읊는 어투의 목소리는 남성의 것. 그리고 그는 왼손을 뻗어 함에 봉인되어 있던 렐릭을 집어 들곤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낄낄거리던 그의 어깨가 떨리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로스트 로기아 렐릭을 쥐고 있던 그의 왼손에 악력이 가해졌고─ “계집애 같은 놈.”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경멸기가 가득한 말을 내뱉었고 동시에 렐릭이 부서져버렸다. 마력이라든지 하는 것으로 부순 것이 아니다. 단순한 악력으로 결정 형태의 로스트 로기아, 렐릭을 부순 것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그것을 보고 있었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겠지만…. 애석하게도 그곳에 살아있는 이는 없었으니까, 딱 한 명을 빼곤. 그나마 그 한 명도 거의 죽어가고 있었고 말이다. 맨손으로 렐릭을 부서뜨리고 제단에서 천천히 걸어내려온 그의 시선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쓰러져있는 하얀 배리어 재킷의 어린 마도사에게로 향해졌다. 광대 가면 속에 감춰진 그의 눈동자가 어린 마도사의 상태를 살폈다. 아직 살아있다, 이대로 두면 죽겠지만. 미약하게나마 숨이 붙어서 작은 몸이 움직이는 것을 보며 그는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유쾌하다는 듯이. “꼬마 아가씨는 참 운이 좋군.” 이름모를 이, 작은 마도사 소녀가 자신과 만난 것은 진심으로 행운일 것이라 광대는 생각하며 지껄이는 말. “최소한, 다른 녀석들처럼 죽지는 않을테니까.” 광대는 나노하에게 다가가더니 손을 휘저었다. 그 움직임에 은빛을 띤 베르카 식의 마법진이 나노하를 중심으로 펼쳐졌고 소녀의 몸에서 쏟아지던 피가 서서히 줄어들어 갔다. 피를 멈추고 외상을 회복하는 간단한 치료 마법. 하지만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그것은 곧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고…. “이유 없는 싸움은 짐승들이 하는 다툼과도 똑같아─.” 그는 자신이 사용한 치유마법으로 인해 출혈이 멈춘 나노하의 몸을 들어 올리면서 중얼거렸다. 듣는 이가 없음에도 말이다, 마치 나노하에게 말하는 것처럼. “그대는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어린 아가씨? 큭큭큭….” 그리고 그는 즐겁다는 듯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이면서 의식을 잃은 나노하를 어깨에 들쳐 맨 채 바깥의 통로를 향해 유유히 걸어 나가는 것이었다. “제기랄, 이 고철덩어리 자식─!!”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붉은 기사 갑주를 입은 어린 기사의 철퇴가 눈앞을 막고 있는 강철 덩어리를 두드렸다. 하지만 그 공격은 거대한 모터사이클의 형태를 한 질량병기, AMM 육전형의 장갑을 일그러뜨리는 데에 그치는 것이었고. 그것에 더욱 화가 뻗쳤던지 해머가 더욱 강하게 휘둘러졌다. 철퇴의 기사가 휘두르는 해머에 AMM 육전형은 바퀴를 빠르게 굴려서 후진하여 그것을 피해내는 것이었고…. “방해하지 마란 말이다, 이 망할 자식아…!” 유적의 외부에서 조사를 하던 자신들이었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거미를 떠올리게 하는 특이한 형태의 질량병기들과 마주치게 되었고 그것들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자신의 디바이스인 그라프 아이젠으로 때려 부수면서, 비타는 그것들의 무리들 중 반절이 유적으로 들어가는 통로로 내려가는 것을 보게 되었던 것이고…. 거미를 떠올리는 형태의 질량병기들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을 땐, 비타는 깜짝 놀랬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아무 것도 없던 곳에서 급작스레 엄청난 숫자의 그것들이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그리고 그것들과 싸우면서 알아낸 것이, 이것들에겐 모습을 감추는 기능이 있다는 것이었다. 공격은 단순히 동체에 달린 칼날로 공격하는 것이었으나 그건 배리어 재킷을 찢기 충분했다. 유적지의 지하라면 어둡고 좁은 공간일 것이다. 습격당하기엔 안성맞춤이고 질량병기들은 스텔스 기능으로 추정되는 것까지 보유했으니까. 그리고 유적지 내부로 들어갔던 조사팀 중, 자신이 알고 있는 이가 떠올랐다. “빌어먹을 자식, 단단하잖아…!”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서, 거미 형태의 질량병기들을 파괴했던 것이 바로 이 AMM 육전형들이었다. 비타나 다른 마도사들로서는 말로만 들었지 처음 접해본 AMM 육전형. 그리고 그것들이 유적의 내부로 내려가려던 것을 막아섰던 것이고…. “비키란 말이야!” 반쯤 이성을 잃어버린 눈을 하고서, 비타는 악을 질렀다. 하지만 기계가 그것을 알아들을 리는 없었다. 장갑이나 방어를 때려부수는 것은 자신의 특기라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라프 아이젠의 공격에도 장갑이 일그러질 뿐인 AMM 육전형에 이를 가는 비타. “진정해, 비타.” “하지만, 안에 나노하가… 나노하가…!” “진정해라.” 만약 시그넘이 옆에서 진정하라는 말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진즉 이성을 잃었으리라. ‘…뛰어난 인공지능이로군. 안에 조종하고 있는 사람이 타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그라프 아이젠이 장갑을 파괴시키지 못했다고 비타의 공격이 약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시그넘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라프 아이젠과 충돌하기 직전에 회피기동을 한 거야.’ 알아차리기 힘들었지만 겨우 알아차렸다. AMM 육전형이라고 하는 이 질량병기의 장갑이 어째서 부서지지 않았는가를. 간단했다, 그라프 아이젠이 부딪치기 전에 회피기동을 했던 것이니까. 공격을 피하기 위한 회피기동이 아니라, 타격을 최소화시키기 위한 회피기동을. 그라프 아이젠이 부딪치기 전, 후진하는 회피기동을 통해 충격을 최대한 줄였던 것이다. AMF라는 장치에 대해서는 다중 탄각 사격 마법이라는 해법이 나와 있었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마도사들 중에서 그것으로 AMM을 완벽하게 파괴시킬 수 있는 마도사는 없었다. 그래서 그것들은 너덜너덜해져 있을지언정, 파괴된 것이 단 한 대도 없었던 것이고…. 시그넘이 아까까지만 상대하고 있었던 AMM 육전형의 상태가 그나마 가장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대형이 바뀌었군.’ 한창 접전을 벌이던 AMM 육전형 12대가, 갑자기 싸우던 것을 멈추고 유적지의 입구에 대형을 이루고 멈춰 선다. 이전까지의 대형과는 다른, 자리를 지키기 위한 대형이었다. 그것들의 갑작스러운 공수 전환에 시그넘은 의아해졌다. “아아, 뭐야… 넝마조각이 됐잖아….” AMM들이 둘러싸고 있는 입구에서 들려오는, 안타깝기 그지없다는 목소리에 시그넘을 포함한 다른 이들의 시선이 향해진다. “이것들이 만드는데 얼마나 오래 걸리는 녀석들인데, 이렇게 만들어 놔버리다니….” 그 목소리의 주인은 장갑이 너덜너덜해져있는 몇 대의 AMM들을 보며 울먹이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이 입구에서 걸어나와 모습을 드러내자, 마도사들은 경악했다. “…나노하!!” 경악에 물들어있는 비타의 외침. 배리어 재킷을 피로 붉게 물들인 채, 모습을 드러낸 자의 어깨에 걸쳐져있는 마도사 소녀는 나노하였으니까. “비타!” 그리고 자신의 동료가 그것을 보자마자, 완전히 이성을 잃어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는 것에 시그넘은 비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비타는 멈추지 않았다. 뛰쳐나가면서 그라프 아이젠의 형태를 라케텐 폼으로 전환시켜서, AMM들에 둘러 쌓여있는 자에게 달려들었다.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시그넘은 낭패라고 생각하면서, 저런 상황에서 AMM들에게 포화를 받기라도 한다면 비타가 꼼짝없이 당할 거라 생각했다. “어우…, 무서워라….” 검은 로브와 우스꽝스러운 가면으로 모습을 가리고 있는 남자로부터 흘러나오는 말. 하지만 그 어투는 무섭다기보다는 우습다는 기색이 짙었다. “…큭?!” 그리고 그와 동시에, 라케텐 폼 상태의 그라프 아이젠을 들고 뛰쳐나간 비타의 몸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멈춰서버렸고,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본 비타는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다리가 얼어붙어있었다, 땅에. 영문도 모른 채 다리가 얼어붙어서 땅에 달라붙어버린 것에 비타는 크게 당황했다. “비타!!” 달려들려다가 도중에 발이 묶여버린 비타의 모습에 고함을 치며 뛰어드는 시그넘. 지금 상황에서 AMM들의 포격이 집중되면 꼼짝없이 당하게 될 것이었기 때문에, 최소한 감싸기 위해서 뛰어든 것이었다. 하지만 절호의 기회임에도 AMM들의 광선 포격은 발사되지 않았다. 그것에 비타의 앞을 막아선 시그넘은 의아해하는 것이었고…. “아아, 그렇게 놀라서 뛰어나올 필요는 없는데…. 애들한테는 피흘리게 하지 않는 성격이라서 말이야.” AMM들의 중심에 서 있는 남자가 낄낄거리면서, 손을 내저으며 하는 말. “웃기지마! 나노하를, 나노하를 그렇게 만든 주제에!!” 애들한테는 손을 대지 않는다. 자신을 어린애로 취급하는 이 말과, 나노하를 저렇게 만들어놨으면서 천연덕스럽게 그딴 말을 지껄이는 것에 비타가 악에 바친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었고…. 그 외침에 상대방은 한참이나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아아, 이 꼬마 아가씨 이름이 나노하인가? 꼬마 기사한테 하나 배웠구먼….” 손가락을 튕기면서 이렇게 지껄였다. “미리 말해두자면, 난 이 아가씨를 이렇게 만들지 않았다고. 아무리 나라도 괜스레 없는 죄를 뒤집어쓰는 건 싫거든.” 그리고 그는 AMM들의 틈사이를 지나 걸어오더니, 레반틴을 들고 서 있는 시그넘의 앞으로 다가왔고 어깨에 메고 있던 나노하를 그 앞에 눕혀 내려두었다. “너희들의 동료겠지?” “….” “데리고 가라. 죽지는 않았으니까.” 여차하면 레반틴으로 공격을 하려고 했었던 시그넘이었지만 무기도 들고 있지 않은 상대에게 그러고 싶지는 않았고, 적의가 없었던 모습이었기에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에 멍해졌다. 배리어 재킷이 찢어진 부분과 묻어있는 피의 양을 보면 치사량에 이르렀다 생각했건만 살아있다니? 상대방이 이렇게 말하는 것에 나노하의 상태를 살펴보니 더 이상의 출혈도, 상처도 없었다. “…당신이 치료한 겁니까?” 큰 부상을 입었던 걸, 이 남자가 치료해줬을 것이라 생각해서 묻는 말. 답은 없었다. 배리어 재킷이 찢어진 형태를 보아, 시그넘은 나노하의 부상이 이전의 거미 형태와 같은 질량병기에 의한 것이라는 걸 대충 짐작하는 것이었고….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비록 나노하를 구해주는 호의를 베풀었다고는 하나─ 상대방은 필시 AMM과 연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 AMM은 근래에 수많은 범법행위를 저지른 질량병기. 그가 그것들을 지휘하는 것처럼 다루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는 사실이었고 시그넘은 상대방이 대화가 통할 것이라 생각해서 최대한 정중하게 한 말이었으나… “─거절한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 가면의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당치도 않다는 답변이었다. “내가 미쳤다고 시공관리국에 잡혀가겠나? 킥킥킥….” 그리곤 뒷걸음질을 치면서 그는 시그넘과 거리를 벌렸다. “시공관리국은…” “─지금이라도 귀하가 수사에 협조한다면 귀하를 범법자가 아닌 참고인으로 대우할 것이며, 최대한의 선처를 취할 것입니다, 겠지?” 다시 한번 상대방을 설득해보고자 말을 하려했던 시그넘이었지만, 상대방이 자신이 하려던 말을 그대로 꿰뚫곤 선수를 친 것에 입을 다물었다. “미안하지만 난 시공관리국에 잡혀가지 않아. …아니, 잡혀간다기보다는 시공관리국이 날 잡아갈 힘이 없는 거겠지만….” “….” “날 잡아가고 싶으면, 힘으로 잡아가라고. 기사 아가씨.” 제 발로 잡혀가진 않는다, 시공관리국은 자신을 잡아갈 힘이 없다, 잡아가고 싶으면 직접 힘으로 잡아가봐라. 도발기가 잔뜩 묻어있는 이 말에 시그넘은 아래로 내리고 있던 레반틴을 다시금 굳게 쥐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로 향했다. 암드 디바이스를 겨누는 시그넘의 모습에, 유쾌한 듯이 낄낄거리는 웃음을 흘리는 상대. “검이라…, 그래. 기사는 검을 들어야 제 맛이지, 안 그래?” 이 말을 내뱉고 그는 오른손을 뻗었다. 그리고 허공에서 나타나, 그의 오른손에 들리는 것은 시그넘의 레반틴과 마찬가지인 장검 형태의 암드 디바이스. 차이점이 있다면 카트리지 시스템이 적용되어있지 않은, 레반틴보다 좀 더 가늘고 기다란 형태라는 것뿐이었다. “…물러서, 비타.” “시그넘…!” “넌 빨리, 타카마치를 의료반에 데리고 가도록. 이 자는, 내가 상대할테니….” 레반틴으로 다리에 얼어붙은 얼음을 깨부서주면서, 비타더러 나노하를 데리고 가라 말하는 시그넘이었다. 볼켄 리터 중에서도, 시그넘은 기사라는 것의 긍지를 중요시 여긴다. 일대 다수의 싸움은 원치 않으니까, 게다가 아무리 상처가 회복되어있다고는 하지만 중상을 입었던 나노하를 비타더러 데리고 가라는 것이었고…. 시그넘의 발밑으로 펼쳐지는 고대 베르카 식의 마법진. 그리고 시그넘의 발밑에 마법진이 펼쳐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의 발밑에 은빛의 고대 베르카 식의 마법진이 펼쳐졌다. ‘…고대 베르카 식…?’ 고대 베르카 식의 마법진에 시그넘을 놀랄 수밖에 없었고…. 그것도 그럴 것이, 고대 베르카식을 사용하는 이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기껏해야 근대 베르카 식이라 하여, 최근의 마도사들이 사용하기에 적합하게 맞춰진 것뿐이었고…. ‘…기사인 건가.’ 검의 형태를 띤 암드 디바이스, 그리고 고대 베르카 식의 마법진. 그것에 시그넘은 약간의 동질감을 느끼면서, 상대방 역시 기사라고 생각했다. “볼켄 리터, 검의 기사 시그넘. 그리고 불꽃의 마검 레반틴. 당신의 이름은?” 그래서 나름의 예의를 갖춰서, 이름 모를 기사에게 묻는 것이었고…. 시그넘이 이름을 물어오자 상대방은 답이 없었다. 그리고 뭔가 작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작은 낄낄거림. “기사라…, 이름이라…, 큭큭….” “….” 작은 낄낄거림은 이내, 시그넘의 귀에 확실히 들려올 정도로 커져있었다. “애석하지만 말이야, 기사 아가씨. 아리따운 아가씨가 물어봐도, 난 답해줄 말이 없군. 애초에 남에게 버젓이 말해줄 만한 이름이 아닐 뿐더러, 기사 따위였던 적은 없거든.” “뭐…?” “난 『기사 따위』가 아니야. 그냥 평범한 한 명의 『광대』일 뿐….” 『기사 따위』, 그리고 『광대』. 이 말에 시그넘의 미간이 구겨진다. 고대 베르카 식의 마법을 사용하고, 검의 형태를 띤 디바이스를 가지고 있다면 기사라 불러도 무방하다. 그런데도 본인이 『기사 따위』라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광대』라 칭하는 것은 『기사』라는 개념을 대놓고 모독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었고…. “네놈, 네놈도 기사면서 그딴 말을…!” “말하지 않았나? 난 『기사 따위』의 허울 좋은 감투를 쓴 적은 없다고….” 나노하를 치료해주었다. 동료를 구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리고 고대 베르카 식의 기사라는 동질감으로 품었던 아주 약간의 호의는 상대방이 했던 말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레반틴!” 【Explosion!】 그리고 시그넘은 레반틴이 카트리지를 내뱉음과 동시에, 검신에 불꽃을 머금자 그것을 쥐고 상대방에게 달려들었고─ “「울레르(Uller)」─” 불꽃의 마검을 들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기사의 모습에, 『광대』는 가면 건너편의 얼굴에 웃음을 머금곤 자신이 들고 있는 검의 이름을 중얼거렸고─ 시그넘이 불꽃을 머금은 레반틴을 휘두르는 것에, 광대는 오른손에 든 그의 디바이스인 「울레르(Uller)」를 휘둘러 맞받아친다. ‘…!’ 기사 대 기사의 싸움에서는 보통 선제 공격을 하는 쪽이 방어를 하는 쪽보다 유리하게 먹고 들어가기 마련이라는 것을 시그넘을 알고 있었다. 한번 얻게 된 공격의 주도권을 상대방이 얻어내긴 위해선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그넘은 레반틴과 울레르가 부딪치고, 힘겨루기를 하는 형세가 되었을 때 황급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빙한 계통….” 레반틴이 머금고 있던 불꽃이 서서히 사그라지고, 그와 동시에 검신에 새하얀 서리가 끼어있는 것을 그녀는 느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틈엔가, 자신의 기사 갑주 일부분이 얼어붙어 있던 것도 발견했다. 고대 베르카 식의 기사. 그리고 빙한 계통의 마력 변환. 이 둘 중 어느 것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빙한 계통의 마력 변환의 경우는 무척이나 희귀한지라, 디바이스에 의존하는 경우를 뺀다면 시공관리국 내에서도 몇 안 되는 마도사들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자신이 참격을 휘둘렀을 때에 맞받아친 상대방은 흔들리지 않았다. 시그넘은 상대방이 일부러 자신을 봐준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레반틴의 염열(炎熱)을 사그라지게 만들고,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틈에 기사 갑주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통째로 얼려버리는 것도 할 수 있었으리라. “네놈, 정체가 뭐냐….” 이 자는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다는 생각을 하면서 묻는 말. “아가씨, 내 이름이 알고 싶다고 했었던가?” 하지만 엉뚱한 말을 하는 광대. “이름이라고 하기엔 많이 모자라지만… 그거라도 상관없다면 말해줄 수도 있어.” “….” “아가씨가 내 이름을 들을만한 자격이 있는 기사라는 것을 증명해보였을 때의 얘기지만서도. 아가씨가 날 꺾는다면 내 이름을 가르쳐주도록 하지.” 어깨를 들썩이면서, 웃음을 터뜨리며 광대가 하는 말. “물론, 아가씨가 할 수 있을거라곤 생각지 않지만….” 아까 전 같았으면 시그넘은 상대방이 자신을 우습게 알고, 기사를 모욕하는 그 행위에 분개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은, 그 실력의 깊이도 알 수 없다는 말이니까. “…듣고 말겠다, 그대의 이름….” 그리고 시그넘은 평정심을 되찾곤, 상대방과 거리를 좀 더 벌린 뒤 냉정한 표정으로 표면에 서리가 어린 레반틴을 검집에 다시 되돌리는 것이었고─ “레반틴!” 부름 받은 디바이스가 응답하듯이, 칼집에 끼워진 채로 카트리지를 토해낸다. 【Schlange Form!】 그리고 시그넘이 레반틴을 칼집에서 뽑았을 때, 레반틴의 검신은 이미 한 마리의 뱀처럼 돌변한 모습으로 가만히 서있는 광대에게 쏘아져갔고─ 광대는 슈랑게 폼 상태를 취한 레반틴의 검신, 슈랑게 하이센이 뻗어오는 것에 오른 손에 쥐고 있는 울레르로 맞받아치는 것이었다. 슈랑게 폼 상태의 레반틴이 채찍처럼 몰아쳐왔다. 그것을 광대는 오른 손에 들고 있는 장검으로 맞받아쳐서 튕겨냈다. “난잡하구먼, 그렇게 움직여 대서야 나보다 먼저 지치고 말거라고?” 일사분란하게 레반틴을 움직이며, 슈랑게 하이센으로 공격을 해오는 시그넘에게 광대는 낄낄거리면서 조롱하는 말을 내뱉었다. 폭풍처럼 광대의 주변을 감싼 뒤, 몰아쳐오는 레반틴의 슈랑게 하이센이었으나 광대는 그것을 너무나도 간단하게 쳐내고 있었던 것이다. 오로지 울레르를 들고 있는 한 손으로, 별 다른 마법도 사용치 않으면서 말이다. 그것에 시그넘은 상대방이 자신을 얕잡아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가는 것이었고…. “이건 어떠냐!” 오만함을 부서 주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공격이었다. 채찍처럼 이리저리 움직여대던 슈랑게 폼 상태의 레반틴이, 광대의 주변을 감싸더니 한꺼번에 조여들기 시작했다. 빠져나올 수 있을만한 틈은 없었고…. 잡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시그넘은 레반틴을 통해 마력을 전달시켜서 레반틴의 슈랑게 하이센에 마력을 머금게 한 뒤 광대를 둘러싼 그것들을 조여들어갔다. 이동계 마법이 아닌 이상엔 빠져나올 수가 없다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광대가, 아무 것도 들려있지 않은 왼손을 들더니, 공간을 조여오던 슈랑게 하이센을 붙잡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맨손으로 마력이 덧씌워진 슈랑게 폼 상태의 레반틴을 붙잡았다. “중거리에 특화되어 있는 공격…. 나름 독특한 기술인데?” “…큭!” 마력을 통한 강화가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맨손으로, 검날이나 마찬가지인 슈랑게 하이센을 붙잡아버린 광대의 행동에 시그넘은 놀라는 것이었고…. “하지만 상대가 나빠.” 그리고 광대가 슈랑게 하이센을 붙잡은 채, 왼손으로 그것을 잡아당기자 시그넘의 몸이 휘청거렸다. 슈랑게 폼 상태의 레반틴의 특성을 이용해, 공격당하는 입장에서 공격하는 쪽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 행동에 시그넘은 조금 당황하면서도 레반틴을 움직여 그것의 검신이 광대의 왼팔을 감싸게 한다. ‘왼팔을 으스러뜨려주마…!’ 왼손으로 슈랑게 하이센을 붙잡은 행동을 후회하게 해 주겠다 생각하며, 나무를 휘감고 올라가는 덩굴처럼 광대의 왼팔을 동여맨다. 그리고 그대로 으스러뜨리려는 것처럼 조여졌다 하지만 시그넘이 그 순간,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 “네놈… 자신의 몸에 손을 댄 거냐?!” 레반틴은 팔을 묶은 뒤 조여들었다. 보통 인간의 팔이었다면 뼈와 살이 으스러져야 마땅했건만, 으스러지는 소리가 아니라 기분 나쁜 쇳소리를 내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오래 전에 왼팔을 잃었거든. 왼팔뿐만이 아니라….” 광대는 키득거리면서 자신의 왼쪽 다리 역시 가리킨다. “왼쪽 다리도. 모두 기계로 만들어진 의수, 의족이야.” 기계로 만들어진 왼팔과 왼쪽 다리. 그리고 광대는 그의 기계 의수를 휘감은 레반틴을 잡고, 그대로 끌어당긴다. 강한 힘으로 끌어당기는 것에 도리어 끌려가게 된 레반틴을 쥐고 있던 시그넘이었고 그와 동시에 광대가 울레르를 휘두르자 레반틴을 원래의 슈베르트 폼으로 전환시켜 가까스로 맞받아쳐 냈다. 이어지는 난격. 허공에서 공격을 막았던 것이기 때문에 시그넘은 공격을 막아냈음에도 내팽개쳐졌고 광대는 그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울레르를 계속 휘두르면서 공격해오고 있었다. ‘공격의 주도권을 넘겨줘버렸어…’ 슈랑게 폼을 사용했던 것은 어찌 보면 최악의 선택이었다. 이 자의 팔이 기계로 이루어진 의수라는 것을 알았다면. 슈랑게 폼 상태의, 채찍과도 같이 변한 레반틴으로 팔을 묶어서 으스러뜨리려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으리라. 차라리 슈베르트 폼 상태에서 접근전을 선택했을 것을…. 화염을 머금은 레반틴으로, 서리를 머금고 휘둘러지는 울레르를 겨우겨우 막아내고 있었으나 시그넘은 밀리고 있었다. “…이런?!” 뒷걸음질을 치면서 상대방이 퍼붓고 있는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던 시그넘은 낭패라는 듯이 내뱉었다. 뒤쪽으로 걸음을 내딛던 발이 무언가에 걸렸던 것이다. 종유석처럼 바닥에 솟아나있는 몇 개의 얼음 덩어리들이 어느 새 돋아나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들은 광대가 만들어낸 것이 분명했다. 뒷걸음질을 치면서 방어에 전념하던 시그넘은 그것을 신경 쓰지 못했고…. 몸이 뒤로 기울어져갔다. 거꾸로 난 고드름 같은 얼음 덩어리들의 끝은 날카로웠다. 이대로라면 땅에서 솟아난 얼음덩어리들이 그녀의 몸을 꿰뚫을 것이다. 그리고 시그넘의 몸은 날카로운 얼음덩어리들 위로 쓰러져가는 것이었고─ “…!” “아무리 뒤에 눈이 없다지만, 그래도 뒤쪽은 좀 신경을 쓰라고.” 얼음에 몸이 꿰뚫리기 직전에, 시그넘의 몸을 잡아채는 것은 광대였다. 만약 광대가 잡지 않았더라면 얼음덩어리에 몸이 꿰뚫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구했다는 생각에 시그넘은 멍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었고…. “어째서….” 적인 자신을 구했다는 것이 시그넘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지만 광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록 가면으로 가려져있었지만 시그넘은 가면 너머의 표정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웃고 있을 것이리라…. 상대방의 손에 더 이상 디바이스가 들려있지 않은 것에 시그넘은 전의를 아예 잃어버릴 수 밖에 없었고…. 레반틴을 들고있던 손을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야 말았다. 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광대는 자신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저, 뒤로 넘어져가는 자신의 몸을 붙잡지만 않았더라도 죽게 되었으리라고 시그넘은 생각했다. 별 다른 마법도 사용하지 않고, 디바이스를 이용한 참격과 마력 변환 능력만을 사용한 상대에게 특별히 무언가를 해보지도 못하고 졌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구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이었고…. “어딜 보고 있는 거냐!” 그때 들려온 것은 비타의 외침. 그리고 광대는 시그넘이 균형을 회복하자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있던 것을 그만 두고 자신의 머리를 향해 휘둘러지는 라케텐 폼 상태의 그라프 아이젠을 피해내었다. “시그넘, 정신차려!” 물론 광대가 시그넘을 구해주었던 것을 비타는 보았다. 그리고 나노하의 상처 역시도 그가 회복해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적이다, AMM들을 지휘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자다. 현재 시공관리국의 입장에서는 최우선적으로 붙잡아야 하는 범죄자인 것이고…. “시그넘, 협공하자!” 그리고 비타가 외치는 말에, 시그넘은 조금 머뭇거리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레반틴을 다시금 들었다. “거 참, 난 애들은 다치게 하기 싫다니까 그러네.” “시끄러, 이 광대 자식!” 고함을 지르면서 다시금 해머를 휘둘렀으나 광대는 흐느적거리는 몸짓으로 그것을 용케 피해낸다. 그리고 그가 그라프 아이젠을 피해내자마자 뿜어져나오는 불꽃. 레반틴의 검신에 맺혀있던 불꽃, 슈트름 베렌(Sturmwellen). 시그넘의 검이 머금던 불꽃이 배후에서 자신을 덮쳐오는 것에 광대는 처음으로 마법다운 마법을 사용, 배리어를 사용해서 그것을 막아낸다. “멍청한 자식!!” 그리고 광대가 배리어를 생성시켜 불꽃을 막아내기 위해 멈춰선 틈에 비타가 달려들었다. 탄환-카트리지를 내뱉곤 불을 뿜는 그라프 아이젠. “라케텐─” 해머의 형태를 띤 그라프 아이젠은 불꽃을 내뿜는 로켓처럼, 그것으로부터 추진력을 얻어내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광대를 향해, 불꽃을 뿜어내며 추진력을 발휘하는 그라프 아이젠을 들고 달려드는 비타. “해머─!!” 그 추진력에 힘입어, 라케텐 폼 상태의 그라프 아이젠을 광대에게 휘두른다. 시그넘 혼자라면 밀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이라면 자신이 있다고 비타는 생각했다. 비록 기사의 긍지라니, 그런 것에 위반되는 것일 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이 녀석을 쓰러뜨리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으니까. 비타의 공격이 행해지는 것에 광대는 다른 손을 뻗어 다시금 배리어를 형성시켜 그것에 대처했다. 뚫을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가 없었다. 배리어 자체를 깨부수는 것으로는 자신이 있는 비타였지만 그만큼 광대의 방어는 뚫기가 힘들었던 것이고. ‘뭐야 이건─!’ 흐물흐물하다. 그라프 아이젠을 휘둘렀고 부딪친 배리어는 단단하기 보다는 흐물흐물한 느낌이었다. 단단한 것은 강한 힘으로 때리면 부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흐물흐물한 느낌의 배리어는 아무리 강한 힘으로 때려도 부술 수가 없는 것이었기에 비타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배리어 자체가 흐물흐물하다는 것은 처음 겪는 것이었으니까. “뭐야, 이렇게 흐물흐물한 방어도 못 뚫는 거야? 실망인데, 꼬마 기사 아가씨─.” “…닥쳐!! 시그넘, 날려버려!!” 빈정거리고 있는 광대, 그리고 비타는 닥치라는 외침을 내뱉은 뒤 동료에게 외친다. 그리고 그 외침에 광대의 시선이 배리어에 공격이 막힌 비타가 아니라 시그넘에게로 향해졌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레반틴은 이전의 슈랑게 폼 상태, 채찍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슈랑게 폼 상태의 레반틴을 손에 쥐고, 그것을 휘젓는 시그넘. 레반틴의 채찍에 분홍색 마력이 덧씌워졌다. “비룡(飛?)…” 회전을 하면서 더욱 강렬해지는 레반틴의 마력. 그리고 시그넘은 마력이 더욱 강렬해지는 시기에 그것을 발이 묶여있는 광대에게 휘둘르며 언령을 외쳤다. “일섬(一閃)…!” 목소리에 약간의 망설임이 깃들어있는 이유는 상대방이 자신을 죽이지 않고 구해주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일대 다수의 싸움을 하고있다는 생각 때문일까. 하지만 시그넘은 자신의 본연의 임무를 떠올리고, 조금 괴롭긴 했지만 자신의 일에 충실하기로 한 것이었다. 참격 마법이면서도 발동 방식은 포격 마법에 가까운 시그넘의 발도술이 채찍과도 같은 슈랑게 폼 상태의 레반틴을 통해 선보여진다. 그것의 위력은 페이트가 사용했던 포격마법인 플라스마 스매셔와 맞먹는 비룡일섬. 그것이 비타에 의해 발이 묶여있는 광대에게 사용된 것이다. “이거나 먹어라! 이 문어 같은 자식아!” 그리고 그것에 이어서 비타가 허공에 마력탄을 생성시켜서, 그것을 그라프 아이젠으로 후려쳤다. 해머가 마력탄을 후려치자 순간적이지만 강렬한 빛과 소음이 울려 퍼졌다. 현대의 섬광탄, 혹은 스턴 그레네이드라고 불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진 비타의 광역마법. 아이젠 게호일(Eisengeheul). 적절한 상황에서 사용된 그것은 광대의 시각과 청각에 불의의 습격을 남겼으며 몰아쳐오는 비룡일섬에 대해 방어를 할 수 없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아이젠 게호일을 사용함과 동시에 비타는 광대로부터 떨어졌다. 광대가 비룡일섬에 방어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비타는 승리를거두었다 생각하면서 환호성을 지르는 것이었고…. “맥시마이즈(Maximize)…” 그때, 시야를 아직 채 회복하지 못한 광대가 기계로 된 의수를 비룡일섬 쪽을 향해 겨누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비타와 시그넘은 들었다. “크래셔(Crasher)─.” 뻗어져오는 레반틴의 비룡일섬에게 향해진 광대의 왼팔, 기계로 만들어진 의수. 그리고 비타는 더 이상 아무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엄청난 충격이 대기를 때렸다. 그리고 대기뿐만이 아니라 몰아쳐오던 비룡일섬의 마력파도 마찬가지. 광대의 왼팔, 기계로 이루어진 의수로부터 원인모를 충격파가 발사되어 대기를 뒤흔들었고 그것의 여파는 비룡일섬마저도 후려쳐서 마법을 완전히 파괴해버린 것이었다. 고막이 터져버린 것처럼, 충격파 때문에 비타와 시그넘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귀가 멍멍했다. 하지만 시각은 멀쩡했었기에, 그리고 자신들의 앞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직접 보았었기에 둘은 그것이 마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순수한 물리력. 마법으로 인한 요소는 전혀 없는 순수한 물리적 충격파가 광대의 왼팔에서 뿜어져 나왔고 압도적인 물리력이 마법을 깨뜨린 것이었다.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경지의 것을 직접 보게되자 망연자실해지는 비타와 시그넘. 마법을 완벽히 깨뜨려버릴 정도로 강력한 물리력. “…이걸 쓰기는 싫었는데, 고장이 날 수도 있거든.” 막강한 충격파를 뿜어낸 기계 의수를 거두면서 말하는 광대. “훌륭한 호흡이었다. 어린 기사, 그리고 기사 아가씨…. 상대방의 발을 묶어놓은 뒤에 사용한 포격마법. 그리고 시각과 청각을 마비시키기 위한 광역마법….” 실제로 아까 비타와 시그넘이 순식간에 보여주었던 합동 공격은 둘이 평소에 연습하였던 것으로 어지간한 마도사들은 결코 막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완벽하게, 순수한 물리적 파괴력에 무효화되자 망연자실해할 수밖에 없었고….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고 말해야겠지. 큭큭….” 아이젠 게호일로 인해 일시적으로 마비되었던 청각과 시각이 돌아왔던지, 광대는 멍하니 서있을 뿐인 비타외 시그넘을 보면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광대의 발밑에 고대 베르카 식의 마법진이 펼쳐지자 비타와 시그넘은 황급히 경계 태세를 취하였다. 어떤 마법이 자신들을 휩쓸지 모르니까. “아아, 그렇게 놀라지 마라고.” 하지만 그들이 경계하는 모습에 광대는 손을 휘저으면서, 몸을 흐느적거리며 말한다. “전송마법…?!” 그리고 광대가 사용하려는 마법이 공격을 위한 마법이 아니라, 전송 마법이라는 것을 알아채고서 시그넘의 안색이 당혹감에 물들어갔다. “이 자식, 도망치려는 셈이냐!?” “…도망, 이라…?” 귀에 이상이 생겼는지, 귀에서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고 있는 비타의 말에 광대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흘렸다. “내가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나, 꼬마 기사?” 그리고 웃음이 그친 뒤, 광대가 의미심장한 어투로 내뱉는 말이 비타의 사고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아니야… 아니지, 아니라고… 아냐….” “….” “맛있는 것은 나중에 먹어치우는 게 좋잖아? 큭큭….” 자신들을 먹잇감으로 여기는 이 말, 하지만 비타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애들은 건드리지 않는 주의이기도 하고….” 시전자를 대상으로 한 전송마법이 펼쳐졌다. 은빛의 마법진을 발밑으로 하고, 광대는 몸을 흐느적거리면서 비타와 시그넘, 그리고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던 마도사들에게 시선을 향하는 광대.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마도사 나리들~.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깐요, 킥킥킥!” 그리고 그 전송마법은 광대뿐만이 아니라, 가만히 있을 뿐이던 AMM 육전형들의 밑에도 나타나 그것들도 함께 전송하려는 것이었다. “…시그넘! 슈트름 팔켄을 써!” 그리고 광대가 AMM 육전형들과 함께 물러나려는 것에 비타는 시그넘에게 슈트름 팔켄을 사용하라고 외치는 것이었고. 시그넘은 그 말에 레반틴의 형태를 황급히 보겐 폼으로 전환, 활의 형태로 변화한 레반틴의 현을 잡아당겨 화살을 광대에게로 겨누었다. 당겨지는 현, 그리고 나타난 매의 화살은 은빛의 마법진 한 가운데에 선 광대에게로 향해져있었으나…. “시그넘?!” 마력의 현을 붙잡고 있는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음에도 시그넘은 그것을 놓지 않았다. 동료의 그 행동에 비타가 아연실색해서 외치는 말이었고…. 마침내, 시그넘은 보겐 폼으로 전환한 활 형태의 레반틴을 거둬버렸다. “…귀하의 이름은?” 그리고 금새라도 사라지려고 하는 광대에게 이름을 묻는 시그넘. 싸우기 전에, 광대는 자신을 꺾게 된다면 이름을 가르쳐주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시그넘은 비타와 협공을 했었음에도 광대를 이기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자신들을 동정한 것처럼, 봐줬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자신들을 죽일 생각으로 싸움에 임했더라면 시그넘은 지금쯤 얼음덩어리에 몸이 꿰뚫려 바닥을 뒹굴고 있었을 것이고…. 시그넘의 그 물음을 받은 광대는 한참동안이나 침묵했다. “광대, 에밀리오라고 합니다, 기사 나으리.” 그리고 광대는 키득거리는 웃음을 흘리더니, 흐느적거리는 몸짓으로 신사처럼 인사를 하며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광대 에밀리오. 그 이름을 시그넘은 자신만 들리도록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나름 사정이 있어서 성은 가르쳐줄 수가 없군. 이름만 알아두라고.” 에밀리오의 이 말에 그것만으로도 시그넘은 됐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름만을 들어둔 것으로도 족하다 생각했었던 것이고…. 성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여겼다. 어차피 물러나는 것은 에밀리오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패배자는 자신들이 확실했으니까. “시그넘! 너…!” “물러서라, 비타!” 그리고 비타가 자신에게 뭐하는 짓거리냐고 묻듯이 외치면서, 에밀리오에게 그라프 아이젠을 휘두르려 달려드는 것에 시그넘은 소리쳤다. 동료이자 대장인 그녀의 외침에 공격하기 위해서 달려들던 비타가 멈춰섰다. “그럼,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다시 만나뵙도록 하지요. 아름다운 기사 나으리.” 시그넘은 자신에게 재치있게 에밀리오가 하는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 에밀리오는 흐느적거리는 몸짓으로, 다시금 허리를 숙여 예의 신사적인 인사를 보인 뒤 준비가 끝마쳐진 전송마법을 발동시키는 것으로 AMM 육전형들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졌다, 우리가….”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난 뒤,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시그넘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작게 내뱉는 것이었고…. 광대 에밀리오. AMM들의 조종권한을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베르카 식의 마법을 사용하는 ‘기사’. 그 스스로가 밝혔던 이 이름은 이 날을 계기로 시공관리국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우선적으로 체포해야 할 광역 차원 범죄자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시공관리국은 알지 못했다. 광대의 이 이름이 머지않아 자신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그를 최악의 범죄자가 아니라 그저 조금 위험한 범죄자로 과소평가했던 자신들의 경솔함이 어떤 화를 불러올지를…. 그리고 훗날 T.F(The Fool 광대)이라는 이름이 붙을 사건의 주모자이기도 한, 시공관리국 사상 최악의 범법 마도사로 기록될 자의 이름이기도 했으니까. #12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 어둠 속에 작은 콧노래가 울려 퍼졌다. 실로 즐겁다는 듯이, 흥얼거리고 있는 그 콧노래는 장단과 박자가 절묘하게 맞춰진 민요였다. 그리고 아까까지 민요를 흥얼거리던 콧노래는 근래에 유행하는 가요로 변해있었다. 그는 수술대와 같은 것 위에 드러누워선, 몸을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여전히 쓸데없게 들떠있군, 넌.” 그리고 문이 열고 들어온 백의(白衣)를 입은 창백한 얼굴을 가진 남자가 들어와 그를 보며 하는 말. 그 물음에 광대 에밀리오는 키득거린다. “큭큭, 이왕 사는 거 즐겁게 살면 그것보다 좋은 건 없잖아?” “세간에선 그런 걸 즐겁게 산다고 하기보다는, 괴상하다 말하곤 하지.” “상관없어, 난 광대니까. 킥킥….” 넓은 판 위에 드러누운 채로, 백의의 남성이 한 말에 에밀리오는 키득거린다. 그가 다가와선 조명을 키자, 어둠 속에서 강렬한 불빛이 모습을 드러냈고. “…멋지게 망가뜨려놨군.” 그리고 처참하게 망가져있는 광대의 왼팔, 의수가 드러났다. “유압장치와 완충제가 완전히 망가졌어. 그러니 팔이 완전히 못쓰게 되어버린 것이지.” “오우, 광대의 왼팔은 이제 완전히 못쓰게 되어버린 건가?” 비록 기계로 만들어져있지만 자신의 의수이다. 망가진 그것을 보며 남성이 철저하게 기계적인 어투로 내뱉는 것에 광대는 시시덕거리면서 묻는 것이었으니. 그 반응에 남성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반나절 정도 수리를 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거다.” “그럼 부탁드립죠, 기술사관 나으리~.” 기술사관. 기술자인 것일까, 이 남자는? 광대가 한 말에 한숨을 내쉬면서, 그는 챙겨들고 왔었던 공구들과 방안에 비치되어 있던 기기들을 다루어 능숙하게 그것에 손을 대가기 시작했다. “…그 가면은, 좀 벗도록 하지?” 기계 의수를 수리하면서 늘 신경이 쓰였던 것을 내뱉는 기술자. 첫 만남때부터 지금까지 자주 봐왔던 것이지만 익숙해지기가 힘든 마스크였다. 그리고 그의 말에 광대는 어깨를 들썩이며 낄낄거리면서 답한다. “가면을 벗은 광대는 더 이상 광대가 아니게 되어 버리니까.” “….” 광대. 광대 가면을 벗어버린 광대는 더 이상 광대가 아니다. 그래, 난 광대다. 춤추고, 노래하고, 웃으면서 모두에게 인사를 건네는 광대. “나는, 광대로 남아야 한다.” 에밀리오는 작게 이 말을 중얼거리는 것이었고, 기술자는 그 말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의수의 수리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수십 년을 한분 야에 열중한 명의(名醫)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술을 행하듯, 기술자의 손놀림은 너무나도 정확한 것이어서 다른 기술자들이 그것을 보았더라면 감탄할 수준이었다. “단순한 기계 의수로 여기는 것 같군.” “그럴 리가? 누가 만들어준 건데?” “알면서도 ‘그걸’ 썼다니, 시공관리국의 마도사들이 그렇게 강했었나?” “….” 그 물음에 에밀리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해두지만… 네 왼팔, 그리고 왼쪽 다리는 의수나 의족이 아니다. 디바이스지. 그리고 AMM의 조종 권한이 있기도 하니….” 그 말은 즉, 의수를 통해 AMM들을 조종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고출력 물리적 충격을 이용한 살상기능, 「맥시마이즈 크래셔」를 사용하는 것은 자제해라. 잘못했다간 다시는 수리하지 못하게 되어버릴 수도 있다.” “….” “이번엔 팔이 망가지는 걸로 끝났지만… 다음번엔 다리까지 망가지게 될 거야.” 이 의수를 만든 장본인으로서, 이런 기능을 탑재한 것은 판단미스였다고 그는 생각했다. 마법의 행사가 아닌, 단순한 물리척 충격파를 분출시켜 파괴하는 기능, 맥시마이즈 크래셔. 그것을 만들어놓고도, 설마하니 사용할 수 있는 자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던 건데…. 에밀리오가 그것을 사용했을 때엔 반동에 의해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멀쩡했던 것에 놀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AMM의 생산현황은?” “양산은 무리였지만, 현재 육전형을 포함해서 300대 정도 생산됐다.” “조만간 베네토 소장에게 연락을 해야겠군.” “네 계획을 믿어도 되는 것인가?” 수리하던 것을 멈추고 광대에게 묻는다. 약간의 의심이 깃들어있는 그 물음에 키득거리던 것을 멈추는 에밀리오. “네가, 그리고 네 계획이 시공관리국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글쎄?”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갑자기, 시공관리국을 붕괴시키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면서 자신의 앞에 나타난 괴상망측한 사내가 바로 에밀리오였다.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그는 설득되었던 것이다. “설령 시공관리국을 무너뜨리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시공관리국이 무너지게 만드는 계기가 될 거다.” “….” “지금까지의 시공관리국은 3제독, 그리고 마도 통괄관으로 이어지는 원 맨 팀(One-Man Team)이었잖아? 나머진 별 볼일 없는 조무래기들이었지. 3제독들은 이제 모두 늙어빠진 영감쟁이들이고… 남은 것은 놈, 마도 통괄관뿐이야.” 그러면서 그가 덧붙이길, 요즘에는 슬슬 바뀌기 시작하는 것 같지만이라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은퇴했다더군.” 이 말에 에밀리오는 웃음을 터뜨린다. “은퇴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놈은 반드시 기어 나오게 될 테니.” “….” “마도 통괄관은 미드칠더 시공관리국의 마지막 보루나 마찬가지니까. 녀석은 최후엔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다시금 칼을 뽑게 될 거다. 그리고 놈만 죽이면 시공관리국은 끝이야.” “…마도 통괄관을 죽이겠다?” 예전부터 들어왔던 말이지만 그는 광대의 이 말이 우습지도 않은 농담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광대의 실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하나, 마도 통괄관이라고 불렸던 남자가 어떤 마도사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괜히 최고라고 불리는 말이 아니다. 그 사실은 『마도 통괄관의 디바이스를 만들어준 그』였기에 잘 알고 있었다. “블레이즈를 죽이면 시공관리국은 자연스럽게 붕괴될 거다. 광대의 손아귀에 놀아나면서 서서히…. 큭큭… 미드칠더에 있는 시공관리국의 기관들만 붕괴시킨다면 본국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질 거야.” “…물론, 네가 그것을 해내었을 때의 얘기지만.” 이 말을 툭 내뱉자 광대의 웃음소리가 끊겼다. 그리고 광대의, 가면 너머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해지는 것에 그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에밀리오가 살기어린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할 수 있지, 나 역시 살아남을 순 없겠지만….” 그 말은 웃음기가 없는, 진지한 어투의 것이었다. 루시안 K. 블레이즈를 죽이고, 자신 역시 죽게 될 것이라 말하는 광대에 기술자는 생각에 잠긴다. 이 자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루시안 K. 블레이즈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장하길. 마도 통괄관, 그를 죽이는 것을 대전제로 하여 시공관리국을 붕괴시키겠다고 하는 것이었고…. “그러니까 넌 AMM들이나 열심히 만들면 되는 거야, 복티아 라르셀…. 네 손이 직접 피를 만지는 일은 없을 테니.” 이어서 ‘네가 만든 기계들이 피를 흘리게 되겠지만’이라 덧붙이는 광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복티아 라르셀. 실종된 수석 기술사관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AMM을 만든 자의 이름이기도 했으니…. “블레이즈를 죽인다, 그리고 시공관리국 역시 붕괴시켜 주마.” “….” “그러면 너로서도 만족할만한 결과 아닌가? 간접적으로나 결과적으로나 네 가족을 죽게 만든 것들이 사라지게 되니까.” 복티아 라르셀은 광대가 낄낄거리면서 말하는 것에도, 단 한 마디의 대꾸도 없이 묵묵히 그의 의수를 수리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지금 인간의 의수가 아니라, 악마의 팔을 고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할 수 밖에 없었고…. 루시안 K. 블레이즈를 죽이면 시공관리국은 무너지게 될 것이다. 설령, 마도 통괄관을 죽이고 마찬가지로 죽게 되어 시공관리국을 직접 무너뜨리지 못하게 되더라도 머지않아 무너지게 될 거라는 광대의 주장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게 그의 처지였으니…. 광대의 발작하듯이,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어두운 공간 안에 울려 퍼졌다. 용접하는 소리와 뒤섞여서…. * * * * * * 《신력 66년 6월 17일, 15:00 미드칠더 수도 크라나간, 국립병원》 루시안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자신은 이렇게, 병원에 들락날락 거려야만 하는 팔자인 걸까? 하고 말이다. 마도사로서, 집무관으로서, 그리고 마도 통괄관으로서 현장에서 일할 때에도 병원에 무척이나 들락날락했던 과거가 있었다. 물론 자신의 부상이 아니라, 부하들이나 친인들의 부상때문에. 집무관 짓거리에서 완전히 손을 떼기 전, 아델리에가 부상을 당해서 이 병원에 오게되었다. 집무관 짓거리에서 손을 뗀 뒤, 페이트를 입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페이트가 감기에 걸리게 되자. 한 밤 중에 애를 업고 빗속을 달려 병원까지 데리고 갔었다. 그리고 얼마 전, 페이트가 AMM 육전형과의 싸움에서 부상을 입게 되었을 때도 오게 되었던 건데…. “페이트, 좀 천천히 가….” 벌써부터 저 멀리, 앞까지 가 있는 딸아이의 모습에 숨을 몰아쉬면서 루시안이 하는 말. 자가용 따위가 없고 면허도 없기 때문에, 대중교통 수단인 버스를 타고 왔었고 그 버스 정류장에서 쉬지 않고 뛰어왔기 때문에 숨이 찰 수밖에 없었다. 물론, 루시안으로서는 뛰고 싶지 않았지만 페이트가 뛰었으니까 덩달아 뛴 것이었다. “빨리요, 아빠…!” “….” 페이트가 깜짝 놀란 얼굴로 멀리서 자신을 재촉한 뒤, 모습을 감추는 것에 루시안은 배반감마저도 느껴졌다. 항공 무장대의 일을 하지 않고, 페이트가 크라나간의 국립병원으로 온 이유는 친구의 부상 소식 때문. 나노하가 임무 중 질량병기의 습격을 받았다던가? 페이트는 그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실제로 여기로 오는 내내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있었으니까. 물론 절친한 친구의 부상에 깜짝 놀랐을 것이고…, 하지만 루시안은 자신을 병원의 로비에 내버려두고 먼저 모습을 감춰버린 양녀에게 배반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 ‘…나노하 병문안 가다가, 내가 입원하게 생겼구나….’ 실제로 급격한 체력 저하로 인해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것에 루시안은 자신이 더 이상 10대가 아닌, 20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고…. 루시안에게 나노하를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 묻는다면 좋아한다고 답할 것이다. …물론,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페이트의 친구이기도 하고, 자신에게 예의바르게 행동하면서 평소의 마음가짐이나 행동거지가 착하니까. ‘어쩔 수 없는 거야….’ 나노하 역시 페이트와 마찬가지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루시안은 나노하가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페이트처럼 경악하지는 않았다. 비록 무장대 육사학교라서, 항공무장대의 페이트 만큼은 아니지만 얼마든지 위험에 노출되는 입장이다. 육사학교의 교육생들이 실습차 투입된 현장에서 부상을 입거나 죽거나 하는 것은 아예 없는 경우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숱한 국원들이 다치거나 죽는 것을 봐왔기에, 놀라기는 했지만 경악 정도는 아니었던 루시안. ‘익숙해져야 할 거야, 페이트.’ 페이트 본인이 선택한 길이다. 나노하 뿐이 아닌, 다른 동료들이 다치거나 죽거나 하는 것은 앞으로 숱하게 볼 것이다. 그것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길을 나아갈 수가 없다 생각하는 루시안이었고, 마도 통괄관은커녕 집무관도 되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숨을 고른 뒤, 루시안은 다시금 페이트가 먼저 뛰어갔던 길을 따라서 뛰어갔다. 부상 소식과 더불어서, 어느 병실에 입원해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한참이나 계단을 뛰어 올라가, 나노하가 입원해 있다는 병실 근처까지 가게 되었을 때 루시안은 병실 문 앞에서 망연자실해 있는 페이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페이트?” 불러보았으나 대답은 없었다. 큰 충격을 받은 듯이, 멍해진 채로 서있을 뿐인 페이트. 그리고 나이 탓인지 숨을 헐떡이면서 페이트의 곁에 다가간 루시안으로서도 흠칫 놀랄 수 밖에 없었다. “….” 병실 안, 침상에 눕혀져 있는 나노하는 산소호흡기에 호흡을 의존한 채, 몸에는 붕대와 수많은 튜브들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살아있는지, 아니면 죽어있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이런 생각을 하긴 뭐했지만, 시체를 보는 것 만큼은 아니었어도 루시안은 깜짝 놀랬던 것이다. 그런, 참혹한 모습을 숱하게 봐왔던 루시안으로서도 놀랄 수 밖에 없었는데 페이트는 얼마나 놀랬을까? “페이트?!” 그리고 페이트가 휘청거리면서 넘어지려 하는 것에 가까스로 붙잡아주었다. “아, 아빠… 나노하가….” “….”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그래도 저런 모습이 되어서도 살아있을 수 있다는 게 놀라웠지만…. “…아, 블레이즈 씨. 그리고 테스타로사…인가….”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니, 피로에 찌들어있는 듯한 시그넘이 있는 것에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짓으로 인사했다. “…어, 어떻게 된 거죠… 시그넘…?” 나노하가 말하길, 시그넘과 비타도 함께 파견나간다고 했었으니까. 시그넘이라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있지 않을까 해서 페이트가 묻는 말이었고. 그 말에 시그넘은 한숨을 내쉰 뒤, 한참이 지나서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질량병기에, 당한 듯 하다.” “AMM…?” 자신이 알고 있는 질량병기라고 하면 AMM밖에 떠오르지 않았기에 묻는 페이트였고. 그 물음에 고개를 젓는 시그넘. “아니, 조사결과 AMM은 아니라고 하더군. 어쨌든… 유적 내부에서 질량병기들과 교전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당한 듯 하다.” “….” “다른 마도사들은 모두 죽었지만….” 운 좋게 목숨을 건졌다고 말하기도 뭐한 상태여서, 시그넘은 뒷말을 잇지 않았다. “살아있는 게 용하다, 라고 그러더군요.” “….” “출혈량으로나, 추정되는 상처의 크기로나. 그 자리에서 즉사했어야 마땅했는데 살아있는게 기적이라고 의료진에서 말했었습니다.” “블레이즈 씨.” “…응?” “실례지만… 블레이즈 씨 께서는. 마도사로서 일하셨다고 하셨었지요?” 그것은 예전에, 페이트와 시그넘이 모의전을 치루고 난 뒤 시그넘이 묻는 말에 했었던 대답이기도 했다. 그래서 루시안은 영문은 모르겠지만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고…. “혹시 고대 베르카 식의 마법을 쓰는 기사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고대 베르카 식의 기사?” “예. 가면을 썼고… 검은 로브로 몸을 감춘. 그리고 검 형태의 암드 디바이스를 사용하는…, 빙한 계통의 마력 변환 능력을 지닌 자입니다만.” 가면. 로브. 암드 디바이스. 빙한 계통의 마력 변환 능력. 고대 베르카 식. 현장에서 잔뼈가 굵었고 수많은 범죄자들을 처리한 루시안이었기에, 시그넘은 혹시 뭔가 알지는 않을까 해서 그에게 물었던 것이다. 하지만 루시안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으면서,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었으니. “그럼, 에밀리오라는 이름은….” “모르겠는데. 왜?” 이름을 물어봤음에도 모르겠다 고개를 젓는 것에 시그넘은 그러십니까, 라고 말했다. “유적지 외부에서 마주쳤던 범법 마도사… 기사입니다.” “…고대 베르카 식의?” “예. 그리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자가 AMM들을 조종하는 것으로…” 그 말에 루시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AMM을 조종한다니. “고대 베르카 식은 드문데…, 거기다가 빙한 계통의 마력 변환 능력을 가진 놈이라면…. 게다가 AMM을 조종하는 것 같다고…?” 여러 가지 의미로 레어 스킬을 가진 자라고 추정해도 무방하다 루시안은 생각했다. 거기다가 AMM을 조종하는 것 같다면…. “그가 아니었으면 타카마치는 죽었겠지요.” 그리고 시그넘이 씁쓸하다는 어투로 내뱉는 말에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시그넘을 응시하는 루시안. “그 자가, 유적 내에 쓰러져있던 타카마치를 데리고 나온 듯 합니다.” “….” “게다가 유적 내부에 있던 정체불명의 질량병기들은… 아마 그 자에 의해 파괴된 듯 했고요. 실제로 그가 타카마치를 데리고 나타났을 때엔 상처가 완전히 아물어있었으니….” 범법 마도사가 시공관리국의 마도사를 구했다는 사실이 루시안에겐 상당히 이상하게 들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그래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범죄자가 시공관리국의 마도사를 구했다니…. “…시그넘, 나노하는… 깨어날 수 있는 거죠…?” 먼저 와 있던 것이 분명한 그녀에게 페이트가 묻는 말. 그 물음에 시그넘은 한참이나 뜸을 들이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고, 페이트는 그제야 조금은 안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깨어나긴 하겠지만…. 하지만 시그넘이 이어서 내뱉은 말에, 그 안도한 표정은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 “다시는 하늘을 날 수 없을 수도 있다, 라고… 하더군. 평소의 생활에 지장이 있을 가능성도 크다고….” 그 말에 페이트의 눈에서 초점이 흐려졌다. 그리고 그 눈으로 페이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기계에 호흡을 의존한 채 의식을 잃은 자신의 친구를 쳐다보는 것이었고…. 『다시는 하늘을 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그 말은 곧, 마도사의 생이 끝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게다가 평소의 생활에 지장이 올 가능성이 크다는 말은…. 초점이 흐려진 페이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비틀거리는 몸을 이겨내지 못하고 루시안의 옷자락을 붙잡는 것이었다. 페이트가 부들부들 떨면서,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옷자락을 붙잡는 것에 루시안은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아이의 손을 쥐어주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씁쓸함이 깃든 시선으로 병상에 누운 나노하를 루시안은 응시했다. 그리고 페이트를 쳐다보았다. 겁에 질려 떨고 있다, 절친한 친구의 처참한 모습에. 시공관리국의 마도사가 처하게 되는 진정한 위험을 자신의 부상이 아닌, 친구의 부상을 통해 깨달아버린 것이다. 자신이 아주 오래전에 알아채버렸던, 익숙해져야만 했던, 그러나 마지막엔 극복해내지 못했던 것과 페이트는 맞닥뜨린 것이고…. 그리고 그것에 맞닥뜨려 겁에 질리게 된 이 아이의 모습에, 루시안은 떨고있는 페이트의 몸을 껴안아주는 것 밖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해법님의 바람직한(?) 짤 투척과 응원 메세지에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꾸벅~ #12의 제목인 guilty pleasure에 대해서 말하자면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은, 비밀리에 탐닉하는 것이란 의미라 보셔도 됩니다 쉽게 말하자면... 남자들이 컴퓨터에 꿍쳐놓은 야동(저..적절한 비유인가)?? 광대 에밀리오의 현 상황과도 같죠. 시공관리국에 대한 테러를 준비중이니.. 에밀리오와 복티아 라르셀이 동일인물이 아니라는게 나왔습니다 한 패거리일 뿐... 그리고 혹시나 에밀리오가 했던 말때문에 보시는 분들 중에서 말이 나올까봐 덧붙입니다. 시공관리국이 원 맨 팀이라는 말, 에밀리오는 덧붙여서 분명히 말했죠. '요즘에는 슬슬 바뀌기 시작하는 듯 하지만'이라는 말로요. 나이테 3인방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게다가 시공관리국의 3 제독은 여명기를 '이끌었던' 노인네들이고 그들의 바톤을 루시안이 이어받았던 거니까. 현 시기로서는 원 맨 팀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거라 생각해서 저런 말을 썼습니다. 아무래도 개인의 선천적 재능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집단이 시공관리국이고, 강한 힘과 재능을 가진 특정인에게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죠. 그걸 해결하고자 대안으로 나왔던 게 아인헤리알, 전투기인, 인조마도사니... 《16:00 미드칠더 수도 크라나간 시가지》 옆에 앉아있는 아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친구의 병문안을 가면서 보았던 충격적인 장면이 아직 어린 아이에겐 큰 충격을 줬으리라 생각하며, 루시안은 씁쓸한 입맛을 다시었다. 실제로 자신도 꽤나 놀랬었으니…. “….” 뭐라 말을 해줘야 하는 걸까. 말재주는 뛰어난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루시안은 충격을 받아 반쯤 겁에 질린 페이트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고민하는 것이었다. 마땅한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괜찮을 거야, 타카마치는.” 비록 부상의 여파 때문에 마도사로서 하늘을 날 수 없을지도, 그리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살아남았다는 데에서 의미를 찾은 루시안이 할 수 있었던 말이다. 수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게된다. 시공관리국은 어떻게 생각해보면 엄연한 군사집단이나 마찬가지. 비록 그 구성원이 마도사들로 되어있고 질량병기가 아닌 마도문명을 이용한다고는 하지만…. 여러 세계에 대한 마도사들의 파견, 그리고 치안 유지 따위를 보면 군사조직인 셈이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그 집단 내의 계급체계도 군사조직의 것과 같으니까. 군사조직인 이상, 인명피해는 나오기 마련이다. “…각오를 해 둬, 항상.” 이렇게 본심을 말하고야 말았다. 주변의 사람이 다치거나 죽을 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 이 집단에 속해있다는 것만으로도 항상 이러한 위험이 뒤따른다. 자신은 그것이 다른 이유들과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싫었었다. 그리고 루시안은 페이트가 오늘에야말로, 자신이 늘 버릇처럼 말하곤 했던 것을 체감하였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었다. ‘… 버스가 왜 이리 안 오는 거야?’ 버스 정류장의 의자에 앉아서 버스를 기다린 지 어느덧 30분. 보통이라면 아무리 늦어도 20분 이내엔 버스가 도착하기 마련인데, 얼마 전까지 해도 크라나간에 뼈를 묻을 것처럼 살아왔던 루시안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품었다. “진짜 안 오네, 어디서 사고라도 난 건가….” 답답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슬슬 저녁식사를 차려야 할 시간인데, 먹는 것 밖에 할 줄 모르는 알프가 혼자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때, 루시안은 저 멀리, 도로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폭주족들인가….” 지금 살고 있는 관리외 제 97번 세계만큼은 아니지만, 미드칠더라는 문명의 중심지인 크라나간에도 폭주족들이라고 하는 족속들이 있었다. 그리고 얄궂은 것이, 폭주족들이라고 분류되는 사회의 한 집단이 범죄자로 포함되어서 마도사들에 의해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비 살상 설정이긴 하지만 바인드나 사격 마법, 심하면 포격 마법까지 사용한 경우도 있어서 논란을 빚었던 적고 있고…. 루시안 역시, 아주 오래 전에 폭주족들의 검거에 마도사로서 투입되었었기도 했다. 물론 나중에야,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가 있냐는 등의 말이 나오고 폭주족의 숫자가 현저하게 감소하여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모터사이클이 도로를 질주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에 한숨을 내쉬면서, 아직도 저런 녀석들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었는데…. “…?!” “!” 그때, 여기저기에서 폭발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커다란 소리에 놀란 버스 정류장의 사람들이 모두 바닥에 엎드려서 비명을 질러댄다. 하지만 루시안과 페이트만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곤 폭음이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향한다. 【Lord!】 그때, 평상시엔 악세사리처럼 변하여 루시안의 팔찌에 달려있던 그의 디바이스인 궁그닐이 부르는 소리. 【It is supposed that it is sound of high energy's weapon!】 고 에너지 병기의 폭발음으로 추정된다면서, 자신의 주인이 묻지 않았음에도 궁그닐은 루시안이 의아해하고 있는 것에 AI를 통해 판단한 바를 내뱉는 것이었고. “…고 에너지 병기…” 고 에너지의 병기. 그렇다면 질량병기가 된다. 폭발은 저쪽의 도로로부터 쭈욱 이어져오고 있었다. 그리고 비명소리. 그것을 본 루시안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갔다. 폭주족이 아니었던 것이다. 【I confirmed the movement of the that of the Machine. As a result, it is supposed that AMM Type-Second land combat!】 그리고 루시안이 바라보고 있던 도로의 저편에서, 굉음을 내며 다가오고 있는 모터사이클들의 실루엣에 자체적으로 판단한 답을 내놓는 궁그닐의 말. AMM 타입 세컨드. 육전형. 모터사이클의 형태를 띤, 지상 위에서의 전투에 특화되어있는, AMF라는 기술이 탑재되어있는 마도사 살육병기. 그제야 어째서 버스가 이렇게 오지 않았는지 루시안은 알 수 있었다. AMM들이 도로 위와 도심을 판을 치게 되었는데 어떻게 버스가 올 수 있으랴? ‘…통신?’ 그때, 페이트에게로 걸려온 통신 요청에 루시안은 페이트에게 걸려온 것임에도 본인이 나서서 그것을 연결시켰고. 【…루시안?!】 전혀 의외의 인물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에, 통신을 걸어온 아델리에가 아연실색했다. 하지만 루시안은 그녀가 깜짝 놀라든 말든, 상관치 않고 그녀를 다그친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페이트는? 네가 왜 크라나간에 와 있는 거야?】 “페이트는 나랑 같이 있어, 어떻게 된 거야?!” 【AMM들이 크라나간을 휩쓸고 있어, 동시다발적으로 여기저기에서 말이야!】 “외부로부터야?!” 【아냐, 크라나간으로 들어오는 외부의 도로를 통해 들어오고 있는 건 아니야!】 크라나간 시가지, 그리고 도로를 활보하며 테러행위를 하고 있는 AMM들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도로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아델리에의 말에 루시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는 말은 지금 크라나간 내부를 활보하고 있는 AMM들이 크라나간 안에서 쏟아져나왔다는 얘기이기도 하니까. “기습당한거야.” 그 누가 생각했으랴. 크라나간의 내부에서 마도사 학살병기, 질량병기 AMM들이 잠자고 있었다는 것을. 그것은 루시안으로서도 전혀 상상치 못한 것이었다. 애초에 생산할만한 시설도 없을뿐더러,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쉬울 리가 없다. AMM 정도의 병기를 만들려면 공정 작업에서 고도의 기술이 필요 되고 그러려면 일단은 넓은 부지가 필요하니까. AMM 정도의 기게병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공정 수준을 갖춘 공장은 크라나간 내에서도 몇 없었다. 그리고 그나마 그것들도 시공관리국 측의 입김이 미치는 곳일 텐데…. 루시안은 저곳에서 달려오고 있는 십여 대의 AMM 육전형들의 모습에 마음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습격을 받은 것이다. 바깥으로부터가 아니라 안쪽으로부터, AMM 육전형이라고 하는 병기들에게 의해서. 시공관리국의 심장부가, 그 안으로부터 말이다. 아델리에에게 마도사를 파견해달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지금 상황을 따져보자면 현재로서 놀고있는 마도사 전력이 남아있을 리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결정적으로 자신이 이런 말을 해봤자 우습게 들릴 것이고. “….” 이곳엔 민간인이라고 분류해도 좋을 사람들이 있다. 여력이 남는 마도사들은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의 딸이 있다. 부상당한 나노하의 처참한 모습을 보게 된 페이트는 겁에 질려있었다. “제기랄….”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버스 정류장에서 나와 도로의 한복판에 서는 루시안. 하필이면, 하필이면 이런 때, 자신이 이곳에 와있을 때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재수가 없어도 단단히 없었다고 루시안은 생각하는 것이었고.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폭발음, 그리고 서서히 가까워져오는 AMM 육전형들의 모습들을 그는 볼 수 있었다. “이 짓거리를 또 하게 될 줄이야…!” 하지만 이대로 도망칠 수도, 도망칠 곳도 없다. 현재의 페이트로서는 십 여 대의 AMM 육전형들을 모두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아이는 상당한 쇼크를 받았고 그것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혼자가 아니다, 지켜야 할 아이가 있다. 빠져나갈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크라나간 시내의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폭발음에 루시안은 작게 이를 가는 것이었고…. 그리고 얼마 뒤, 그의 몸에선 강렬하게 터져 나와 대기를 태우는 것은 푸른 플라스마. 다시는 마도사로서의 행위, 마법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던 옛날의 맹세가 퇴색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물러날 곳은 없었다. 자신이 아니라, 페이트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위해서라도…. 【Intelligent Device, Gungnir. Trigger On!】 루시안은 그날의 맹세를 어길 수 밖에 없었다. 주인의 강렬한 마력이 플라스마가 되어 대기를 태워가는 것에 팔찌의 형태를 취하고 있던 디바이스는 본연의 모습─기다란 창이 되어서 그의 왼손에 쥐어졌다. 【Barrier Jacket, Tempest Form.】 루시안의 몸을 두르는 평상복이 아닌 배리어 재킷, 하얀 색의 코트. 배리어 재킷, 템페스트 폼. 폭풍이라는 그것의 이름처럼, 배리어 재킷이 몸을 감싸게 되자 루시안의 몸을 휘감던 플라스마의 기류가 더욱 강렬해졌고─. “…빨리 끝내자, 궁그닐.” 【Aye, Lord.】 가까워지는 AMM 육전형들을 노려보며 루시안이 하는 말에, 궁그닐은 합금으로 만들어진 창날의 반대쪽으로 푸른 플라스마의 날을 만들어내면서 답하는 말이었다. * * * * * * 《미드칠더 수도 크라나간, 제 21번 도로》 “이런 빌어먹을! 쏴, 쏴버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번듯하게 닦아져 있던 도로는 상처투성이, 여기저기에 폭발의 흔적이 흉터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파괴되어 찌그러지거나 불타고 있는 수많은 차량들. 안에 탑승해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은 듯 했다. 하지만 그 도로 위에 살아남아있는 시공관리국의 마도사들은 그것에 신경 쓸 형편이 아니었다. “부서 버리란 말이야!” 파괴된 차량들과 방벽으로 황급히 급조한 바리케이드의 뒤에서, 스토레이지 디바이스를 통해 사격 마법과 포격 마법을 쏘아대며 한 마도사가 동료들에게 외치는 말. “시끄러, 입 닥쳐!” 그리고 그를 향해, 또 다른 누군가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소속 불명의 기계들에 의한 테러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 그리고 그것에 육상 무장대 소속의 육전 마도사들은 상당수의 기계들이 빠르게 진입해오고 있는 제 21번 도로에 투입되었다. 본디 육상 무장대는 육전 마도사 뿐만이 아니라, 기갑 전력들도 포함되는 집단이다. 필요시에는 마도사가 아닌 기갑군이 투입되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지금 육전 마도사들이 숨어있는 이 바리케이드들도 기갑군이 만들어준 것이기도 했고. “제기랄! 제기랄!!” 한 마도사가 바리케이드 뒤에 숨어 있다가, 질량병기들의 포화에 의해 바리케이드와 함께 날아가버린 동료의 피묻은 디바이스를 보며 비명을 내지른다. 하지만 앞의 바리케이드에서 그렇게 절규하던 젊은 육전 마도사 역시, 모터사이클의 형태를 한 질량병기의 포격에 사라지고야 말았고…. “제기랄, 저게 다 뭐야…!” 비록 말단이라지만 그는 자신들이 이 구획에 투입된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시간벌기용이다. 상부에서는 이곳에 투입된 60명의 마도사들을 단지 시간벌기용 카드로 내버린 것이다. 자신들이 이곳에서 죽어나가는 동안 후방에 좀 더 견고하고 완벽한 방어진을 짜기 위해서. “세 번째 바리케이드가 뚫렸어!!” “빌어먹을! 놈들이 돌진해온다!” 방벽 뿐만이 아니라, 부서진 차량들의 차체까지도 끌어 모아 만든 바리케이드가 질량병기들이 달려들어 부딪치는 것에 속수무책으로 깨부서진 것에 마지막 바리케이드에 숨어있던 마도사들의 절규가 울려퍼졌다. 빗발치는 사격 마법과 포격 마법. “뭐야, 이 기계덩어리들은! 마법이, 마법이 안 통한다고!!” 하지만 그것들의 대부분은 처음 보는 질량병기들에게 적중되기도 전에 안개처럼 흩어져버리는 것이었고 그것에 살아남은 육전 마도사들은 경악한다. 그것도 그럴 것이, 시공관리국은 아직 모든 마도사들에 대해 대(對) AMF 교육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상당히 자주 교육이 이루어졌으나 그 교육을 완벽히 이수해내어, AMF를 간파한 마도사도 드물었을 뿐더러. 교육생들의 수는 전체 마도사들의 수에 비하면 아주 적었으니까. 이 중에서도, AMF에 대한 교육을 받은 마도사는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교육을 받은 이들도, AMF 발생 장치를 상대로 한 마법만을 사용해 봤지 AMM 자체와 맞닥뜨리는 것은 처음이었고…. AMM 육전형들이 내뿜는 포화, 마지막 바리케이드의 방벽이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마도사들의 비명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오는 것이었고…. “제기랄, 여기가 뚫리면 안돼! 버텨, 버티라고!” 육전 마도사가 처절하게 외쳤다. 이 기계병기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것들이 좋은 용도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건, 다른 마도사들이 이것들에게 살해되는 것을 통해 진즉 파악했다. AMM들의 진로, 그것들이 타고 온 이 도로의 진행방향을 파악한다면 목적지를 알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었고…. 그랬기에 수적으로 열세에, 능력적으로도 딸리는 마도사들이 목숨을 내던지면서 이곳에서 물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크라나간에 가족을 둔, 그리고 친인들을 둔 그들은 결코 물러날 수 없었다. “크악!” 하지만 그들의 이 결의는 AMM들을 막을 수 없었다. 바리케이드가 뚫리면서, 그곳을 통해 돌진해 들어온 AMM의 육중한 동체에 바리케이드 뒤에 숨어있던 마도사가 깔리면서 내뱉은 단말마. 마지막 바리케이드가 뚫렸다. 방벽을 몸으로 뚫고 들어온 AMM의 장갑엔 어떠한 손상도 없었고 그것은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들어와선 탑재된 질량병기의 포격을 마도사들에게 퍼부어대었고─ 푸른 광선의 공격에 의해 볏짚이 바람에 날아가듯 너무나 쉽게 살해되는 마도사들. 그리고 마지막 마도사의 모습이 푸른 광선에 의해 벌집처럼 꿰뚫려 쓰러지고 나서야. 돌격으로 바리케이드들을 돌파한 AMM들은 미련조차 남지 않은 것처럼 다시금 바퀴를 움직이는 것이었고…. 수십 대의 AMM 육전형들이 남기고 간 파괴의, 그리고 살육의 흔적. 그것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달려간 도로의 표지판은 불꽃에 그을려있었다. 하지만 그을려있었음에도 그것에 무엇이 쓰여 있는 지 알아보는 데엔 무리가 없었으니. 심하게 훼손되어잇는 표지판엔 『제 21번 도로, 크라나간 시가지 시공관리국 차원 정보국 2km』 라는, AMM들의 목적지가 을씨년스럽게 그을려있었다. * * * * * * 마력이 온몸을 타고 흐르는 느낌.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에겐 마력이 플라스마로 변형되어서 대기를 태어나가는 것도 익숙한 광경이었다. 특별한 문제가 있어서 은퇴한 것이 아니었다. 마도사들이 마도사를 그만두는 주요 요인인 링커 코어의 타격이라든지 하는 것도 그에겐 해당하지 않는 말이었다. 루시안 블레이즈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현역으로, 마도사로, 집무관으로, 그리고 마도 통괄관으로 돌아갈 수가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 증거로, 폭발할 듯이 넘치는 그의 마력. ‘…쌩쌩하군.’ 겨의 6개월 만에 디바이스를 들었고 배리어 재킷을 입었다. 하지만 한창 현역일 때와 별 차이가 없는 마력의 운용에 루시안은 씁쓸하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는 것이었고…. “아빠….” 그리고 뒤쪽에서 들려오는 페이트의 목소리에, 쓸데없이 씁쓸한 감회에 젖어있던 루시안은 고개를 돌려 그곳을 응시했다. 페이트로서도 처음 보는, 마도사로서의 루시안 블레이즈. 친구의 치명적인 부상으로 인한 두려움과 쇼크는 피부로도 느낄 수 있는 양부(養父)의 압도적인 마력에 밀려 사라진 뒤였다. 멍한 눈으로 배리어 재킷, 템페스트 폼의 루시안을 바라보고있는 페이트. 차원이 다르다. 자신이 알고 있는 마도사의 수준과는…. 압도적인 마력량, 단지 배리어 재킷을 입고 디바이스를 활성화시켰을 뿐인데도 자신이 낼 수 있는 마력의 최대 출력을 훨씬 뛰어넘는 마력. 그리고 푸른 마력광을 발하며 내뿜어지는 플라스마에 페이트는 멍한 눈으로 서 있었다. 【I'm ready to go. My lord.】 카트리지 시스템조차도 적용되지 않은 인텔리전트 디바이스. 그럼에도 그것과 호흡을 맞춰서, 루시안이 마력을 조율하는 능력은 자신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육안으로 확실히 구분할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온 AMM 육전형의 수는 16대. “썬더러─.” 【Thunderer─】 루시안의 전신을 휘감는 플라스마의 마력파. 그리고 그의 발밑으로 펼쳐지는 푸른 원형의 마법진. 페이트에게 전수해주기 위해서 여기저기 뜯어고친, 어떤 의미로 보면 퇴보했다고 봐도 좋을 썬더러가 아닌 오리지널 그 자체. 페이트는 큰 괴리감을 느꼈다. 마법진은 곧 마도사가 사용하는 마법의 형식을 나타내는 것이다. 근대 미드칠더, 근대 베르카…. 그리고 지금은 맥이 끊긴 것이나 마찬가지인 고대 미드칠더, 고대 베르카 식…. 하지만 루시안의 발밑으로 펼쳐지는 마법진, 그리고 마법의 형식을 나타내는 마도 언어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페이트는 감지했다. 자신 역시 근대 미드칠더 식의 마법을 사용한다. 하지만 루시안의 것은 뭔가 다르다. 결과적인 마법진의 형태는 미드칠더의 것과 같다. 하지만 마법이 구축되는 과정이 미드칠더와는 확연히 다르다. 좀 더 빠르고, 좀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마력을 끌어내서 마법을 구축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페이트가 그런 생각을 하든 말든, 루시안은 푸른 마력광을 남기며 달려오고 있는 AMM들에게 튀어나갔다. 【Plasm Blade!】 그리고 거리가 채 좁혀지기도 전에, 궁그닐이 뿜어낸 푸른 플라스마의 칼날이 마력의 농도를 더욱 짙게 하는 것이었고 루시안은 창을 휘두르듯 디바이스를 선두의 AMM에게 휘둘렀다. 대기 중 마력 원소의 수치가 급격히 상승하고, 마법의 행사를 감지한 AMM 육전형들이 내부에 있던 AMF 장치를 밖으로 내뱉는다. 발동되는 AMF. 그러나 AMF가 발동되었음에도, 궁그닐이 머금은 마력 참격은 AMF의 효과영역 내에 들어왔으나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경악한 것은 페이트. 정상적인 경우라면 마법이 무효화되어야 마땅하건만─ AMF의 효과영역에 들어왔음에도 궁그닐의 마력 참격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AMF를 비웃는 것처럼 선두의 AMM 육전형 한 대를 너무나도 간단히 두 동강 내버리는 루시안. ‘1류에게 똑같은 수법이 먹히진 않아.’ 처음으로 AMF를 접했을 때, 루시안의 마법은 분명히 무력화되었었다. 하지만 그때는 루시안으로서도 AMF라는 것을 처음 접했었던 때였기에 그랬던 것이고. 지금은 상황 자체가 다르다. 처음으로 AMM 양산형, 그리고 AMF 발생 장치를 접했을 때엔 장소적인 제약도 따랐다. “궁그닐!” 그랬기에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종류도 국한되어 있었고─ 【Desolater ready! Get set!】 선두의 AMM을 플라스마의 칼날로 두 동강 내버린 뒤, 대열을 짜고 달려오는 AMM들에게 궁그닐을 들고 있지 않은 오른 손을 뻗는 루시안. 루시안의 손아귀에 플라스마가 모아졌다. “라이트닝(Lightning)” 【Go!】 “디솔레이터(Desolater).” 그리고 손아귀에 모인 플라스마가 거리낌 없이 전방을 향해 해방되었다. 근거리 포격 마법, 라이트닝 디솔레이터(Lightning Desolater). 브레이커와는 달리 디솔레이터는 사정거리를 대폭 희생시킨 대신, 효과 범위와 위력을 극대화시킨 근거리 포격 마법이다. 브레이커라는 포격 마법의 틀을 벗어나, 루시안 블레이즈가 만들어낸 또 다른 흐름인 근거리 포격 마법이 바로 디솔레이터라고 불리는 것이었고. 물론 페이트로서는 처음으로 보는 부류의 마법이었고, 때문인지 근거리 포격 마법이라는 것이 남긴 이펙트는 상상을 초월했다. 근거리 포격 마법, 라이트닝 디솔레이터가 루시안의 손아귀에서 뿜어지면서 휩쓸어오자 그를 향해 발사된 푸른 광선들은 그것에 삼켜져서 사라졌다. AMM들은 마법이 자신들을 휩쓸어오는 것에 대열을 흩으면서 회피 기동을 한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몰려오는 플라스마의 마력파를 피해내지 못한 세 대의 AMM들이 플라스마에 뒤덮여졌고. 라이트닝 디솔레이터, 빛의 흐름이 대기 중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것에 휩쓸렸던 세 대의 AMM들은 잔해조차 남기지 못했다. 증발해버렸으니까─. “AMF란 것은 확실히 골치 아픈 것이긴 하지.” 그리고 루시안은 남은 12대의 AMM들이 흩어진 채로 자신에게 센서의 렌즈를 집중시키는 것을 보며 중얼거린다. “AMF의 원리는 마력 원소의 결합을 방해하여 그것들이 흩어지게 만드는 것. 그렇게 되면 마력의 결합을 통해 만들어지는 ‘마법’이라는 개념은 무효화되는 거고….”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그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AMM들이 자신의 말을 듣는다고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하지만 루시안은 남아있는 그것들에게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오면서, 궁그닐을 든 채로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AMF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 마력 원소의 결합을 더욱 탄탄하게, 그리고 빠르게, 출력을 최대한으로 높이면 AMF에 의해 마법이 완전히 무효화되는 일은 없게 된다.” 자신이 AMM, 그리고 AMF를 상대해봤던 적은 단 한 번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의 공략법을 자세히 알아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마도사로서, 집무관으로서, 그리고 마도 통괄관으로서 일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뭐였냐면…” 대답이 없을 기계들에게 묻는다. 루시안이 달려들지 않고, 천천히 걸어오면서 묻는 와중에 AMM들은 자체적인 AI를 통해 상대방을 분석한다. “…범법자들이 나에게 살의를 갖고 마법을 사용해도 난 그놈들에게 살의를 갖고 응수할 수 없다는 거였어.” 살상 설정의 마법을 사용해오면서, 목숨을 위협해오는 범법자들에게 비 살상 설정의 마법으로 응수하는 시공 관리국의 마도사들이다. “날 죽이려고, 동료들을 죽이려고, 부하들을 죽이려고 덤벼드는 녀석들을… 살려둘 수밖에 없는 거지.” 많은 동료와 부하들이 죽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복수를 할 수 없다. 동료와 부하들을 죽인 범법자들은 그저, 재판장에 끌려가 재판장이 망치를 몇 번 두들기는 소리를 듣고 감옥에 들어가게 것으로 끝나게 된다. 자신은 그것이 무척이나 싫었다. 어째서 자신들은 그들을 향해 증오를 담아, 살의를 담아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가? 어째서 그들을 살려둬야만 하는 건가? “…하지만 너희들한테는 그런 걸 따지지 않아도 되잖아? 그런 점에서, 난 너희들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AMM들은 감지했다. 그의 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변 대기의 마력 원소 수치가 급증하기 시작하는 것을. 【대기 중 마력 원소 수치, 5,200,000】 말도 안 되는 수치다. 있을 수 없다 【규격 외, 섬멸 명령 이행.】 마도사 랭크 S에서 +로 분류되는 마도사들도 2,000,000의 마력 원소 수치를 넘기가 힘들다. AMM들의 데이터에 기록된, 이 정도의 마도사들도 겨우 AMF의 효과영역을 뚫고 마법을 적중시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앞의 이 마도사는… AMF의 효과영역을 뚫고 타격을 입히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완파시키는 경지까지 이르고 있다. 게다가 마도 언어조차도 통상의 것과는 다르다. 미드칠더 식? 아니다. 기계로서 기계적인 판단을 한다면 이 마도사의 마도 언어는 미드칠더 식과는 차이점을 보인다. 그렇다고 베르카 식도 아니다. 알 수 없는 형식의 마도 언어. 보유하고 있는 마력의 한계치도 예측·측정 불가. 보통의 인간이라면, 자아를 가진 생명체라면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을 하였으리라. 하지만 AMM들은 기계. 자아도 없고 감정도 없다. 두려움 따위를 느끼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것들은 규격 외의 마도사에게 포격을 퍼부으려 했다. 하지만 그때, AMM들의 인공지능은 기체 자체에 무언가 이상이 생긴 것을 감지해냈다. 포격이 발사되지 않는 것으로 말이다. “전기는 기계를 움직이는 동력원이 되기도 하지만,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것을 망가뜨리지.” 움직임조차도 원활하지 않게, 버벅거리면서 스파크를 튀겨대기 시작하는 AMM들의 모습을 보며 루시안이 내뱉는 말. 그리고 AMM들은 기체에 생긴 이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대기 중에 흩날리고 있는 마력의 원소들이 방전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지 않던 루시안의 마력들이 빛을 발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궁그닐.” 【Okay, lord.】 루시안의 부름에 궁그닐이 답하자, AMM들을 뒤덮은 그것들이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AMM들을 뒤덮은 마력 원소들의 빛이 강렬해지는 것이었고. “볼텍스 디토네이터(Voltex Detonater).” 【Voltex Detonater】 루시안을 감싸는 방어 마법,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수많은 마력의 폭발들이 AMM들을 휩쓸었다. 볼텍스 디토네이터. 대기 중에 흩뿌린 마력의 원소들로 하여금 동시다발적인 폭발을 일으키게 만드는 광역마법. 발동 전까지는 단순히 마력 원소로 남기 때문에 그것들이 폭발을 일으키기 위해 퍼뜨려진 것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는 없다. 게다가 마법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마력의 원소들을 뿌릴 수 있으니, 당하는 입장으로서는 알아차려봤자 뒤늦은 시점인 것이다. 단 하나만 놓고 보자면 강하다고 볼 수 없는 폭발이지만, 셀 수 없이 많은 대기 중의 마력 원소들이 한 번에 폭발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부순다는 행위에 특화된 마법인 것이다. 물론 자신 역시 그 범위 내에 포함되기 때문에 방어 마법을 통해 방어를 행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마력의 폭발로 인한 빛이 수그러들었을 때엔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AMM들은 단 한 대도 없었다. 완전히 산산조각이 난 채로, 마법으로 인해 파괴된 도로 위에 흩뿌려진 AMM들의 잔해. 루시안은 그제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페이트의 시선을 눈치 챘다. 그리고 그 시선에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이래서 싫었던 거야.’ 두려워하고 있었다, 페이트의 시선은. 큰 부상을 입고 시체와도 같은 모습이 된 친구의 모습에서 받은 충격. 그리고 살상 설정 마법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능숙하게 사용하면서, 효율적으로 파괴 행위에 임하는 루시안의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까. 실제로 페이트는 생각했다. 『마도사가 아니다. 병기, 그 자체다』 지금까지 페이트가 생각해왔던 마도사, 그리고 마법의 개념을 산산조각 내버린 루시안의 마법. 비 살상 설정의, 인명 피해를 내지 않는 안전한 힘이 마도 문명의 의미라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루시안 블레이즈의 마법은 이 틀에서 완벽히 벗어나버린 것이었다. 마도 통괄관이라고 불렸던 것이, 페이트는 단순히 훌륭한 마도사라서 그런 줄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이해했다. 그가 어째서 마도 통괄관으로 불리게 되었는지를…. 그 누구보다도 효율적으로, 능률적으로 상대를 파괴할 수 있었기에. 마도사들은 그를 마도 통괄관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이유는 그에 대한 동경과 존경이라기보다는, 두려움이 짙었을 것이고…. 어째서 루시안이 마법을 쓰기 싫어했는지, 페이트는 오늘에서야 처음 보는 마도사로서의 루시안의 모습을 보며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랬기에 그는 마도 통괄관이라 불렸던 것이다. “너한테는,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조금은 떨면서, 자신을 괴물 보듯이 보고 있는 페이트의 모습에 루시안이 씁쓸히 웃으면서 하는 말. ‘이 아이가 날 이해해주는 것은 무리였던 걸까…?’ 언젠가 그는 페이트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10명의 몫을 해내는 마도사는 10명 분의 증오를, 100명의 몫을 해내는 마도사는 100명 분의 증오를 받게 된다.』 그것은 본인, 루시안 블레이즈의 얘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요할 때엔 자신을 원했으나, 필요하지 않게 되었을 때엔 자신을 두려워하고 증오했으니까. 겨우 몇 명의 이들이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해줬고, 이해해줬을 뿐이었다. 다른 이들을 도와줌에도, 증오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싫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두려움과 경외의 시선이 싫었기에…. 그래서 그만두고자 했던 것인데…. 순식간에 AMM 16대를 파괴해버린 루시안은 어쩐지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하고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버스 정류장의 사람들은 어김없이 자신에게 두려워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건 페이트도 마찬가지였다. 페이트에게만은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설령 보이게 되더라도, 이해해주길 바랬건만…. 살상 설정의 마법만을 사용하는 마도사. 이단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이 바로 루시안.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것을 참아내기 위해, 억지로 웃어 보이는 것이었고…. 《16:30 미드칠더 수도 크라나간, 시공관리국 차원 정보국》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사격 마법의 탄막. 그것은 정문에 떡 하니 버티고 있는 견고한 바리케이드의 뒤에서부터 쏟아지고 있는 것이었다. 수많은 마도사들이 바리케이드 뒤에 숨어, 틈 사이를 통해 사격마법을 쏘아댔고 바리케이드에 의해 진로가 막힌 기계 병기들은 질량 병기의 포화로 응수한다. 지금, 마도사들의 저항은 이전과는 달랐다. 크라나간에 있는 차원 정보국을 지키고 있는 마도사들은 대(對) AMF 교육을 어느 정도 거친 마도사들이었던 것이다. 다중 탄각 마법을 통한 사격 마법.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마법은 보통의 마도사들이 익힐 수 있는 유일한 공략법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었다. 그리고 마도사들은 견고한 방벽의 뒤에서 수십 대의 AMM 육전형들을 상대로 체계적인 방어를 해내고 있었다. AMM들의 돌진과 포화는 정문을 막고 있는 바리케이드를 부수기엔 역부족이었고…. 차원 정보국에 상당한 숫자의, 대 AMF 훈련을 받은 수준급의 마도사들이 배치된 이유는 간단했다. 유적 발굴부가 있기 때문이다. 유적 발굴부. 유적 및 로스트 로기아를 발굴, 관리하는 차원정보국 산하의 부서. 타 차원의 유적을 발굴하고 고고학적인 연구를 하는, 그리고 악용될 소지가 있는 로스트 로기아들을 관리하는 곳이기도 하다. 비록 대부분의 로스트 로기아들이 본국의 시설에 보관되어 있다고는 하나, 크라나간의 차원정보국 유적 발굴부에도 상당한 양의 로스트 로기아들이 연구를 위해 보관되고 있었다. 아직 용도를 알 수 없었기에 연구하고 있던 것들이다. 용도를 알 수 없다는 말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다는 말이니까, 그것들이 범죄 집단의 손아귀에 넘어간다면 큰 재앙이 일어날 것은 당연한 일. 다수의 AMM들이 차원정보국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을 때, 수뇌부는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차원정보국에 다수의 인원을 배치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판단은 적절했다. 대 AMF 교육을 받은 마도사들의 집단은 AMF를 탑재한 AMM 육전형을 상대로 효율적인 전투를 해내고 있었으니까. 단번의 마법으로 완파시키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작은 타격을 여러 번 입히면서 여러 대의 AMM들을 파괴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에 한 몫을 한 것이, 단단히 구축된 단 하나의 바리케이드. 만약 여러 겹의 바리케이드를 구축해서 전력을 분산시키거나 했으면 뚫렸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바리케이드만을 견고히 구축해 전력을 집중시킨 것은 훌륭한 판단이었다. 적어도 AMM들을 막아서고 있는 마도사들의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광대』는 그렇게 생각했다. “호오….” 사격 마법의 탄막이 펼쳐지고 있는 지상을 내려다보면서, 광대 에밀리오는 몸을 흐느적거린다. “이제야 제대로 된 마도사들이 나오기 시작했구먼.” AMF에 대응도 하지 못하는 마도사들은 마도사의 축에 끼기도 힘들다는 것이 에밀리오의 생각이었으니까. “훌륭하오, 참으로 훌륭하오… 킥킥킥….” 허공에서 한걸음, 한걸음을 내딛으며 에밀리오는 키득거린다. AMM들이 목적지에 거의 다 왔으면서도, 시공관리국 마도사들의 저항에 막혀있음에도 그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낄낄거렸다. 온몸이 짜릿짜릿했다. 에밀리오는 적어도 그렇게 느꼈다. 그것은 AMM들에 대적해서 선전하고 있는 시공관리국의 마도사들 때문인가? 아니다─. 광대에게 있어서 이 상황은 이미 예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광대는, 자신의 손에 놀아나는 마도사들의 모습에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다. 허공에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광대. 멈춰선 광대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기계로 이루어진 왼쪽 의수가 아닌, 오른쪽 팔을. 그리고 그것의 끝으로부터 펼쳐지는 것은 화려한 베르카 식의 마법진. “너희들은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마도사들이여…?” 그는 시를 읊듯이, 제딴에는 엄숙한 목소리로 지껄인다. 지상에서 한창 펼쳐지던 사격마법의 탄막이 옅어지기 시작한 것은, 바리케이드 뒤에 숨어있던 마도사들이 자신들의 위에 펼쳐지는 마법진을 눈치 챘음일까? 아름답게 하늘을 수놓은 은빛의 마법진. 그 크기는 엄청난 것이어서, 한창 혈투를 벌이고 있던 마도사들의 행동조차도 멈추게 만들었다. “…전송 마법인가…?” 마법진을 바라보며 한 마도사가 중얼거린 말이었다. 마도사들과 마찬가지로, AMM들 역시 전투를 멈추고 물러나는 것이었으니. 기계군단의 이상 행동에 마도사들은 의아해하면서 자신들의 머리 위, 하늘에 펼쳐지는 베르카 식의 마법진을 발견했고…. “…뭐야, 저건….” 무언가를 발견한 한 마도사가 중얼거린 말. 하늘로부터 떨어지고 있는 무언가. 아니, 무언가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펼쳐진 어처구니없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얼어붙고야 말았다. “이런 빌어먹을…!”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진 하늘로부터 『무언가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자신들을 향해서. 엄청난 속도로 떨어져오는, 대기와의 마찰로 인하여 불꽃을 머금고 떨어지는 것들. “운석…!” 디바이스를 통해서 마력 원소로 이루어진 마법이 아니라, 실체를 지닌 물질이라는 것을 파악해낸 한 국원이 지르는 비명이 작은 운석들이 떨어지고 있는 하늘에 울려퍼졌고. 그것을 뒤늦게 발견한 마도사들의 포격 마법이, 하늘의 마법진으로부터 나타나 떨어져오는 운석들을 요격해내기 위해 발사되었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들을 요격하기 위해 발사되는 포격 마법들의 탄막을 내려다보면서 유린하는 광대의 웃음소리가 하늘에 울려퍼졌다. * * * * * *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푸른 마력광을 하늘에 수놓으면서, 그곳에 도착한 루시안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차원 정보국의 정문.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남아있는 것은 완전히 박살이 나버린 바리케이드의 작은 파편들과 처참하게 훼손되어 있는 마도사들의 사체들. 그리고 큰 충격을 받아 파괴된 듯한 그들의 디바이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도중, AMM들과 조우했던 루시안은 평소의 다짐을 깨고 마법을 사용하여 그것들을 파괴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파괴했을 때, 겁에 질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페이트의 눈빛은 그의 기억 속에 확실히 각인되어 있었고…. 살상 설정의 마법을 사용하는 마도사를 처음 본 페이트의 눈빛은, 통제할 수 없는 병기를 보고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페이트가 자신을 병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너무나도 쓰라리게 느껴졌던 루시안이었으나…. “….” 느꼈던 것이다, 아까 전 이 곳에서 뿜어져 나왔던 강렬한 마력의 파동을. 솔직히 말해서, 그 마력의 파동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와 동급, 어쩌면 그 위일지도 몰라….’ 두려움에 젖은 페이트의 시선마저도 잊게 만들었던 엄청난 양의 마력. 그것 때문에 벌레들이 불빛에 이끌리는 것처럼, 루시안은 깜짝 놀라면서도 경악하여 그것에 이끌리듯이 이곳까지 왔던 것인데….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생존자는 없는 걸까? 무엇인지 모를 큰 충격에 휩쓸렸던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난 마도사들의 사체를 보면서 루시안의 표정은 더욱 굳어져만 갔고…. 포격 마법? 아니다, 포격마법이라고 보기엔 피해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다. 광역 마법? 광역 마법도 아니다. 살상 설정의 광역 마법이었다면 마도사들의 사체는 남지 않았을 거고…, 광역 마법을 사용했다면 그 이펙트가 크라나간 전체에 퍼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마도사로서의 지식을 동원해서, 루시안은 어떤 마법으로 인해 차원 정보국 정문이 휩쓸렸는지 알아내려고 했다. 어떤 마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이 느꼈던 그 마력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 그러면서 궁그닐을 들고 한참이나 폐허 위를 돌아다니던 도중, 루시안은 아직 바이탈 사인이 남아있는 디바이스를 발견하곤 생존자가 있다는 것에 놀라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이봐, 살아있나!?” “…으…, 으으….” 그리고 그 디바이스를 쥐고 있는 한 젊은 남자 마도사의 모습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보자, 고통에 겨운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었고…. 하지만 루시안은 그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였으니, 이유인 즉 그 마도사의 하반신은 어딘가로 사라져있었기 때문이었다. 【Restoration Field】 회복 마법을 걸어준다 해도 살아남지는 못하겠지만, 일단은 조금이라도 생명을 유지시켜보기 위해서 걸어주는 회복 마법.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의 마도사였다. 아마도 집무관으로 한창 일할 때, 함께 일했던 적이 있었던 마도사였겠지만. 그렇다고 잘 알고 있거나 한 것도 아닌, 얼굴만 본 적이 있는 마도사. “루시안 K. 블레이즈 집무관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브, 블레이즈… 마도 통….” 젊은 마도사 역시, 젊은 집무관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인지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된 건가?” “모두… 죽었…, 운석…, 놈…, 안으로 들어갔….” 남아있는 모든 힘을 짜내듯이, 토막 난 말을 내뱉는 마도사. 그 말로부터 루시안은 몇 가지 키워드를 끄집어내다. 운석. 놈.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조금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운석’이라는 말이었으니. ‘놈’이라는 말은 아마도 얼마 전에 이곳에서 마법을 사용했던 마도사가 확실하다고 루시안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차원 정보국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도 마도사가 한 말을 통해 짐작했고…. 하지만 ‘운석’이라니? “….” 더 물어보려고 했으나 마도사는 유언 비슷하게, 모든 힘을 짜내 루시안에게 말을 한 뒤 숨을 거둔 뒤였고. 루시안은 부릅뜬 채의 그 눈을 감겨주었다. AMM. 그리고 범법 집단이 차원 정보국을 습격했다. 그렇다면 하나뿐이라고 루시안은 생각할 수 있었다. 차원 정보국 산하 부서, 유적 발굴부에서 연구 및 보관하고 있는 로스트 로기아들을 노린 것이다. 범법 집단이 로스트 로기아를 이용해서 범죄를 일으킨 경우는 꽤나 흔했으니까. 한시라도 지체해서는 안 된다. 범죄자의 손에 로스트 로기아가 넘어간다면 큰 재앙이 일어나게 될 테니까. 게다가 루시안에겐 로스트 로기아에 관련된 좋지 못한 기억까지도 있었고. 그것 때문인지 몰라도 루시안은 자신이 전에 없이 초조해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시선으로 보고 있던 아이에 대한 기억은 이미 사라져있었다. 그리고 루시안은 이동계 마법인 썬더러를 발동시킨 뒤, 유적 발굴부 쪽을 향해 마력광을 남기면서 모습을 감추는 것이었다. * * * * * * 《같은 시각, 차원 정보국 지하, 유적 발굴부 관할 유물 보관소》 흐느적거리는 발걸음이 아니라, 확실하고 뚜렷한 발걸음이었다. AMM들을 막기 위해 차원 정보국 정문에 배치된 수많은 마도사들. 그 마도사들을 단 번에 몰살시키고서, 에밀리오는 원래 주인이 집에 돌아오기라도 하는 것마냥 차원 정보국 안으로 들어왔었다. AMM들이 향해온다는 소식을 들었던 탓인지, 차원 정보국 내부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랬기에 에밀리오는 쓸데없는 피를 흘리지 않게 되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렸었다. 수많은 마도사들을 학살해놓곤 이렇게 유쾌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건 어디까지나, 그가 정상인이 아닌 광대였기에 가능한 생각. 그리고 에밀리오가 발걸음을 옮긴 것은 차원 정보국 지하에 있는, 유적 발굴부가 관리하는 유물 보관소. 조사 중인 로스트 로기아들을 모아놓고 관리하는 유물 보관소였고, 그가 이곳까지 오기 위해선 ID 카드가 필요한 게이트를 많이 거쳐 왔지만 그런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금속은 단단하다. 하지만 아무리 금속이라도 낮은 온도까지 냉각되면 그것은 쉽게 부서지게 된다. 그 방식으로 광대는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ID카드가 필요한 관문에 맞닥뜨리면 관문을 얼어붙게 만든 뒤 부서뜨리는,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말이다. “큭큭큭….” 광대는 조명이 밝혀진 어둠 속을 걸어 다니면서 웃음을 흘리었다. 조명에 의지해서, 일직선으로 쭉 연결된 복도를 따라다니면서 에밀리오는 수많은 로스트 로기아들과 접촉하게 되었었다. 아름다운 것, 별 볼일 없는 것, 위험한 것, 위험하지 않은 것. 이런 분류 외에도, 수없이 많은 방향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 로스트 로기아들을 말이다. 그 중에서는 한때 메스컴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로스트 로기아들도 있었으나, 광대 에밀리오는 그것들에겐 시선을 한번 주었을 뿐. 발걸음을 멈추거나 하지는 않았다. 시설의 관리는 완벽했다. 행여나 로스트 로기아들끼리 반응하는 일이 있을까봐 완벽하게 격리시켜둔 것은 만에 하나의 상황을 막기 위한 철저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런 유물 보관소는 에밀리오로도 탄성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특 S급 로스트 로기아들만을 모아둔 구역이기도 했으니까. 개중에는 죽은 사람도 살려낼 수 있는 힘이 있을지도 모르는 로스트 로기아들도 있었다. 그러나 광대의 발걸음은 계속해서 안쪽으로 향해져만 갔다, 마치 용건이 있는 것은 따로 있다는 것처럼…. 그리고 마침내, 에밀리오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특 S급 로스트 로기아들이 보관되어 있는 곳에서도 가장 안쪽. 또 다른 게이트의 앞이었다. ID 카드를 확인하기 위한 장치조차도 없다는 것을 에밀리오는 알아챌 수 있었고. “뭐… 어차피 여기는 ID 카드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어차피 자신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ID 카드를 통해 게이트를 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별로 상관이 없다는 목소리였다. 오른 손을 뻗어서, 금속으로 만들어진 게이트에 갖다 대는 에밀리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기분 나쁜 소리가 나면서 금속으로 만들어진 게이트가 손이 갖다 댄 부분부터 얼어가는 것이었고 손을 떼곤 왼손을 뻗어서 그 부분을 후려치자 게이트는 너무나도 쉽게 박살이 났다. “나한텐 별 의미가 없지만, 큭큭….” 에밀리오는 게이트를 만든 이들을 비웃는 것처럼 웃음을 흘린 뒤 안으로 걸어들어 갔고, 이전과는 또 다른 진풍경이 펼쳐졌다. 이전의 로스트 로기아들이 보관되고 있는 공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원형 구체(球體). 거대한 지구본을 연상시키는 것은 그가 찾고 있던 로스트 로기아였다.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암뤈 반응도 보이지 않는 그 거대한 로스트 로기아를 광대는 올려보았고. 광대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다, 마스크의 안으로부터 웃음소리가 작게 흘러나오고…. “옛날, 한 장님이 있었다.” 시를 읊듯이 목소리를 뽑는 광대. “장님은 어리석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장님을 불쌍하게 여기거나 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앞을 볼 수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장님은 앞을 볼 수가 없었다.” 마스크에 가려서 표정을 읽을 수 없었으나, 그는 필시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을 것이리라. “장님은 모든 것을 증오했다, 자신이 볼 수 없는 모든 것을. 그리고 자신의 얼굴조차도 볼 수 없는 스스로마저도….”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거대한 로스트 로기아에게 광대는 다가갔다. “그리고 장님은 결심했다, 자신이 증오하는 모든 것들을 없애버리겠다, 영원히 증오하겠다고─.” 그리곤 한참이나 키득거리더니, 웃는 것을 멈추고 광대는 로스트 로기아를 올려다본다. “그것은 장님의 어리석음이었다….” 거대한 구체 형태의 로스트 로기아. 특 S로 구분되는 로스트 로기아 중에서도, 다른 것들과 더욱 격리되어 보관되어 있던 정체불명의 것. 그리고 광대 에밀리오는 그것을 한참이나 찾았던 것처럼, 그것과 조우하게 되자 환희에 젖은 듯이 행동하고 있었고…. 거대한 로스트 로기아에 에밀리오가 손을 갖다대자, 에밀리오와 로스트 로기아의 밑으로 마법진이 펼쳐졌다. 전송 마법. 광대는 그것을 자신과 함께, 전송시키려는 것일까? 그런데 갑자기 마법진이 사라지면서 전송 마법을 사용하려던 것을 그만 둬버리는 광대. 그리고 로스트 로기아에 갖다대어진 손엔 그의 디바이스가 들려있었고, 에밀리오는 울레르를 강하게 휘둘렀다. ─자신을 향해 휘둘러진 창에 맞받아치기 위해서. 광대는 자신을 향해 휘둘러진 뇌격의 창을, 서리의 검으로 막아내었다. 하지만 힘에서는 밀렸던 건지, 맞받아 쳤음에도 광대는 튕겨져 나가듯이 뒤로 물러서며 로스트 로기아와 멀어지게 되었고 광대가 서있던 자리엔 푸른 플라스마를 두르고 있는 남자가 서있게 되었다. “…네놈, 뭐하려는 거냐!” 조금은 당황한 목소리였다. 아마도 광대가 로스트 로기아에 손을 갖다대고, 자신과 함께 전송 마법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것을 봤었기에 당황한 음성을 내뱉는 것이겠지만. 이동계 마법인 썬더러로 한참이나 유물 보관소를 뒤지고 다니던 루시안. 그러던 도중 느낀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동원된 마력의 흐름을 느끼곤, 장애물에 구속받지 않고 이동할 수 있는 이동계 마법의 특성을 이용해 광대를 찾아낸 것. 썬더러를 통해 이 장소에 오게 되었을 때, 루시안이 기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전송 마법을 통해 이곳을 빠져나가려던 광대와 정체불명의 로스트 로기아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재빠르게 궁그닐을 휘둘러 그 시도를 막아냈지만 상대방이 암드 디바이스로 궁그닐을 맞받아쳤을 때 그 힘에 또 한번 놀랬었고…. 루시안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가면인을 노려본다. 이 곳에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폐허가 되어버린 차원 정보국의 정문. 루시안은 자신이 오기 전에 느꼈던 강대한 마력의 파동이 상대의 것과 같다는 것을 확신했다. 아까 느꼈던 대로라면 이 자는 무시할 수 없는 실력자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루시안은 전력을 다하려고, 곧장 근거리 포격 마법(디솔레이터)를 상대방에게 사용하려 했는데 “큭, 큭큭, 하하하하!!” 상대방이 느닷없이, 크게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리는 것에 흠칫거렸다. “블─레─이─즈─” 그리고 상대방이, 자신의 성을 의미심장한 어투로 내뱉는 것에 루시안은 얼어붙었다. 마도 통괄관이라고 불리면서 수많은 범죄자들을 잡았던 루시안이었기에, 어지간한 범죄자들은 루시안의 이름에 대해서 알고 있을 터이기에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건 이상할 게 없었다. 범죄자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고, 마법을 사용하려던 것을 멈출 루시안이 아니란 얘기. 하지만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억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시안이 얼어붙은 그때, 광대가 사용한 바인드가 루시안의 몸을 속박했고 그때서야 낭패를 봤다는 듯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루시안. ‘…보통의 바인드가 아냐…!’ 사지와 목을 옭아맨 바인드는 보통의 바인드가 아니었다. 포박과 상대방의 무력화를 위한 바인드가 아닌, 상대방을 죽이기 위한 ‘살상형 바인드’. 【Distortion purge】 마치 뼈를 으스러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강하게, 빠르게 압박해오는 바인드의 힘에 루시안은 황급히 바인드를 풀어내곤 빠져나올 수 있었고. 보통의 마도사라면 바인드를 풀어내기도 전에 바인드에 의해 목뼈가 부러졌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상대방을 노려보았고. 어느 새엔가 광대는 정체불명의 로스트 로기아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것에 손을 갖다 댄 채로, 다시 전송 마법을 사용하려는 광대. “극(劇)의 기본적인 구성─.” 그리고 광대 가면의 건너편으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틀을 유지한다.” “뭐…?” “광대의 극은 이제야 위기에 접어들었을 뿐, 미천한 광대는 그 구성에 충실하고 싶소이다. 마도 통괄관 나리.” 상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루시안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평소대로라면 상대방이 무슨 말을 지껄이든지 상관치 않고 공격했겠지만…. 하지만 지금의 상대방에게, 싸우려는 의지가 없음을 감지하고서 루시안은 상대방이 내빼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증거로 로스트 로기아와 광대를 감싼 전송 마법. 마법 술식의 구축은 재빠르고 정확했다, 하지만 광대는 마음만 먹으면 전송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마스크 건너편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해져있다는 걸 루시안은 알 수 있었고. 이 틈에 공격해버릴까? 이런 생각도 해 봤지만 그만두었다. 순식간에 구축한 전송 마법, 디바이스끼리 충돌했을 때의 힘, 그리고 다른 것들과는 성질 자체가 틀린 살상형 바인드. 공격을 하더라도 전송 마법을 발동시켜서 금새 사라져버릴 것이므로 힘빠지는 짓은 하고싶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가장 거슬렸던 것이 있었으니까.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그 억양. “…넌, 누구냐….” 분명히 들은 적이 있었던 어투다. 하지만 떠올릴 수가 없었다. 접촉했던 범죄자들만 해도 수없이 많으니까, 그들 중에서 찾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게다가 자신의 기억에 이 정도의 능력을 가진 마도사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루시안은 상대방에게, 적의를 담은 시선을 보내면서 묻는 것이었다. 루시안의 이 말에 광대는 낄낄거리는 것처럼 어깨를 들썩이더니 익살스러운 목소리로, 역으로 물어온다. “역으로 묻겠소이다. 미천한 광대는 대체 누구일까…?” 모르는 것을 역으로 물어오는 것에 침묵하는 루시안. “해답은 마도 통괄관의 기억 속에 있소이다.” 광대는 이렇게, 노래하는 듯한 어조로 지껄인다. “다음에 만날 때, 답을 듣도록 하지. 마도 통괄관.” 그리고 그제야 발동되는 전송 마법. 마법진으로부터 발해진 은색의 빛이 대형 로스트 로기아와 광대를 감쌌다. 이미 전송 마법이 구축이 된 이상,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전송 마법에 달려들어서, 함께 전송되는 무모한 방법이 있겠지만… 목적지도 모르는 곳으로 전송되고 싶지는 않았고. 그래서 루시안은 궁그닐을 들고, 몸에 플라스마를 두른 채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광대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 상대방과의 거리는 멀었다. 하지만 가면으로 뒤덮인 상대방의 얼굴, 그리고 그 얼굴이 머금고 있는 표정이 보이는 것만 같은 루시안. 웃음이 있으리라, 광대 가면의 건너편에. 베르카 식의 마법진으로부터 뿜어진 은빛이 잦아들고 거대한 로스트 로기아와 함께 광대가 모습을 감추자 혼자 남겨진 루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었고…. 혼자 생각하는 것이었다. 광대가 자신에게 남기었던 말. 『해답은 마도 통괄관의 기억 속에 있소이다』 이 말만을…. #13 그랑실리드 《신력 66년 6월 20일, 12:00 미드칠더 수도 크라나간, 항공 무장대》 원래는 그가 있을 자리가 아닌 자리였다. 하지만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나, 루시안.” 그리고 이곳, 항공 무장대의 실질적 수뇌인 항공 무장대 명예 원수이자 시공관리국의 3 제독 중 한 명인 라르고 킬이 그에게 묻는 말이었다. 루시안이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은 공간 투사 윈도우, 허공에 떠오른 스크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영상. “전송 마법으로 운석을 불러온다, 라….” “….” “…이미 마도사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수준을 넘어섰군.” 라르고 킬 역시 젊은 시절엔 마도사로서 일했던 경험도 있고, 또한 직업상 마법에 대한 지식이 쌓일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런 그가 하는 말이었고…. 루시안이 계속해서 보고 있는 영상은 차원 정보국 정문을 지키고 있던 마도사들이 몰살되었을 때의 영상. 그것은 현장에 남아있던 스토레이지 디바이스의 데이터로부터 뽑아낸 영상이었고…. 루시안은 계속해서 그 영상을 되감고 재생하는 것을 반복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운석이라는 말이, 이런 거였나….’ 젊은 마도사가 죽으면서 자신에게 남겼던 말 중 하나인 운석, 그것의 의미를 루시안은 알게되었고…. “실제로 현장에서 검출된 암석의 파편을 분석한 결과, 우주 궤도상의 운석들로 추정된다더군.” “…그렇군요.” 검은 로브로 온몸을 감추고, 광대 가면을 쓴 남자가 허공에 은빛의 베르카 식 마법진을 출현시키자, 그곳으로부터 작은 운석들이 쏟아져 내리는 영상을 보는 것을 루시안은 그만 두었다. 이 영상 속의 남자는 자신이 유물 보관소 내부에서 맞닥뜨린 마도사가 확실했고…. “…가능하겠나?” 라르고 킬이 묻는 말. 그 말에 루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원리는 알 수 있다. 전송 마법을 통해 우주궤도 상의 소규모 운석들을 불러오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우주궤도에서 초속 수 킬로미터로 움직이는 그것들을 전송 마법으로 불러온다는 것은 도저히 상식 외의 것이라 루시안은 판단하는 것이었고…. 그리고 이 자가, 시그넘이 자신에게 말했었던 광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원래는 보조, 서포트 용으로 사용되는 마법을 전투에 응용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도사로서, 어떻게 생각하나?” 이번에 묻는 말은 광대를 가리키며, 라르고 킬이 한 것이었다. 마도사로서 광대, 범법 마도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 말은 곧 루시안에게 상대가 어느 정도의 마도사냐고 묻는 말이었고 “마도사 랭크 S, 혹은 SS로 생각됩니다. …어쩌면 그 이상일 지도 모르지요.” “…그 이상이라….” 루시안의 굳어있는 말에 라르고 킬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까지, 범법 마도사들 중에서 SS로 분류되는 범법 마도사는 없었지.” 시공관리국의 역사는 그렇게 길지 않다. 하지만 그 짧은 역사 동안 수많은 투쟁을 헤쳐나온 것이 시공관리국이라는 집단이다. 하나의 세계에 멈추지 않고 광범위한 세계에서의 싸움,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시공관리국에 대적했던 수많은 범법 마도사들. 그중에는 시공관리국을 뒤흔들어 놓았다 표현해도 무방할 마도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 라르고 킬의 말대로 마도사 랭크 SS로 분류되는 범법 마도사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마도사 랭크가 마도사로서의 실력에 대한 모든 것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지만. 라르고 킬이 가장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SS라는 말이 보통 사람이 아닌 루시안 블레이즈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게다가 서포트 마법을 전투에 응용했다는 것은 당사자의 기량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고…. “…시공관리국 사상 최악의, 범법 마도사가 나타날지도 모르겠군.” 근심이 깃든 한숨을 내쉬는 라르고 킬. 실제로 시공 관리국 내의 마도사들 중에서도, SS랭크로 분류되는 마도사들의 수는 적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SS랭크라 하더라도 다 같은 SS가 아니라는 건 라르고 킬 앞에 있는 청년이 잘 보여주었던 것이고…. “AMM…, 그리고 사상 최악이 될 수 있는 SS랭크의 범법 마도사….” 자리에서 일어나, 라르고 킬은 집무실 창문의 밖을 내다본다. 항공 무장대는 AMM 육전형들의 습격에서 피해나갈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상대방이 아예 바보거나 전면전이 아닌 이상. 우수한 마도사들로 이루어진 항공 무장대에 아까운 AMM들을 쏟아 붓지는 않겠지만.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일이 너무 커졌네. 내 선에서, 항공 무장대의 선에서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닐세. 이젠… 시공 관리국 전체의 일로 일이 번져버렸으니, 앞으로 지켜봐야겠지.” “누구에게, 이번 일을 담당시키실 생각이죠?” 루시안이 그에게 묻는 이유는 라르고 킬이라는 인물이 시공관리국 국원들의 인사를 담당하는 보안국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지금까지, 본인의 판단 하에 항공 무장대 대부분의 사건을 적합한 인물에게 맡겨왔었던 것이고…. “…마땅한 인물이 없군.” 하지만 그로서도 마땅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다. 시공 관리국의 몇 안 되는 마도사 랭크 SS의 마도사들 중 누군가에게 일임하는 것이 낫겠지만…. 마땅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수사를 도울 수사관들, 그리고 내려진 지시를 이행할 국원들과 수사에 협조해주는 시공관리국의 모든 부서들. 이들 모두는 1류로 편성할 수 있다. 하지만 수사를 이끌고 주도해나갈,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인물을 1류로는 안된다. 초 1류여야만 한다는 것이 라르고 킬의 생각이었으니…. “제게, 이번 일의 전권을 일임해주십시오.”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루시안의 이 목소리에 라르고 킬의 표정에 큰 반응이 왔다. 그 반응은 물론 놀라움으로 인한 것이었고.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선, 소파에 곧게 앉아있는 루시안을 응시하는 라르고 킬. “…진심인가?” 분명 루시안 블레이즈라면 초 1류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라르고 킬은 생각했다. 시공관리국의 3제독이라고 불리는 자신들의 뒤를 이어, 시공관리국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생각해왔었고. 마도 통괄관이라는 칭호로 불리었던 이이기도 하다. 마도사로서의 재능은 물론, 그 외의 여러 가지 일에도 그 누구보다 출중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시공관리국에서 걸어 나갔었다. 물론, 루시안이 본인에게 전권을 일임해달라는 말을 했으니 자신은 당연히 그렇게 해 줄 것이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레오네 필스나 미제트 크로벨 역시…. 하지만 라르고 킬은 루시안이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로 이런 말을 한 것인지 궁금해 하는 것이었고…. 라르고 킬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루시안은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었다. 『해답은 마도 통괄관의 기억 속에 있소이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남기었던 이 말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의 기억도 역시. ‘놈은 날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기억 속엔 없다. 무척이나 꺼림칙한 것이다. 보통이라면 그냥 무시했을 일이지만, 마도사로서의 능력 역시 깊이를 알 수가 없다는 것도 걸리는 것이었고…. “알겠네.” 그리고 라르고 킬은 루시안이 자원해서 이번 일을 일임해 달라 한 것을 받아들였다. “킬 보좌관을 빌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그 누구가 됐더라도 받아들였으리라, 마도 통괄관이 본인의 입으로 자신에게 사건의 모든 것을 일임해달라는 말을 한다면. 특히나, 루시안에게 그 누구보다도 기대를 걸었고 지원해주었던 라르고 킬이라면 당연한 선택인 것이다. 게다가 루시안이 시공 관리국에서 나갔을 때, 그가 내었던 것은 시공관리국 내에서의 지위에 대한 사직서였지 갖고 있는 집무관 자격을 아예 포기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자격은 충분했다.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다. “블레이즈 집무관.” 『루시안』이라 부르는 말이 아닌, 그 옛날의 『블레이즈 집무관』이라는 호칭이 늙은 제독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부탁하지.” 그 말은 승낙의 뜻. “마지막일겁니다.” “….” 그리고 루시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라르고 킬의 집무실을 나가기 전에 내뱉은 말이었으니. 루시안이 집무실에서 나가게 되자 라르고 킬은 그가 했었던, 마지막일 거라는 말을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 * * * * * 《13:30 미드칠더 수도 크라나간, 차원 정보국 유적 발굴부》 “어째서 밝힐 수 없다는 거죠?” 사무실 안에 울려퍼지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주인은 아델리에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향해진 것은, 유적 발굴부에서 일하고 있는 듯한 안경을 쓴 한 국원에게로 향해져 있었고. “…죄송합니다. 하지만 상부의 지시라….” “기가 막히네요, 뭐인지도 모르는 로스트 로기아를 탈취하려는 범법 집단 때문에 수많은 마도사들이 죽었다고요! 그런 상황에서 수사에 협조해주지는 못할망정, 탈취된 로스트 로기아에 대해서 말해줄 수가 없다니요?!” “그만해, 킬 보좌.”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를 내며 따져드는 아델리에를 루시안은 만류했다. 하지만 그녀를 만류하면서도 루시안 역시 화가 나는 것은 감출 수가 없었다. 단지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애써서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것일 뿐. “본 집무관은 이번 사건의 모든 것을 일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수사에 협조해줄 수 없다는 겁니까?” “…그, 그게… 죄송합니다…. 상부에서….” 상부에서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밝힐 수 없다는 유적 발굴부 국원의 말에 루시안은 옅은 한숨을 내쉰다. 물론 거기엔 속으로 삭이고 있는 분노가 섞여있었고…. “상부라 함은,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그, 그건….” 이렇게 다른 물음을 던지자, 국원은 더더욱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라르고 킬 제독, 레오네 필스 제독을 비롯한 다른 상부 고위 인사들께서도 수사의 전권을 본 집무관에게 일임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상부의 명령 때문에 수사에 협조해줄 수 없다면, 그 상부라는 것이 누구인지 알고 싶군요.” 비록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라르고 킬을 비롯한 시공관리국 3제독의 힘은 막강하다. 그들 모두가 동조한 일에 딴죽을 걸고 넘어질 수 있는 인물은 드물고, 그 인물들을 모두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는 루시안이 묻는 말에 상대방은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하는 것이었다. 상대방은 크게 당황하고 있다. 유적 발굴부에서 일하는 국원 치고, 성격이 대담하거나 배짱 좋은 이는 드물다. 주로 음지에서 일하곤 하니까. 그래서 루시안은 배짱좋게 나가면서, 상대방을 흔들기로 했다. “수사에 협조해주지 않는다면, 당신을 비롯한 유적 발굴부는 물론 차원 정보국의 고위 인사들을 이번 사건과 연루되었다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그, 그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표정을 억지로 꾸며서 루시안이 이렇게 내뱉는 말에 유적 발굴부 국원의 안색이 질렸다. “…특 S급 범죄에 대한 시공관리국 국원의 동조 혐의는 중죄였죠, 집무관?” “기본 10년 넘게 징역을 살곤 하지.” “자, 잠깐만요…! 동조라뇨, 그게 무슨….” 아델리에가 덧붙이는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선 상대방이 다급히 물어왔고, 그것에 루시안은 마음속으로 걸려들었다고 생각한다. “사건의 수사를 방해한 것으로 보면 동조라 봐도 무방합니다만.” “마, 말도 안돼…!” “그렇다면 말해주시죠, 그 곳에 있던 로스트 로기아는 대체 뭐였습니까?” 물론 자신의 눈으로 봤었다. 여타 로스트 로기아들과는 규모 자체가 다른 로스트 로기아. 그리고 취급 역시 다른 것들과 유독 격리를 해서 보관하고 있었고…. 광대는 그것을 노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갖고 사라졌다. 그것을 찾아내려면 광대의 의도를 알아야 하고, 의도를 알기 위해선 그가 탈취한 로스트 로기아에 대해서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 루시안의 생각이었다. 루시안의 얼토당토 않은 공갈 협박에 안색이 새하얗게 되선, 한참이나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고민하던 소심한 성격의 국원. “으으…, 부장님이 말하면 절대 안 된다고 했는데….” 유적 발굴부의 부장이 함구하라고 했다는 말이 흘러나오자 루시안의 표정이 조금은 미묘해질 수 밖에 없었다. 대체 누가 그 정도의 영향력을 미친다는 말인가? 이렇게 의아해할 수 밖에 없었으나 상대방이 거의 넘어온 것으로 파악하여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했다. “으으… 알겠습니다. 알려드리죠….” 이 말에 자신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아델리에를 루시안은 볼 수 있었고, 웃음을 흘렸다. “실은… 이번에 탈취된 로스트 로기아는 다른 로스트 로기아들과는 따로 분류되어 연구하고 있던 것입니다….” “…특 S라 봐도 무방한 로스트 로기아들에서도 따로 분류되어서요?” 루시안이 묻는 말에 그건 어떻게 알았느냐는 표정을 짓는 국원. “그, 그렇습니다. 저도 딱 세 번 뿐이었지만… 그 연구에 투입되었던 적도 있습니다.” “무슨 연구였죠?” “로스트 로기아의 반응…에 대한 연구였죠.” 로스트 로기아의 반응을 연구했다. 이 말에 아델리에의 표정은 물론, 루시안의 표정까지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어째서 그런 짓을?!” 집무관 보좌가 다그치듯이 외치는 말. 그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로스트 로기아의 반응을 연구한다는 건 로스트 로기아 자체의 반응을 끌어내어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반응을 일으켜서 어떤 여파를 미칠지 모르는 것이 로스트 로기아였으니까. 자칫하면 크라나간이 날아가버릴 수도 있는 노릇. 아델리에가 다그치고 루시안의 표정이 험악하게 되는 것에 국원은 당황했다. “그, 그래서 그것이 보관되고 연구되고 있던 곳은 다른 로스트 로기아들이 보관된 곳과 차별화되어있지 않습니까?! 저, 저희는 시킨대로 했을 뿐이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 연구는 지속됬습니다…. 별 다른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으니깐요. 연구 과정에서 로스트 로기아의 반응을 통해… 그 로스트 로기아가 상당한 고 에너지를 낼 수 있는 것이라는 걸 알아냈죠….” 고 에너지체 로스트 로기아를 가지고 반응실험을 했다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는 아델리에였고. “실험 도중 돌발 사고는 단 한 번도 없었으니… 실험은 계속 됐죠. 그리고 그 로스트 로기아가 내는 에너지를 여러 방면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냈습니다.” “…여러 방면이라고 함은?” “예를 들면… 기상을 조작해서 가뭄을 해결한다든가…. 에너지 동력원으로 사용한다든가…, 실제로 그 로스트 로기아의 에너지는 마력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으니깐요.” “그 로스트 로기아는 어느 시대의 것입니까?” “고대 베르카, 베르카 왕조 두 번째 성왕 시대의 것이더군요.” 너무나 구체적인 이 설명에 의아해질 수 밖에 없었다. “…이봐요, 그런 걸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하는 거에요?” 미심쩍다는 듯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아델리에가 묻자 당황했던지 설명을 덧붙인다 “그거야… 발굴 당시, 『베르카 왕조, 두 번째 성왕, 어리석은 장님 라스폴을 위해』이라고 쓰여있었다더군요. 실제로 고대 베르카 왕조의 두 번째 성왕이 장님이었다는 문헌도 가끔씩 나오고….” “…장님이었다고요?” “예. 뭐… 저주를 받아 두 눈을 잃었다고 하던가…. 어쨌든 저희는 그렇게 들었습니다만….” “그래서, 그 로스트 로기아의 이름은?” 자신들의 목적은 로스트 로기아의 유래나 그에 관련된 전설이 아닌, 그것에 대한 정보와 그것이 어떻게 쓰일 지에 대한 정보이다. 그랬기에 루시안은 쓸데없는 방향으로 얘기가 흘려가려는 걸 바로잡곤, 그 로스트 로기아에 대해 알고있는 듯한 국원을 다그치는 것이었으니. “『장님의 눈(Hod's Eye)』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리고 국원의 입에서, 사라진 로스트 로기아에 대한 이름이 흘러나오자 루시안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뭐…?” 떨리는 목소리로, 국원에게 되묻는 루시안. 그 되묻는 말에 국원은 다시금 말을 내뱉는다. “그러니까… 『장님의 눈』이라고 불렀었…” “다시 한 번 말해봐…! 『장님의 눈』이, 확실해?! 장난치는 거면, 죽여 버리겠어!” “루, 루시안?! 왜 그래, 갑자기?!” 멱살이 잡힌 채, 뒤흔들리자 국원은 질겁해서 비명을 내지르는 것이었고 아델리에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루시안의 이런 모습에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왜, 왜이래요?! 갑자기…!” “이런 빌어먹을…!” 거짓말을 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겁에 질린 국원의 눈동자에서 그것을 발견해낸 루시안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밀쳐내듯이 멱살을 놓아버렸고…. “…제기랄.” “루시안?!” 그리고 그가 욕지거리를 내뱉고선, 사무실에서 뛰쳐나가는 것에 아델리에는 친구이자 집무관인 그의 전에 없던 이런 반응에 놀라면서도 그의 뒤를 따라 뛰어나올 수 밖에 없었다. * * * * * * “도대체 왜 그랬던 거야?” 차원 정보국에서 빠져나오는 차량의 안. 운전대를 잡은 아델리에는 조수석에 앉아, 턱을 괴곤 말없이 창 밖만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집무관에게 물었다. “그 녀석이 이번 일을 찔러버리기라도 하면, 아무리 너라도 시말서를 쓸 수 밖에 없을 거라고. 그 만한 배짱은 없어보였지만….” 아델리에는 전혀 루시안 답지 않은 행동이라 생각했다. 로스트 로기아의 이름을 듣는 순간, 사람이 갑자기 돌변해버린 루시안의 모습에 솔직히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고…. 지금까지 그런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겨우…, 아니… 겨우라고 하기엔 좀 그러려나. 로스트 로기아 이름 하나 들은 거 가지고 그런 반응을 보이다니….” “….” 핸들을 잡은 아델리에가 이런 저런 말을 해옴에도, 루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깊은 생각에 잠긴 눈을 하고 있을 뿐. 그런 루시안의 모습에 어쩐지 혼자 떠드는 것같이 되어버려서 아델리에는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그랑 실리드.” “…뭐?” 그때, 차가 신호등에 걸려서 멈춰 섰을 때. 입을 꾹 다물고 조수석에 앉아있던 루시안이 내뱉은 말은 아델리에의 기억 속에 있는 말이었다. “그게 왜 갑자기 여기서 나와? 그랑 실리드라고 하면…. 2년 전에 대지진으로 매몰된 미드칠더 서부의 도시잖아.” 그랑 실리드라고 하는 도시는 아델리에의 말 대로, 미드 칠더 서부에 있는 도시의 이름이었다. 크라나간과는 거리가 한참이나 떨어져 있어, 행정상으로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는 도시였지만 그 이름이 미드칠더의 사람들 뇌리에 박혀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문화의 중심지. 크라나간이 미드칠더의 행정의 중심지인 수도라면 그랑 실리드라고 하는 그다지 크지 않은 도시는 정신적인 수도라고 봐도 무방했었다. 수많은 옛 미드 칠더의 유적과 유품들, 그리고 고대 베르카의 유적과 유품들이 상당히 많이 출토된 곳이기도 하여 성왕 교회 측에서도 상당히 관심을 가지는 도시이기도 했으니까. 미드칠더에서 태어나거나 오래 산 이들이라면 한 번 쯤은 꼭 들어봤을 이름이었다. 적어도, 그 도시가 존재했었던 2년 전 까지는…. “…지진이라….” “왜? 지진 때문에 도시 전체가 매몰되어버렸던 거 맞잖아?” 당시에 휴가를 나와있던 아델리에였지만, 쉬고있는 와중에서 뉴스 속보로 나왔던 것은 보았었다. 그리고 뉴스에서는 엄청난 대지진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매몰되었다고 나왔었으니까. 하지만 루시안은 지진이라는 말에 비릿한 조소를 머금는 것이었고…. “지진이긴 지진이었지, 로스트 로기아가 일으킨 지진이었지만.” 한숨을 몰아쉬면서 이런 말을 내뱉는 것에 운전대를 잡은 이는 얼어붙었다. 운전수는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신호 바뀌었어. 뒤에서 차들이 경적 울리잖아, 뭐해?” 그리곤 급기야 신호가 바뀌었음에도, 차가 움직이지 않는 것에 뒤의 차들이 경적을 신경질적으로 울려대자 루시안은 넋 나간 아델리에의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가던 길로 가던 것이 아니라, 황급히 차를 돌려서 길가에 세우는 아델리에. “로, 로스트 로기아 때문에… 도시 하나가 매몰됬었다고?” “…그래.” 차를 멈춰 세우곤 경직된 목소리로 물어오자 루시안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얘기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어…!” “시공관리국 내에서도 극소수만 아는 얘기니까…, 시공관리국의 흑역사야. 좋지 못한. 그런 것을 괜히 자랑스럽게 떠벌리려 하겠어?” 그러면서 시공관리국의 언론 플레이라고, 루시안은 씁쓸하게 내뱉었다. “그럼 너는 어떻게 아는 건데?” “…시공관리국은 당시, 그랑 실리드라는 도시에 수많은 마도사들을 투입했었지. 도시 거주자들의 구조… 라는 명분 하에서.” “….” “하지만 실상은 도시 거주자들의 구조가 아니라, 그랑 실리드에 있던 시공관리국의 연구 자산들을 무사히 빼내오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어. 그리고 그 마도사들을 이끌었던 사람이… …나였고.” 원래대로라면 집무관인 루시안을 따라, 아델리에도 함께 갔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당시에 휴가를 나가있었던 그녀였기에, 집무관 보좌를 배제한 채 투입되게 되었고…. 루시안은 차라리 그때, 아델리에가 없었던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다른 사람한테 떠벌리고 다니면 안 돼,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수가 있으니까.” “…아, 알았어….” “어디서부터 애기해야 할까….” 2년 전의 일이다. 솔직히,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무너지는 도시, 그리고 사람들의 비명. 그것이 떠오르려고 했다, 그래서 루시안은 한숨을 내쉰 뒤 천천히 얘기해 나가는 것이었고…. “그때 넌 휴가 나가 있어서 잘 몰랐겠지만…, 그랑 실리드에서 지진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나서 상부에서 명령이 내려왔어. 그랑 실리드의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파견될 마도사 팀을 인솔하라는 명령이.” “상부? 할아버지?” “아니, 킬 제독은 아니고…. 그것까진 말해줄 수 없어.” 그리고 루시안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나한테는 따로 내려온 지령이, 그랑 실리드의 관리국의 자산을 무사히 빼내오라는 것이었고…. 인명 구조보다도 우선해서 말이야.” “….” “그래서 난 그 명령에 따랐지. 그랑 실리드의 시공관리국 지부에 있던 모든 데이터들과 연구 자료들…, 그리고 로스트 로기아.” “로스트 로기아를?” “그래. 그랑 실리드의 지진은 자연 현상이 아니라, 당시 발굴되어 연구 중이던 로스트 로기아가 반응을 일으켜서 일어난 거였어.” 시공관리국의 어두운 면을 자신의 입으로 루시안은 까발리고 있었다. 시공관리국 측에서 발굴해내어 연구중이던 로스트 로기아 때문에 발생한 대지진, 그것 때문에 하나의 도시아 매몰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하지만 당시의 시공관리국은 자신들이 일으킨 재해나 마찬가지임에도,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아닌 연구중이던 로스트 로기아를 회수해올 것을 명령했던 것이고…. 마도 통괄관은 그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로스트 로기아를 회수했어?” 아델리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리고 루시안은 한참이 지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이었으니까.” 운전석에 앉은 집무관 보좌의 표정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시공관리국이라는 집단에 몸담고 있음에도 그것이 갖고 있는 어두운 뒷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못했던 그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버렸으니…. “그때, 내가 회수했던 로스트 로기아가 바로 『장님의 눈』이었어.” 『장님의 눈』. 그것은 이번 일에 관련되어 있는, 『광데 에밀리오』라 시공관리국의 데이터 베이스에 등록된 범법 마도사에 의해 탈취된 로스트 로기아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난 『장님의 눈』을 회수한 뒤, 마도사들에게 인명 구조 명령을 내렸었지.” “….” “하지만 뒤늦었던 선택이었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었지, 죽은 사람들이 구한 사람들보다 더 많았고 그렇게 도시 하나가 끝장나버렸지.” 집무관이자 친구가 씁쓸하다는 듯이, 자조하면서 내뱉는 말에 아델리에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 날부턴가, 루시안이 시공관리국의 일에 대한 의욕을 모두 잃어버리곤. 매일 사직서를 내면서까지 은퇴를 하려고 했던가를 말이다. 그는 죄책감을 느꼈던 것이리라, 사람들을 구하지 않고 로스트 로기아를 먼저 회수했던 자신으로부터. “그래서 그렇게….” “그만두려고 했던 거야. 이 짓거리를. 따지고 보면 그랑 실리드에서 사람들이 죽은 이유는 내 탓도 어느 정도는 있으니까….” “….” “회수하는게 아니라… 로스트 로기아를 파괴해버렸다면, 지진은 멈췄을거야.” 로스트 로기아의 반응으로 인해 그것으로부터 뿜어진 에너지가 지진을 일으켰다. 그로인해 도시가 매몰되었다. 그 일이 있은 이후로 루시안은 늘 생각하곤 했다. “…차라리, 그때 부서버렸으면….” 내가 그것을 부서 버렸다면, 이라고…. 그리고 씁쓸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집무관의 모습을 보며, 집무관 보좌는 그제야 모든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고…. “…왜, 얘기하지 않았어?” “괜히 너한테까지, 이 일에 환멸감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와 달리 넌 이 일에 만족하고 있고….” “멍청아, 그럼 왜 지금 와서 얘기하는 건데?” “이번 일하고 관련되어 있잖아.” “어이구, 잘나셨어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너 때문에 사람들이 죽은 거라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잉여 인간처럼 지내왔었구나?” 잉여 인간이라는 아델리에의 비꼬는 말에 루시안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과 달리 아델리에는 시공관리국에서의 일에 만족하고 있다. 그녀에게 있어서 가업이나 마찬가지니까. 막상 얘기하고 보니 아델리에가 시공관리국에 환멸감이나 혐오감을 느낄까봐 루시안은 걱정이 되었던 것이고…. “사과 하나가 썩었다고 해서, 나무에 달린 모든 사과가 썩은 것은 아니잖아?” 차에 시동을 다시 걸면서, 아델리에가 중얼거리는 말이었다. “루시안, 너는 썩은 사과가 아니야. 괜스레 썩은 사과들 때문에 일어난 일을, 네 탓으로 돌리려고 하지 마. 넌 마도사들의, 집무관들의, 항공 무장대의, 그리고 시공관리국의 마도 통괄관이니까.” 그리고 운전을 하면서 이렇게 덧붙이는 것에 루시안은 희미하게 웃음을 흘린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루시안이 의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있었다. “원래, 그렇게 크지 않았어.” “뭐가? 『장님의 눈』이?” “…그래, 원래는 한 주먹에 쥘 수 있는 크기의, 둥그런 형태였는데….” 2년 전, 루시안이 그랑 실리드에서 회수했던 로스트 로기아 『장님의 눈』은 얼마 전에 그가 보았던 것과 사이즈 자체가 틀렸다. 그때엔 루시안이 말한 것 그대로, 한 손으로 쥘 수 있는 사이즈였건만 얼마 전에 탈취되었던 그것은 어지간한 빌딩만한 크기를 자랑했었으니까. ‘…나에 대한 도발이군.’ 그리고 하필이면, 자신의 좋지 못한 기억과 연관되어 있는 『장님의 눈』을 가져간 광대에게 루시안은 마음 속으로 이를 갈았다. ‘놈은 날 알고 있다.’ 그랬기에 광대는 일부러 『장님의 눈』을 가져간 것이다. 자신과 『장님의 눈』이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해 취한 행동이었고, 그것으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다. 놈은 누구일까, 루시안은 마음 속으로 이 말을 중얼거렸다. 자칫하면 크라나간 역시 마찬가지로, 제 2의 그랑 실리드가 될 수도 있는 노릇이고. 예전에 한 도시를 괴멸시켰던 것이니 다시금 못하리란 법도 없다. “어쩌면 복티아가, 범법 집단에 가담한 것이 무리는 아닐 지도 몰라.” “무슨 소리야?” “내가 예전에 말했었지…? 복티아 라르셀의 가족은 모두 죽었다고.” 그 말에 아델리에는 기억 속에 잠들어있던 루시안이 해줬던 말을 떠올렸다. 그의 실종에 관해 조사를 하러가던 도중, 루시안이 분명히 그런 말을 했었고…. “복티아의 가족은 모두, 그랑 실리드에서 죽었어.” “….” “복티아 라르셀은 증오하고 있는 거지, 시공관리국을… 그리고 나를. 그 나름의 방법으로 복수를 하려는 거야.”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복티아 라르셀은 알아내었던 것이다, 자신의 가족이 모두 죽어버린 그랑 실리드에서의 일을. 그리고 시공관리국이 그것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도. 그리고 자신 역시…. 그랑 실리드로 출발하기 전날, 그가 자신에게 찾아왔었던 것을 루시안은 기억하고 있다. 복티아는 자신에게, 가족을 구해달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루시안은 그러지 않았다. 로스트 로기아를 회수하고 난 뒤엔 이미 늦어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엔 복티아 라르셀의 가족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날 이후로, 복티아와 얼굴을 마주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고…. AMM은 시공관리국과 자신을 증오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수인 것이다. “하아… 암울한 생각은 그만하고, 슬슬 점심시간이니까 식사나 하러 가자. 일단 뭘 먹어야 일을 할 수 있는 거니까….” 루시안의 표정이 한없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던지, 아델리에가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하는 말이었다. “오랜만에 옛 부하들하고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 페이트도 데리고 같이.” 하지만 페이트라는 이름이 내뱉어지자, 루시안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지는 것이었고 그에 아델리에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됐어, 난. 너희들끼리 먹도록 해.” 광대 에밀리오, 복티아 라르셀, 그랑 실리드, 그리고 『장님의 눈』. 이번 일에 관련된 이것들에 정신이 팔려있어 떠오르지 않았던 페이트에 관한 것이 떠올라버린 루시안이었고 그는 그 아이가 자신을 바라보던 눈동자를 떠올려냈다. 겁에 질린, 무서운 것을 봐버린 것처럼 공포에 떨고 있던 눈. 마법을 사용하는 자신의 모습을 봐버린 페이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신을. 다른 이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시선. 그 아이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아델리에가 같이 식사를 하러 가자는 말에도, 됐다고 거절한다. 딱히 설명을 해줬던 것은 아니지만, 양녀에게 그런 시선을 받고싶지는 않았으니까. 살상 설정의 마법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마도사가 다른 마도사에게 이해받는 다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었을까, 라고 루시안은 생각하는 것이었고…. 페이트에 대한 것은 생각치 않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이 마지막으로 맡을 사건에 대해 전념하기로 루시안은 다짐하면서 신경을 그곳으로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을 겁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던 페이트의 시선이 계속 떠오르는 것에 루시안은 어쩐지 서글프게 느껴져서, 깊은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고…. 《16:00 미드칠더 수도 크라나간, 항공 무장대》 현재, 항공 무장대의 분위기를 굳이 말해보자면 분주했다. 원래대로라면 다들 각자의 사무실에서 서류 작업에 전념하고 있거나 할 시간이었기에, 소란스럽지 않은 분위기일 것이지만 오늘만큼은 달랐으니까. “레널드, 기술 연구부에 가서 차원 정보국에 대한 해킹이 있었는지 한번 알아봐. 차원 정보국에 없었다면 유적 발굴부 쪽으로도 한번 알아보고.” “예, 블레이즈 집무관.” “아델리에 보좌는─” 그리고 그 분주한 움직임의 중심엔 루시안이 있었다. 하루라는 짧은 시간동안, 루시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장님의 눈』과 AMM들, 그리고 광대 에밀리오의 행방을 좇기 위해 열을 올리는 것이었고. 때마침 집무관 보좌에게 시켰던 일의 결과를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녀가 다른 곳에서 누군가와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며 루시안은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그녀가 얘기하고 있는 상대가, 라르고 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가서 뭐라 한마디 해주려 했던 것을 그만두는 것이었고. “존, 개발교통부에 가서 크라나간 시내의 도로에 설치된 무인 카메라들의 기록을 가져와주세요. 남은 AMM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깐 요.” “알겠습니다, 블레이즈 집무관.” 루시안 블레이즈가 돌아와서 사건의 모든 것을 일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를 알고있는 모든 국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일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AMM들의 행방을 알게 된다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거야.’ AMM은 대규모 양산이 불가능한 질량병기이다. 그렇다면 완파되지 않은 AMM들은 돌아가서 수리될 것이고, 수리되고 있는 곳엔 복티아 라르셀이 있을 거라는 것이 루시안의 생각이었으니까. 『장님의 눈』이 보관되어 있던 것을 광대 에밀리오가 알고 있었다면, 필시 전산적인 침입을 받았을 거라 짐작했기에 그가 내린 명령이었다. “….” “….” 그리고 다른 국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위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던 루시안은 붉은 빛을 띤 두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게 되자 황급히 그것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것은 페이트 역시 마찬가지. 마주칠 수밖에 없는 것이, 페이트가 현재 소속된 곳은 항공 무장대였기 때문이었다. 서로 피하고 있다 하더라도 집에선 마주치기 마련이며, 지금 일하고 있는 곳에서도 마주치게 된다. 자신과 시선이 마주치가,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버리는 루시안의 모습에 페이트는 망설이면서 뭐라 말을 꺼내려 하였으나. 그가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것에 열려던 입을 닫았다. 아무 말도 붙이지 않고 서먹서먹한 관계, 페이트로서도 이런 것은 원치 않았다. 그래서 자신 쪽에서 먼저 말을 붙여서, 평소처럼 돌아가고 싶었지만…. 루시안과 눈을 마주치게 될 때마다 떠올랐다, 무시무시한 모습이 되어선 AMM들을 너무나 쉽게 부수던 루시안의 모습이.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루시안이 마법을 쓰게 된 것은 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는데. 그런 그를 괴물 보는 것처럼 봐버렸던 것은 확실히 잘못되었다 생각하는 것이었고…. “저… 아빠….” 힘겹게 작은 목소리로 멀어져가는 루시안을 불러보았으나, 루시안의 귀에 닿기엔 목소리는 너무 작았다. 그리고 이렇게, 루시안에게 목소리가 닿지 않은 페이트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사무실의 한켠에선 조부와 손녀의 쑥덕거림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으니….“ “…뭐라고…?” 항공무장대의 국원들 앞에서, 자신의 귀를 잡고 귓속말을 속삭이던 손녀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라르고 킬이 표정을 구기면서 되묻는 말. “…당치도 않은 소리, 그런 일은 복지부의 청소년 상담처에서나 하는 일이다. 내 관할이 아니야.” “루시안이 어렸을 때엔 억지로 잡아놓고 훈계하던 때도 있었잖아요?!” “그건 공적인 일을 위해서였지, 사적인 목적으로 그랬던 게 아니야.” 계집아이라고 하면서, 라르고 킬이 눈짓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은 잔뜩 풀죽어있는 페이트였다. 라르고 킬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원래는 루시안이 어떻게 수사의 지시를 내리고, 국원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보기 위해서 집무실에서 내려왔던 건데…. 느닷없이 보좌이자 손녀인 아델리에가 자신을 붙잡아놓고는 페이트와 상담을 해달라는 말을 했던 것이었다. 물론 당치도 않은 말이라 라르고 킬은 생각했고. “블레이즈 집무관에게 훈계를 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시공관리국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해내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저 계집아이의 일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가정사정일 뿐…” “…나이 많이 먹어서 어디다 써요?!” 거절의 뜻을 밝히자, 급기얀 아델리에가 인상을 팍 쓰곤 큰소리로 따지는 것에 라르고 킬은 당황했다. 국원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해졌으니까. “나이 많이 먹은 분이, 이런 때에 쌓아둔 연륜가지고 젊은 사람 고민 좀 풀어주지 않으면 어디다 쓰냐고요?!” “….” “…자꾸 이러시면 재미없어요. 할아버지가 예전에 음주운전하시다가 단속에 걸렸는데, 빠져나왔던 거 소문 퍼뜨릴 거에요.” 급기야는 협박을 해오는 손녀에 라르고 킬의 안면근육이 굳어간다. 물론 그런 일이 있긴 했다, 3년 전의 일이었지만. 그는 명예를 중시하고 공과 사를 뚜렷이 한다. 음주운전을 하다가 단속에 걸렸던 걸, 그냥 넘어간 건 사소한 일이지만 그런 소문이 퍼졌다간 그의 프라이드에 큰 금이 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라르고 킬은 속으로 이를 갈면서, 작게 헛기침을 한 뒤 “블레이즈 국원, 잠깐 얘기 좀 하지.” 풀이 죽어있는, 어린 계집아이 국원을 부르는 것이었고. 그제야 아델리에는 활짝 웃음 지었다. 갑자기 라르고 킬로부터 호명되자 화들짝 놀라는 페이트. 하지만 한참이나 상급자가 자신을 부르는 것에 토를 달지 않고, 머뭇거리는 걸음으로 라르고 킬 쪽으로 다가온다. “…킬 보좌, 아까 블레이즈 집무관이 맡겼던 일은 마쳤나?” “예, 이제 보고하러 가려던 참입니다. 제독.” “그럼 어서 가보도록.” 어린 계집아이의 가정사에 대한 상담을 차마 다른 이들에게 들려줄 수가 없었기에, 아델리에를 내쫓으려 한 말이었고. 속뜻을 알아차린 아델리에는 페이트에게 웃어준 뒤, 어깨를 두드려주곤 사라진 루시안의 뒤를 쫓아갔다. 그리고 침묵. 느닷없이 사람을 불러놓고, 입을 꾹 다물어버리자 부름받은 입장의 페이트는 난감할 수 밖에 없었고…. “…하는 일은, 힘들진 않나?” 아델리에가 사라지고 난 뒤, 한참이 지나서야 먼저 입을 떼는 라르고 킬. “예, 예….” 일이 힘들지는 않냐는 그의 질문에 페이트는 긴장한 것처럼, 더듬거리면서 답했다. “블레이즈 집무관은 마도사로서도 뛰어나지만, 사건의 수사쪽으로도 뛰어나다. 집무관을 지망한다면 이런 기회에 그를 보고 배워두는 것이 뒤에 도움이 되겠지.” “…예.” “블레이즈 집무관이,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봤다지?” 그리고 그는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하곤, 말을 꺼냈다. 라르고 킬이 한 말에 페이트는 깜짝 놀라서,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는 눈으로 그를 쳐다본다. 물론 라르고 킬로서도, 아델리에가 루시안에게 한참이나 물어봐서 알아내었던 사실을 들었던 것이지만. “살상 설정의 마법을 사용하는 그가 두려운가?” “아, 아뇨….” “그럼, 어째서 그를 멀리하고 있는 거지?” 살상 설정의 마법. 물리적인 파괴 행위를 낳는 부류의 마법을 칭한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는 루시안이 두렵냐는 라르고 킬의 질문에 아니라고 답했던 페이트. 하지만 그가 이어서 묻는 말에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주변에 입은 많고, 내 귀는 열려있다.” “….” “난 블레이즈 집무관과 블레이즈 국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단지 살상 설정의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만으로 그를 피하는 건 조금 그렇군. 어디까지나 네 양부다.” 피는 이어져있지 않지만 양부이다. 돌봐주는 가족, 그런 가족을 무시하거나 피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라르고 킬이 하는 말이었고…. “…살상 설정 마법 때문이…, 아니에요….” 그리고 페이트가 말한다. “…평소의 모습과, 달랐어요….” 처음으로 보는 루시안의, 마도사로의 모습이었다. 새롭게 바꾼 자신의 배리어 재킷과 비슷한 디자인을 한 루시안의 배리어 재킷. 창의 형태를 띤, 그의 인텔리전트 디바이스. 그리고 부순다는 목적에 충실한 그의 마법. 살상 설정의 마법이라는 것에 꽤나 놀랐었지만, 페이트가 루시안에게 두려움을 품게 된 진짜 이유는─ 살상 설정의 마법으로 AMM들을 효율적으로 파괴하던 루시안의 모습이, 평소의 모습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마치 딴 사람이 된 것처럼…. 그것을 보고 페이트는 두려워했던 것이다. 이미 한 번, 돌변해버린 이로부터 상처받은 적이 있다. 자신을 만들어준 어머니, 프레시아 테스타로사. 그녀를 어머니라고 믿었고 그렇게 불렀으며, 그녀가 아무리 자신에게 싸늘한 태도를 취했더라도 페이트는 그녀를 따랐다. 자신을 딸이라고 불러줬었으니까. 하지만 그러던 그녀가, 믿었던 어머니가 돌변하여 자신을 주저없이 버렸을 때. 그때의 충격은 아직도 가슴 속에 남아있다. 마도사가 된 루시안의 모습을 보면서 그때를 떠올려버렸던 것이다. 혹시나 루시안이, 평소에 보여주었던 모습이 거짓된 것은 아니었던가 하고…. 그리고 페이트가 이와 같은, 속에 품어두었던 속내를 조금씩 내뱉는 것에 라르고 킬은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루시안 블레이즈가, 너의 모친처럼 태도를 돌변시키진 않을까 두려웠다는 얘기군.” “….” 시시한 고민이라고, 하지만 어린애다운 생각이라고 라르고 킬은 코웃음 치면서 생각한다. “루시안 블레이즈가 시공관리국에서, 언제부터 일해 왔는지 알고는 있나?” “…일곱 살 때부터…, 집무관으로 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잘 아는군. 블레이즈 집무관은 네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너보다 훨씬 어린 나이때부터 시공 관리국에서 마도사로서, 집무관으로서 일해 왔다.” “….” “루시안이 잡아넣은 범법자들만 해도 상당한 숫자고, 해결해온 사건만 하더라도 엄청나지. 살상 설정의 마법을 사용해서 루시안은 지금까지 이 일을 해왔었다.” 그것은 다른 이들로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얘기였다. “살상 설정을 사용하는 마도사가 12년 동안 일 해오면서, 어느 정도의 인명 피해를 냈을 것 같나?” “….” “단 한 명의 범법자도 죽지 않았다. 게다가 큰 부상을 입었던 범법자들의 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지.” 살상 설정의 마법을 사용하면서도, 12년 동안 단 한 명의 범법자도 죽지 않았다는 말에 페이트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살상 설정이라 하는 것은 인명 피해를 낼 수 있다는 전제가 토대로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내지 않았다 하는 것은…. “네가 생각했던 것처럼, 루시안 블레이즈의 진짜 모습이 가차 없는 냉혈한이었다면 그런 말도 안되는 기록은 없었겠지.” 라르고 킬은 페이트와 얘기하던 것을 그만두곤 발걸음을 사무실 밖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루시안 K. 블레이즈라는 인간을, 이해하도록.” 그리고 이 말을 남긴채, 늙은 제독은 모습을 감추었다. 일방적으로 남겨진 페이트는 라르고 킬이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루시안의 진짜 모습이 가차 없는 냉혈한이었다면 수많은 범법자들이 루시안의 손에 다치거나 죽었을 것이라는 말. 한참이나 생각하고서야 페이트는 라르고 킬의 그 말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루시안의 진짜 모습은 헛된 것이라는걸 그 나름의 방법대로 표현한 거라는 걸 깨닫게 되었고…. 그리고 루시안 K. 블레이즈라는 인간을 이해하라는 말. 그것은 루시안을 두려워하고 멀리하던 자신에게 날리는 깔끔한 일침이라는 것 역시 깨달았다. “….” 시선을 돌려서, 루시안이 돌아오지는 않았을까 살펴본다. 하지만 그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페이트는 그러면서 생각해보았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살상 설정의 마법으로 범법자들을 상대해온 사람을 이해하려고 생각해 보았던가를. 단지, 그가 평소의 모습과는 정 반대의 모습을 보였다고 그것을 그의 진짜 모습으로 받아들여버렸던 자신이다. 페이트의 꿈은 옛날의 자신과 같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위해 집무관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라르고 킬의, 루시안을 이해하도록 하라는 충고.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타인을 이해하는 것에 앞서서, 가족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 늙은 제독으로부터, 이와 같은 소중한 것을 배우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페이트는 그가 걸어 나간 곳을 향해 거수경례를 붙이는 것이었다. * * * * * * 《20:00 미드칠더 수도 크라나간, 지상본부 제 2 부사령실》 “…네가 말하던 그 계획이, 이런 것이었나…!” 늙은 남성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호령하듯이 울려퍼진다. 미드칠더 수도 크라나간, 육전 마도사들이 소속되어 이른바 ‘지상의 평화를 지킨다’라는 말을 외치곤 하는 지상본부. 그곳에서도 여러 명의 부사령관 중 한 명인, 알렉산더 베네토의 집무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으니. 그것은 그의 분노에 겨운 목소리임이 분명했다. “이런 것을 혁명이라 하는 건가?! 이건 혁명이 아니라, 테러일 뿐이다!” “진정하시지요, 베네토 소장.” “진정하라니! 얼마 전, 네가 일으킨 일을 알고 있는 내게 진정하라고?! 애당초 AMM이라는 질량병기 역시, 너의 수작질이었지 않나!” 그리고 지상본부의 부사령관으로부터 호령을 받고 있는 것은, 검은 로브를 걸친 광대 가면의 사나이. 광대 에밀리오였다. “질량 병기를 이용, 시공관리국 마도사들에 대한 테러와 로스트 로기아의 탈취! 이것의 어디를 혁명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 내게 힘을 준다는 것이 이런 의미였나?!” “아아, 화만 내지 마시고 제 얘기를 좀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넌 범죄자다!” 노호성을 내뱉는 그의 말에, 에밀리오는 딱히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춤추듯이 몸을 흐느적거렸다. “소장.” 몸을 흐느적거리던 광대가 자신을 불러오는 것에, 알렉산더 베네토는 노여움이 타오르는 눈동자로 가면 속의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AMM 육전형…, 질량병기에 의해 살해된 대부분의 마도사들은 지상 본부의 육전 마도사들이었겠지요…?” “당연한 것 아닌가!” 그것은 알렉산더 베네토가, 이 남자에게 가장 화가 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번 일, AMM들의 시공관리국 마도사들에 대한 테러의 가장 큰 희생양은 대다수가 지상 본부에 소속을 두고 있는 육전 마도사들. 그들은 알렉산더 베네토에겐 부하였던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혁명의 시작은 수많은 이들이 흘린 피이니. 게다가 AMM 육전형의 특성상, 육전 마도사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고….”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화가 난다는 차원이 아니라, 이제는 어처구니가 없어지려하는 그였다. “더군다나, 도대체 로스트 로기아는 왜 탈취한 거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은 그가 로스트 로기아를 탈취했다는 것. 좋은 목적을 가지고 로스트 로기아를 가져갔을 리는 없다. 더군다나, 누군가의 앞에서 그것을 탈취해버렸다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했고…. “루시안 블레이즈가, 이번 일을 맡게 되었다.” “…호오, 고매하신 마도 통괄관께서 말입니까?” 루시안 블레이즈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어찌 이렇게 여유있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말인가? 베네토는 그것이 이해가되지 않았고…. “잘됐군요, 블레이즈 마도 통괄관이 나서게 되었다라….”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거지. 넌 이제, 특 S급 범죄자로 분류된 몸이다” 특 S급의 범죄자로 분류되었다는 말에 광대는 기분이 좋다는 듯이 낄낄거리더니, 한참동안 웃어재끼고서야 입을 열었다. “오늘은 당신에게 조만간 있을 일에 대한 계획을 말씀해드리고자 온 겁니다.” “…테러겠지.” “아무렇게나 생각하십시오, 혁명이든 테러든. 어떻게 생각하셔도 상관치 않습니다, 다만… 성공하게 된다면 시공관리국이라는 집단은 무너지게 될 겁니다.” “….” “앞으로 1주일 뒤, AMM 양산형과 육전형들의 항공 무장대, 그리고 크라나간의 여타 시공관리국 기관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있을 겁니다.” 1주일 뒤. 광대는 1주일 뒤, AMM들이 시공관리국을 공격할 것이라 말하고 있었고 그 말에 알렉산더 베네토는 흠칫 놀랐다. “그랑 실리드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겠지요?” “…물론.” 당연히 알고 있다. 미드칠더 인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기도 했고…. 2년 전, 대지진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매몰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생죽음을 당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 도시의 이름이 그랑 실리드라는, 미드칠더의 사람들에겐 문화의 중심지로 여겨지던 곳이었다. “큰 비극이었다, 그것은.” “그렇죠, 수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임 당했으니까.” 그런데 광대의 어투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노련한 그는 눈치채었다. 죽임 당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 그 말. “…죽임 당했다고? 무슨 소리지? 그랑 실리드는 대지진 때문에….” “로스트 로기아로 인해 발생한 대지진이었죠.” 매몰된 거 아니었나? 라는 말을 끊고, 광대가 툭 내뱉는 말에 알렉산더 베네토가 얼어붙었다. “…뭐…?” “당시, 시공관리국에서 발굴해내어 연구 중이던 고대 베르카의 로스트 로기아. 『장님의 눈』이 연구 중 반응을 일으켜서 대지진을 일으켰었죠. 아, 모르고 계셨나요?” 천연덕스럽게 모르고 있었냐 물어오는 광대. 당연히 모르고 있었다, 그런 것을 알고 있었다면 자신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있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시공관리국은 마도사들을 파견했고. 최고의 마도사에게 인명 구조가 아닌, 로스트 로기아의 회수를 지시했죠.” “….” “그리고 자신들의 실책과 로스트 로기아의 존재를 은폐하기 위해, 대지진으로 발표했던 겁니다.” 말도 안 된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알렉산더 베네토는 광대가 춤추듯이 흐느적거리면서, 지껄이는 말에 부들부들 떨면서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가, 그곳에서. 그리고 시공관리국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고향으로 두고 있었고 그 일에 슬퍼했었는가. 그런데, 그것이 시공관리국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고 그것을 은폐했다니…. “…그, 말을… 어떻게 믿으란… 거지…?” 떨리는 목소리로 충격적인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는 광대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 물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낄낄거리는 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미는 광대였고. “받으십시오.” 그것은 하나의 디스크였다. “일주일 뒤, 정오가 되면 지상본부 내에 그곳에 담긴 영상을 틀어주시면 됩니다.” “…이건….” “진실이 담긴 마법의 상자라고나 할까요? 큭큭….” 진실이 담겨있다. “진실이 드러나게 되면, 혁명은 시작될 겁니다.” “….” “그럼, 안녕히…. 알렉산더 베네토 소장.” 그리고 광대는 이전처럼 전송 마법을 통해 모습을 감추는 것이었으니. 광대가 자신에게 넘겨주면서 진실이 담긴 마법의 상자라고 하였던 디스크를 바라보며 한참이나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주먹을 꾹 죄면서 그것을 주머니에 쑤셔넣는 알렉산더 베네토였다. 《16:00 미드칠더 수도 크라나간, 항공 무장대 제 03 훈련 스페이스》 적색의 마력광을 띤 마력의 집속포가 무지막지한 기세로 자신에게 덮쳐오는 것에 코트와도 같은 배리어 재킷을 걸친 마도사는 황급히 그것을 피해내었다. 그리고 피해냄과 동시에, 상대 마도사에게 접근하여 들고있는 디바이스를 휘둘러, 플라스마의 날을 뻗치게하는 루시안. 루시안의 마법은 살상 설정의 마법이다. 아무리 마력으로 만들어진 플라스마의 칼날이라지만 살상 설정의 마법인 이상, 닿게 되면 베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루시안은 그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상대에게 그것을 휘둘렀던 것이고 상대방 마도사는 의외로 그것을 침착하게 잘 막아내었다. “…그동안 연습 좀 했구나, 라이오넬.” “선배야말로, 녹슬었다고!” 루시안에게 녹슬었다고 맞받아치는, 라이오넬이라는 이름의 젊은 마도사는 배리어로 플라슴 블레이드를 막아냄과 그 주변으로 사격 마법을 발동시켰다. 루시안을 향해서 발사되는 사격 마법. 평범한 마도사들의 사격마법과는 다른, 빠르고 매서운 사격 마법이 덮쳐오자 루시안은 실소했다. “…녹슬었다고, 내가?” 근거리에서 발사된 사격마법. 보통이라면 회피하는 것은 불가능, 방어 마법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모두 막아내는 것을 불가능하다. 그러나 루시안이 취한 대처는 방어도, 회피도 아닌 맞받아치는 것이었다. 몸에 들끓던 푸른 플라스마를 내뿜는 것으로, 그것들을 일시에 무력화시키는 것이었고 그와 동시에 궁그닐을 상대방의 목에 휘두르는 루시안. 그리고 궁그닐의 날은, 마도사의 목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나한테 그런 말을 하기엔, 넌 아직 일러.” 루시안의 디바이스, 궁그닐이 라이오넬의 목덜미에 겨누어져 있었으나 라이오넬의 디바이스는 루시안을 향해 겨누어지지 못했으니까. 모의전이었기에 디바이스를 멈춘 것이지, 만약 실전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모의전이라고는 하지만 져버렸다는 사실에, 맥 빠진 한숨을 내쉬는 라이오넬. “…뭐야, 정말로 마도사 질을 1년 넘게 안한 사람이 맞기나 해? 현역으로 한창 뛰고 있는 나보다 더하잖아.” “10년만 있으면, 날 이길 수 있을 지도 몰라?” “…그때까지 선배가 지금 그대로라는 전제 하의 얘기지.” 물론 이것은 서로가 농담으로 하는 얘기였다. 루시안은 늦은 시간까지, 시간을 내주면서 자신의 모의전 상대가 되어준 후배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면서 어깨를 두드려준다. 살상 설정의 마법을 사용하는 루시안에게, 모의전의 상대가 되어줄 이를 찾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자칫하면 큰 부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게다가 마도사 랭크 SS의 마도사를 상대해줄 수 있는 마도사의 숫자는 손에 꼽을 정도니까. 실제로 같은 SS랭크의 마도사들도 루시안을 상대하는 데에 애먹곤 하는 것이, 같은 마도사 랭크 SS에도 급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기도 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루시안의 모의전 상대가 되어주었던 라이오넬은 공전 랭크 S에서도 +축에 속하는 뛰어난 인재였고 루시안 역시 높이 평가하는 후배 마도사이기도 했다. 그는 본인의 장기인 사격 마법을 상황에 맞춰서 아주 효율적으로 상대하는 마도사이다. 근접전 위주의 루시안에게 있어서는 골치 아픈 타입의 마도사이기도 하고. 그와의 모의전을 통해 상성상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찾아내기도 했었다. “그래도, 나랑 모의전을 해줄 수 있는 정도면 너도 일류에 속하는 거야.” “됐어, 괜한 말 하지 마. 난 아직 선배에 비하면 멀었으니까.” 칭찬을 해주는 말에도 한숨을 내쉬면서 됐다고 말하는 라이오넬. 루시안이 항공 무장대 소속의 마도사인 라이오넬에게 모의전 상대를 해달라고 부탁하여, 늦은 시각까지 훈련 스페이스에서 모의전을 하고 있던 이유는 간단했다. 마도사끼리의 싸움에 대한 감을 되살려놓고자. AMM들은 기계들이다. 비록 전투 능력에 있어선 뛰어난 AI를 자랑하지만 화력만으로 밀어붙인다면 파괴할 수가 있다. 하지만 마도사를 상대하게 될 경우는 얘기가 달라진다. 상황에 따라 상대에 맞춰나갈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감각이 크게 승패를 좌우하는 것이다. 그랬기에 루시안은 친하고, 그나마 자신을 감당해줄 수 있는 상대를 골랐던 것. 12년, 그리고 13년 가까이 해왔던 마도사로서의 일이다. 그때의 감각이 얼마동안 쉬었다고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 루시안은 근심에 가득 찬 한숨을 내쉰다. 로스트 로기아 『장님의 눈』을 탈취한 범법 마도사, 그리고 AMM들을 조종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범법자. 광대 에밀리오라는 이름의 마도사. 접촉한 것은 딱 한 번뿐이었고, 접촉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잠깐이었다. ‘놈은 밑천을 드러내지 않았어.’ 물론 자신 역시, 전력을 다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건 상대 역시 마찬가지. 밑천을 모두 드러낸다면 자신에 필적하거나, 혹은 능가할지도 모르는 자질을 지닌 마도사. 그렇다면 그런 마도사를 상대해야만하는 것은 그였기에, 루시안은 고삐를 조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어라? 선배, 저기 저 애. 선배 딸 아냐?” 그때, 흘러내리는 땀을 닦던 라이오넬이 훈련 스페이스 외곽쪽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루시안의 표정이 당황일색으로 물들었다. 라이오넬이 어떻게 페이트를 알고 있느냐? 당연한 것이다, 그 역시 항공 무장대의 마도사니까. 이미 항공 무장대에 속해있는 이 치고, 페이트가 루시안의 양녀라는 것을 모르는 거의 없었다. 후배의 말에 시선을 돌려보니, 진짜로 페이트가 모의전하던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에 루시안은 어쩔 줄을 몰랐다. 마도사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보고, 아이가 겁에 질렸던 것이 얼마 전의 일이건만…. “선배, 어디가?” “아, 아니… 난 다른 데에 볼 일이 있어서….” “볼 일이 있다는 사람이, 배리어 재킷을 입은 채로 다른 데로 날아가려고 하시나? 기껏 딸이 찾아왔는데 두고 도망가려하지 마.” 만나기 껄끄럽고 어색해서, 도망가려고 했다. 하지만 라이오넬이 붙잡는 것에 그 시도는 미수에 그치는 것이었고. 그리고 그에게 끌려오듯 아래로 내려오게 되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어, 블레이즈 국원?” “아, 안녕하세요….” 루시안과 모의전을 하던 라이오넬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그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던 페이트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하지만 루시안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피하는 것에 의아해할 수 밖에 없는 라이오넬. “저… 아빠….” 그리고 먼저 루시안에게 말을 건 것은 페이트 쪽이었다. 페이트가 자신을 부르는 것에, 그제야 시선을 맞추고 페이트를 응시하는 루시안. “저랑, 모의전을 해주세요.” 그리고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이 말에 당황한 것은 라이오넬이었다. 같은 기관에 소속되어 있고, 선배가 입양한 양녀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라이오넬은 페이트가 마도사로서 훈련을 받는 것을 나름 지켜봐왔었다. 마도사로서의 재능은 확실히 뛰어나다. 하지만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보석이나 마찬가지인 페이트다. 그런 아이가 공전 랭크 S+에 속하는 자신도 버겁기 짝이 없는 루시안과의 모의전을 하겠다니. “…좋아.” “선배?!” 웃으면서, 농담하지 말라는 듯이 만류하려고 했다. 하지만 요청을 받은 루시안이 수락해버리는 것에 라이오넬은 놀랐고…. “수고해줬어, 가서 쉬어. 라이오넬.” “선배, 진짜로 할 생각이야?!” 말 그대로 어린아이와 어른의 싸움이다. 진짜로 할 생각이냐는 물음에 루시안은 비행 마법을 사용해 하늘로 떠오르는 것으로 답하는 것이었고…. 페이트 역시, 본인의 디바이스를 꺼내들고 배리어 재킷을 걸친 뒤. 루시안의 뒤를 따라 모의전 스페이스의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넋놓은 채, 라이오넬은 그들의 모습을 아래에서 올려다볼 뿐. “…봐주진 않을 거야.” “…예.” 라이오넬을 외곽 쪽에 남겨둔 채, 루시안은 한숨을 내쉰 뒤 말했고 그에 페이트는 고개를 끄덕인다. 루시안의 마력이 플라스마와 뇌전이 되어,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평소 같았으면 모의전 상대가 되어달라는 말에 절대 응해주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루시안은 지금 궁그닐을 들고 마력을 뿜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시작한다는 말도 없이, 순식간에 페이트와의 거리를 좁히는 루시안. ‘…빨라…!’ 【Sonic move】 눈 깜짝할 사이에, 루시안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 와 있는 것에 페이트는 깜짝 놀라면서 소닉무브를 사용해 황급히 몸을 피했다. 아까까지 페이트가 있던 공간을 가르는 궁그닐의 거무튀튀한 날. 페이트는 루시안의 공격이 허공을 가르고, 그가 멈춰선 틈에 포톤 랜서들을 생성시켜 사각지대를 향해 발사했다. 포톤 랜서가 쏟아져옴에도,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고 있는 루시안. 그런데 포톤 랜서들이 루시안에게 적중되기 직전에 허공에서 흩어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페이트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고…. “…내 배리어 재킷, 템페스트 폼은 네 배리어 재킷과는 달리 무겁지. 하지만 배리어 재킷이 무거운 대신, 방어에 특화되어 있어. 그리고 두터운 방어 뿐 만이 아니라 약한 위력의 마법은 무효화시키는 기능이 있거든.” 포톤 랜서는 고출력의, 강한 마법이라고 보기 힘들다. 견제용의 색이 짙은 마법이기에, 포톤 랜서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은 힘든 것이 사실이었고, 루시안이 밝힌 자신의 배리어 재킷의 비밀에 페이트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무거운 배리어 재킷으로, 이 정도의 스피드를 내었다는 말인가? 이어서 내리쳐오는 궁그닐의 참격을, 하켄 폼 상태의 바르디슈로 막아내는 페이트였다. 하지만 루시안의 힘에 밀려서, 막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날려보내졌고… “썬더러.” 【Thunderer!】 루시안의 몸을 푸른 플라스마가 감쌌다. 그것은 루시안이 전수해주었던 이동계 마법, 자신이 배운 것의 오리지널. “바르디슈!” 【Thunderer─】 자신 역시 배운 입장이라 그 마법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모든 물질을 그대로 통과해버리는 이동계 마법의 특성과 이동을 가속시켜주는 이동 마법의 융합형. 자신 역시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루시안의 스피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기에. 그리고 썬더러를 사용함과 동시에, 겉에 걸치고 있던 하얀 색의 망토가 사라졌다. 썬더러를 사용한 상태에서의 소닉 폼. 루시안의 마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자신보다 빠른 스피드를 지닌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방어력이 떨어지겠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궁그닐에 맺힌 플라스마의 검날, 플라슴 블레이드가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것에 페이트는 가까스로 그것을 피해내었다. 그리고 피해냄과 동시에 루시안을 향해 바르디슈의 하켄을 휘둘렀다. 하지만 루시안이 궁그닐을 휘둘러 그것을 막아내자 공격은 무효화되었고─ 【Volt charge!】 "파이어.“ 루시안이 내민 왼손으로부터, 작은 뇌전의 구체가 모였고 루시안은 그것을 페이트에게 쏘아보냈다.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그랬기에 피해낼 수는 있었으나─ “큭!” 스치듯이 피해낸 순간, 그것이 갑자기 폭발하면서 산탄을 내뱉듯이 전류의 흐름을 내뿜자 페이트는 비명을 질렀다. 『볼트 차지(Volt charge)』. 사격 마법의 일종으로, 굳이 표현하자면 산탄과도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다. 보통의 뇌전이 모인 구체이지만 사용자의 임의에 따라, 그것을 폭발시켜 전류를 흩뿌릴 수 있는 마법이다. 전류의 위력은 강하지는 않으나, 그 전류에 닿게 되면 일시적으로 몸이 마비된다는 특징이 있는 것이고─. “안 돼, 선배!” 루시안이 볼트 차지를 사용한 것을 보게 된 모의전 스페이스 외곽 쪽의 라이오넬이 비명지르듯이 외쳤다.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볼트 차지가 사용된 뒤 이어서 사용되는 마법에 대해서. “플라스마─” 페이트의 움직임이 일시적으로 멈추자, 궁그닐을 쥐지 않은 오른 손을 위로 치켜드는 루시안. 그리고 그의 손 위로 플라스마가 모여들더니. 루시안의 위쪽에 응축되기 시작했고─. “블래스트.” 【Plasma blast!】 그 응축된 것으로부터, 푸른 플라스마의 광선이 뿜어져 페이트를 향해 뿜어졌다. 경악하는 라이오넬. 『플라스마 블래스트』, 루시안 블레이즈가 가진 몇 안되는 중거리 포격 마법. 디솔레이터라고 이름 붙여진, 루시안이 사용하는 근거리 포격 마법과는 흐름은 달리하는 마법이다. 디솔레이터에 버금가는 위력과 범위를 지닌, rs 사정거리를 지닌 마법이긴 하나 사용하기 위해선 사용자가 제자리에 멈춰 마력을 모아줘야 하고 상대방의 회피 기동에 쉽게 빗나간다는 단점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볼트 차지. 볼트 차지로 잠시동안 상대방을 마비시킨 뒤 그 틈에 플라스마 블래스트를 사용한다는 루시안 나름의 중거리 싸움인 것이다. 살상 설정의 마법이다. 다른 마법들과는 달리, 저 플라스마에는 살상력이 있다는 의미였고. “!” 볼트 차지로 인한 마비는 풀렸으나, 페이트는 그 틈에 자신을 향해 뿜어진 푸른 플라스마의 포격을 보았다.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바르디슈로부터 카트리지가 토해졌다. 그리고 페이트의 전방에 형성되는 노란 미드칠더 식의 마법진. “플라즈마…” 사정거리를 희생한 대신, 발동 속도와 위력을 높인 페이트의 포격 마법., “스매셔!” 비룡일섬을 상쇄해내었으며, AMM 육전형을 파괴했었던 페이트의 포격마법이 루시안의 플라스마 블래스트를 향해 뿜어졌다. 푸른 플라스마와 금빛의 뇌전이 충돌한다. 카트리지 시스템이 적용되어, 순간적인 마력의 증폭이 가능한 페이트였고 그것을 통한 플라즈마 스매셔였다. 하지만 카트리지 시스템을 배제한 루시안의 마법에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플라스마 블래스트의 포격이 자신에게 닿기 전의 시간을 벌어낸 페이트는 썬더러를 사용한 뒤 포격마법을 피해 루시안에게 접근했고… “바르디슈, 잔버 폼!” 【Zanber form】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풀 드라이브, 바르디슈 어설트의 또 다른 형태인 잔버 폼으로 그것을 변형시켰다. 낫의 형태에서 이제는 대검으로 형태를 변환한 바르디슈. “하아아아아!” 그것을 양손에 쥐고, 플라스마 블래스트를 쓰고 있었기에 자리에 멈춰 선 루시안에게로 휘둘렀다. 그 동안 루시안에 대해 품었던, 자신의 오해를 모두 뿜어내려는 것처럼─ 그것을 휘둘렀다, 그동안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양아버지에게. 하지만 바르디슈 잔버의 마력 참격은 루시안에게 닿지 못했다. 마력의 칼날을 막고 있는 것은 푸른빛을 띤 배리어. 루시안의 오른 손으로부터 펼쳐져있는 원형의 방어 마법에 막혀있었고, 오히려 푸른 플라스마를 머금은 루시안의 궁그닐이 페이트의 눈앞에 겨누어져 있었고. “…과감하구나.” 더 이상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 루시안이 하는 말이었다. “평소의 너였다면 배후를 노릴 거라 생각했는데.” 루시안은 페이트에게 겨누던 궁그닐을 거두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해서, 후방에서 들어올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페이트가 정면을 공격했던 것에 조금은 놀랐던 루시안. 만약 페이트의 스피드가 자신과 비슷했다면 페이트의 공격은 적중했을 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루시안이 겨누고 있던 궁그닐을 내리는 것에 페이트 역시 바르디슈를 거두었다. 그리고 루시안에게 웃음지어 보인 뒤, 말했다. “아빠가 가르쳐 주셨잖아요.” 맑게 웃는 얼굴로, 더 이상 자신을 두려워하는 눈이 아닌 눈으로 말하는 페이트에 루시안은 망연해졌다. “때로는 과감하게 정면을 노려라, 라고요.” “….” AMM들을 파괴할 때, 루시안이 사용한 살상 설정의 마법들과 돌변해버린 모습을 보고 그가 행여나 자신의 어머니처럼 돌변해버리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루시안의 입장으로서는 페이트가 자신을 이해해주기를 바랬었으나 페이트는 루시안을 두려워했었고…. “…네가 봤던 것도, 내 또 다른 모습이야.” 입가에 자조하는 미소를 머금고,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난 마법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걸 쓰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더라고. …무자비한 냉혈한처럼…. 그래서 너한테 마법을 쓰는 걸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였는데….” 마법에 증오가 섞여있는 것은 그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마법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고, 마법을 사용하게 되면 사람이 돌변하곤 했던 것이다. 루시안은 말없이 손을 뻗어, 페이트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듯이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해해줘서, 고마워.” 고맙다고. 이해해준 것이다. 마법을 증오하는 자신이 마법을 쓸 때의 냉혈한 같은 모습을. 그랬기에 먼저 말을 걸어주었고, 자신에게 이렇게 웃어줄 수 있는 것이다. 아이의 그 웃음을 보며 루시안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떠오르는 것은 광대 가면을 쓴 마도사의 모습. ‘…나에겐, 붙잡아둬야 할 것이 있다….’ 미드칠더를 위해서가 아니다. 시공관리국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 언젠가, 사직서가 수리되기 전에 라르고 킬에게 했던 말이 있다. 『소중한 것을 지킨다, 라는 것은 애초에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린 그저 소중한 것을 잠시 동안 붙잡아 놓고 있을 뿐이니깐 요』 라고. 2년 전, 그랑 실리드가 완전히 지도 상에서 사라져버린 뒤. 루시안이 품게 되었던 생각이다. 사람들을 지킨다는 생각으로 일해왔었다, 하지만 자신은 지키지 못했다. 그 이후로 루시안은 생각해왔다, 소중한 것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 붙잡아놓는 것일 뿐이라고. 그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나의 힘은, 소중한 것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잡아두기 위한 힘이다.’ 자신이 갖고있는 힘. 마도사로서의 힘은 소중한 것을 지키는 힘이 아니다. 『소중한 것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잡아두기 위한 힘』이다. 미드칠더, 시공관리국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미드칠더, 시공관리국에 속해있는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사라져버리지 않도록. 『붙잡아두기 위해』 자신은 궁그닐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이 아이 역시…. “…붙잡고 있을게.” 작게 중얼거리듯이, 속삭였다. 물론 페이트는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웃음 지었다, 해맑게. #13 프로스트(Frost) 《신력 66년 6월 20일, 10:00 미드칠더 수도 크라나간, 국립병원》 “어서와, 페이트.”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맞이해주는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전에 봤을 때와 별다른 차이는 없는 나노하의 모습,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병상 위의 소녀는 뚜렷한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안녕, 나노하.” 의식을 차렸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은 꽤 전의 일이다. 하지만 일이 바빴기 때문에, 찾아갈 짬을 내지 못했던 것을 오늘 루시안의 허락을 받은 뒤 병문안에 올 수 있었던 페이트였다. 사건의 조사를 지휘하던 루시안이었기에, 바빴겠지만 페이트는 그를 찾아가 부탁했던 것이고 그가 흔쾌히 승낙해주었다. “몸은 좀 어때?” “응, 괜찮아졌어.” 괜찮아졌다고, 웃는 얼굴로 답하는 나노하. 하지만 페이트는 크로노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을 떠올리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걷는 것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어, 고통스러운 재활 치료로 매일을 보내고 있다는 친구의 소식을 집무관 소년이 전해주었었던 것이다. 걷는 것조차도 힘겨우니, 마법도 쓸 수 없는 것이고. “하고 있는 일은 어때? 괜찮아?” “응, 다들 잘 대해주시니까…. 일도 슬슬 익숙해지고 있어.” “다행이네. 그래도 난 페이트하고, 될 수 있으면 같이 일하고 싶었는데….” 원래대로라면 같은 무장대 육사학교에 입학했어야 할 둘이었다. 하지만 페이트는 라르고 킬로부터 항공무장대로 오라는 제의를 받아 그것에 응했던 것이고…. 시공관리국 국원으로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기 위해 나노하가 육사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을 때, 페이트는 항공무장대라는 엘리트 집단에서 맨땅에 헤딩하듯 실전에 투입되었다. 물론 그 맨땅에 헤딩이라는 것이, 실패한 경우는 아닌 듯 했으니까. “언제쯤, 퇴원할 수 있을 거래…?” 조심스럽게, 친구에게 물었다. 페이트가 묻는 그 말에 힘없이 웃을 뿐이던 나노하. “모르겠어.” 그리고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도 힘이 없었다. “아직 재활 치료 중이니까, 걷는 것도 힘들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퇴원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곧 다시… 하늘을 날 수도 있을 거고.” “…응.” 하지만 그 말은 부러, 대화의 흐름이 급격히 어둡게 흘러가게하지 않기 위해 나노하가 한 말이었다. 본인의 상태는 의료진으로부터 이미 들어서 잘 알고 있는 나노하였다. 재활 치료를 마치더라도 이전처럼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다시금 하늘을 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했었다. “그나저나, 학교는 어떻게 한 거야. 페이트? 원래대로라면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인데….” “아…, 지금 일 때문에. 잠깐 동안 쉬고 있어.” “헤에…, 루시안 씨가 허락해 주셨어?” “응. 이번 일은, 아빠가 사건을 맡으셨거든. 나도 아빠 밑에서 일하고 있고….” 루시안이 사건을 맡았고, 지금은 루시안의 지시에 따라 일하고 있다 말하는 페이트의 표정을 보며 나노하는 웃었다. ‘페이트는 루시안 씨를 좋아하는구나.’ 좋은 사람임이 확실하다, 루시안은. 그것은 남인 자신이 한눈에 보기에도 느꼈던 것이다. 헌신적이고, 인간미있고, 따뜻한 사람이니까. “빨리 나아야 할텐데….” “괜찮아, 살아있으니까.” 어린 소녀답지 않은 말을 농담처럼 내뱉는 나노하였다. 하지만 나노하는 그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이렇게,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마법도 사용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살아있다면 가능성은 분명히 있기 마련이니까. 의료진이 말하길, 병원에 이송되기 전에 행해졌던 치유 마법이 자신의 목숨을 구한 것이나 마찬가지라 했었다. 출혈을 완벽하게 멈췄고 겉으로 난 상처를 말끔히 치료했으니까. 출혈이 조금만 더 지속됐더라면 죽었을 지도 모른다 했었다. 나노하는 기억하고 있었다. 의식이 완전히 꺼져버리기 직전에 들려왔던 누군가의 목소리.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치유 마법을 걸어주었다는 것도 희미한 의식 중에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더러 운이 좋다고 하면서 치유 마법을 걸어주었던 자. 모습은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하는 것은 목소리 뿐. 그리고 그 목소리가 때론 머릿속을 울려왔다. 『너는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꼬마 아가씨?』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나노하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재활 치료를 하면서. 입원해 있는 동안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이라고. 나중에 누군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그때는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하겠다 다짐하면서 말이다. * * * * * * 《신력 66년 6월 20일, 12:00 미드칠더 수도 크라나간, 항공무장대 훈련 스페이스》 요란한 바퀴소리가 울려퍼졌다. 바퀴를 회전시키면서, 바닥엔 타이어 자국을 남기면서 날뛰고 있는 것은 커다란 모터사이클. AMM 육전형. 그것은 동체로부터 AMF 발생장치를 내뱉은 채로 날뛰고 있었으며 그것에게로 디바이스를 겨누고 있는 것은 한 무리의 마도사들이었다. 마도사들이 디바이스를 겨누고, 마법을 사용하려는 것을 감지한 AMM이 그들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거대한 동체를 지닌 기계가 돌진해오자 일제히 사격 마법의 탄환을 그것에게로 발사시키는 마도사들. 정상적인 사격 마법이라면 AMF의 효과영역에 접어들자마자 사라졌으리라. 허나 그 사격 마법은 여러 겹의 막을 덧씌운 다중 탄각 사격 마법이었기 때문에 위력을 감소될지언정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들이 발사한 사격 마법이 AMM의 동체를 휩쓸었고, 그것에 마도사들은 계속해서 사격마법을 퍼부었으니.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AMM 육전형은 완전히 파괴되어 기동을 멈추게 되었다. “그래도 항공무장대는 교육이 잘 된 편이야. AMF라는게 드러나기 시작하면서부터, 할아버지가 대 AMF 훈련을 주로 하게 지시했거든.” 지금의 것은 마도사들의 대 AMF 훈련이었다. 처음으로 AMM과 접촉했던 루시안과 아델리에의 소속이 항공무장대였던 만큼, 항공무장대는 여타 시공관리국의 부대들보다도 AMF에 대한 마도사들의 훈련이 잘 되있었다. 라르고 킬은 단숨에 AMF라는 것의 위험성을 꿰뚫어봤던 것이다. 일반 마도사들의, AMF 공략 방법을 떠맡게 된 것은 그것의 첫 희생양이었던 아델리에였고. “…훈련시키는데 고생했던 사람을 잊으면 안 돼, 아델리에 선배.” 아델리에가 구상해낸 공략 방법, 다중 탄각 마법의 훈련을 마도사들에게 시켰던 것은 라이오넬이었다. 처음에는 모두가 사용하는데 난해해했던 다중 탄각 마법이었지만 반복된 훈련을 통해 다들 그걸 능숙해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현재의 항공무장대는 시공관리국에서 가장 AMM들에 잘 대처할 수 있는 부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 마도사들이 AMF에 대한 훈련을 받는 것을 보며 루시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난 다중 탄각 마법이란건 생각도 못했었는데….” “뭐, 선배는 사격 마법 쪽으론 관심이 거의 없으니까.” “…입원해있을 땐, 병간호도 해주면서 뭐든지 해줄 것 같은 할아버지였는데 퇴원하고 나니까 원래대로 돌아오더니 다짜고짜 AMF에 대한 대처 방법을 강구하라 하더라고.” 둘의 말을 들으며 루시안은 웃음을 흘렸다. 원래는 라르고 킬 휘하의 루시안을 선두로 하는 느낌이 짙었던 항공무장대다. 하지만 자신이 은퇴하고 나서는, 사무나 조사 쪽으로는 아델리에를 선두로. 그리고 실전 쪽으로는 루시안에 가려서 빛을 보지 못하던 라이오넬을 선두로 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한 명에게 의존하는 것은 좋지 않다. 원톱보다는 투톱이 훨씬 더 효율성있고 미래지향성이 있다 루시안은 생각한다. 확실한 카드 한 장 보다는, 여러 부분으로 사용할 수 있는 카드가 여러장 있는 것이 더 승산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체제, 마도 통괄관에 의존하던 체제의 경우 만약 자신이 무너져버리는 경우가 생긴다면 모두가 무너지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루시안은. 하지만 앞으로는 변해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고…. “아직 일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니까. 조만간 또다시 일이 터지게 될 거야.” “그때를 위해서 준비를 해두자는 거지?” 아델리에의 거드는 말에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인다. 시공관리국 마도사들의 강점은 뛰어난 재능이라기보다는, 완벽한 호흡에 있다. 호흡을 완벽히 맞추는 마도사들은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나저나 딸내미는?‘ “친구 병문안 가도 되냐기에 갔다 오라고 했어.” “…공과 사는 철저히 하는 마도 통괄관께서, 딸내미한테는 자비로우시군요.” “내가 언제 공과 사를 철저히 했다고….” “…선배 때문에, 내가 예전에 여자친구한테 버림받았었지. 그때를 생각하면 화가 나, 왜 내가 먼저 차버리지 못했을까? 하고. 꼴사납게 내쪽에서 먼저 차였잖아.” “그건 킬 제독 눈이 있어서, 별 수 없었던 거지. 일이 있는데 애인하고 데이트에 가도 되냐고 제독 앞에서 묻는 녀석이 어딨어?” 루시안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그리고 그때, 막 발길을 돌리려던 때. 허공에 떠있던 스크린으로부터 긴급 통신이 걸려오는 것이 루시안의 발걸음을 붙잡았고…. 【여기는 크라나간 시내, 블레이즈 집무관!】 다급한 외침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루시안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일입니까?” 【놈들이, AMM들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AMM들 말입니까?” AMM이 다시 나타났다는 말에 루시안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어느정도 예상했던 것이기에, 그렇게 경악스럽지는 않았으나… 루시안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저번의 AMM들에 의한 테러가 있은 이후로 시공관리국은 크라나간의 수비 체계를 바꾸었다. 기존의 외곽에 치중되어있던 마도사들의 배치를 바꾸었다. 그리고 크라나간 시가지 내부에 육사무장대의 육전 마도사들을 고루 배치하여 외곽으로부터의 공격보다는 내부에서의 공격에 대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통신을 걸어온 마도사는 육전 마도사가 아니라 항공무장대 소속의 공전 마도사였던 것이다. AMM들이 나타났다면 지상본부의 육전 마도사들과 접전을 벌였을 것이고, 육전 마도사가 이 일을 일임 받은 루시안에게 연락을 걸어왔을 텐데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우선 근방의 육전 마도사들에게 지원을 지시하겠습니다. 킬 보좌, 지상본부의 육전 마도사들에게 지원 명령을.” “예, 블레이즈 집무관.” 그리고 아델리에가 따로 공간 투사 윈도우를 형성시켜서, 지상본부의 육전 마도사들에게 지원을 나가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그때─ 【거부하겠습니다.】 들려오는 지상본부, 육상무장대 측의 답변에 아델리에와 라이오넬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루시안의 안색이 굳어갔다. “…명령 불복종입니까?” 그리고 아델리에를 대신해서, 싸늘한 목소리로 직접 상대방 측에 고하는 루시안.

댓글